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구약에서 짐승의 피를 하나님께 바친 것은, 장차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 죄 값으로 자신의 피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을 예표합니다.

예표의 성취인 동시에 거기서 더 진일보한 것이 신약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음(벧전 1:2)’입니다. 이는 단지 죄 값으로 그리스도가 대속의 피를 바쳤다는 의미를 넘어, 그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전가시켰다는 뜻입니다.

이는 대속죄일 송아지의 피 절반을 하나님이 임재하는 속죄소(贖罪所, atonement cover)에, 절반은 백성들에게 뿌린(출 24:6-8) 속죄 의식에 근거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피로 세운 언약의 당사자’라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께 바쳐진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레 17:11) 사람에게 전가되어 죄 사함을 받게 한다는 뜻입니다.

유월절(踰越節, the Passover) 어린양의 피가 뿌려진 이스라엘 집에 죽음의 사자가 들어가지 못한 것도(출 12:27), 피가 무슨 부적(符籍) 역할을 하여 그들의 집을 넘어가게 했다(踰越)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도 철저히 율법적 공의가 작용했습니다. 이스라엘 집에 뿌려진 어린양의 피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요구받지 않게 했기에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다(요 6:54)‘는 말 역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내 것으로 삼았다‘는 것의 은유적(metaphorical)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았다'는 말과 동의어지만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피뿌림을 받았다’가 구약적 표현이라면, ’피를 마셨다'는 신약적 표현입니다.

◈피와 정결

‘피로써 정결케 된다(히 9:22)’,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한다(요일 1:7)’는 말씀들을 처음 접한 이들 중에는 그 단어의 뉘앙스로 인해, 한 번쯤은 ‘예수의 피에 무슨 대단한 신통력이나 세척력이 있어 피가 닿기만 하면 죄가 씻어지는가?’ 라는 상상을 해 본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교회를 오래 다녔으면서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피의 씻음’은 피의 신통력이나 세탁 개념이 아닌, ‘공의적’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용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피로 정결케 됨’을 ‘죄 사함’으로 정의하면서, 피값 지불만이 죄 사함을 갖다 준다(히 9:22)는 율법의 엄중성을 말했습니다.

시체에 닿아 부정해진 자에게 물을 뿌려 정결케 하는 ‘정결 의식(민 19:11-13)’도 같은 원리입니다. 미신적 한국인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상가(喪家)에 다녀온 사람이 소금이나 물을 몸에 뿌리는 씻김의식(cleansing ceremony) 같은 것을 연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결 의식’은 ‘죄와 죽음’, ‘속죄와 죄사함’의 관계 속에서 이해돼야 합니다(주지하듯, 미신 의식은 죄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죄를 상징하는 주검(히 9:14)에 닿아 부정해진 자에게 암송아지를 사른 재를 탄 ‘정결케 하는 물(the water of cleansing)’이 뿌려져 그의 부정이 정결케 됩니다(민 19:13, 히 10:22).

시체에 닿은 자가 부정해진다는 것은 ‘죄는 사람을 부정하게 한다’는 의미와 함께, 원죄자 (原罪者) 아담의 피를 유전받은 인류가 다 죄인이듯 ‘죄는 유전되는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로 부정해진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지면 그가 모든 죄에서 정결케 됩니다.

혈루증 걸린 부정한 여인이 예수의 옷가를 만졌을 때, 그 여자의 부정함이 깨끗케 된 것도(마 9:20-22) 같은 경우입니다. 이는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오염시킬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가 인간의 부정을 맑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 경우에도 예수님에게서 그녀의 부정을 정화(淨化)시키는 뭔가나, 무슨 신통력이 흘러나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그녀에게 전가되어 그렇게 된 것이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는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예수를 자신의 죄를 대속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그의 옷가를 만지니, 그의 대속의 피가 그녀를 깨끗케 한 것입니다.

◈피와 생명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6:54)”라는 말씀을 들으면, 간혹 “피에 생명이 있다(레 17:11)”는 성경 말씀을 연상하며, “그리스도의 피 자체가 무슨 영험을 발휘하여 생명을 갖다주는가?” 라고 상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가 대신 지불한 피를 믿음으로 내것 삼아 율법의 의를 이루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롬 8:2)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먹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해 산다(요 6:57)’는 말씀 역시 로마 천주교의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 가르치듯, ‘떡과 포도주로 화체(化體)된 그리스도(요 14:6)를 먹으면 그것을 먹은 사람 안에서 그것이 생명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인가?’ 아니면 신비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누가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합일(合一)하면 그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인가?’ 등의 상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죄값으로 받아들여 율법의 의를 이루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요 5:24)는 뜻입니다.

이 모든 내용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실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할 때는 언제나 그의 죽음을 염두에 둡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삯(롬 6:23)’이 되어 우리를 살려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그가 죽어야 합니다. 그의 생명이 죽지 않고 서는 그가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이면의 의미 곧 그의 죽음이 간파돼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먹으라’고 했을 때, 그것을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 말은 영원히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는다 함은 역설적으로 그의 ‘죽음’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생명의 연합도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아닌,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라야 가능합니다(롬 6:4, 살전 5:10).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부정한 죄인에게 자신의 피를 뿌린 후에라야 비로소 그와 연합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성도와 부부가 되기위해 그의 피로 성도를 거룩하게 하는 일을 먼저 선행한 것에서도(엡 5:26)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교회 안팎의 에큐메니칼(Ecumenical)한 영성수련들에서 행하는 소위 하나님과의 합일(?), 하나님 체험, 임재 훈련같은 것들에서 종교다원주의적이고, 이교적 방법들이 다반사로 도입되고 있는 것을 보면 개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여! 오소서 오소서’라며, 때로는 침묵 가운데 성령을 읖조리는 그들의 모습들 속에서, 이교도들의 강신술을 보는 듯 합니다. 그들의 설교나 말에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여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계시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앞세우고서만 성도 안에 들어오시는데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만나지 않는 하나님은 진리의 보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만나는 신은 루터의 말대로 다른 신일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