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원로(元老)란 어떤 분야에 오래 종사하여 나이와 공로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일컬어 원로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senior, elder, veteran이라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헌법에도 규정했듯, 장로와 목사는 20년을 넘게 되면 은퇴 시, 공동의회 투표를 통해 원로로 추대됩니다. 별 문제 없으면 대부분 원로로 추대되고 있습니다.

장로라는 용어는 소아시아 세속 관리의 명칭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대부분 알고 있지만, 이스라엘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세가 장로 70명을 세워 자신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게 했던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장로를 ‘감독’ 과 함께 지역교회의 지도자로 언급이 됩니다.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2세기 이후 주교사제, 부제로 이어지는 삼중직무를 채택하였으며, 그 후 장로 직무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감리교단에서는 정회원 목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루터교회에서 ‘장로’와 ‘집사’는 목사를 도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도록 회중이 선출하고 평신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여지며. 오늘날에는 모든 교파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52절에 나오는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예수님이 이곳을 지나가신다는 얘기를 듣고는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칩니다.

하지만 주위에 많은 사람들은 꾸짖어 잠잠하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만을 위해, 누구 하나 절박하게 몸부림치는 바디메오의 간절한 심정을 헤아릴 줄 몰랐습니다.

바디메오가 처절하게 울부짖는 이곳 수많은 군중들과 인파 속에는 목사와 장로들 그리고 원로들이 있습니다. 누구 하나 바디메오의 간절한 울부짖음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목적에 별볼 일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목적에 걸림돌로 생각하여 외면을 합니다.

맹인 바디메오는 주위 사람들을 상관치 아니하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생애 마지막일지 모르는 이 기회가 두 번 다시 없음을 깨달은 바디메오는, 목숨을 다하여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의 사무치는 열정적인 도전으로, 그는 무사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거지 맹인 바디메오는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보게 되었다는 것은 회개의 삶을 뜻하며, 오늘 그가 그토록 애원하고 보고 싶어했던 그 모든 것들이 신실한 회개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맹인 바디메오가 그토록 보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했던 결과가 아닐까요!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라는 자각 때문에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판단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바디메오가 볼 수 있는 삶을 청했듯이, 우리도 먼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시선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려면, 먼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 분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나에게 생명의 복음을 보여주신, 그 덕분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가치를 다르게 보는 눈이 열렸고, 복의 가치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판단하기에, 그 분의 뜻을 먼저 헤아릴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과 무관하게 한 제자는 말했습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 장차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는데, 제자들은 주님의 그 신실한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정치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자리를 달라고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말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오늘 위에서 쓴 두 종류의 글에는, 거지 맹인 바디메오의 절실하게 부르짖는 소리에 관심이 없었던 목사와 장로들과 원로들, 그리고 일가 친척들 모두가 바디메오의 절박했던 상황과 그가 진심으로 세상을 보기를 원하는 그 애틋한 마음을 모르는 채,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만 얻으려고 오히려 바디메오를 꾸짖습니다.

꾸짖는 그들이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이 아닐까요? 특히 원로목사와 원로장로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하여 당회원 모두가 잘못하고 있는데도, 화평을 핑계 삼아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이 되고 성도들이 떠나가는데도 일체 함구로 맞서고 있습니다.

그럴 바에 왜 그토록 원로목사와 원로장로를 하려고 애를 썼던가요? 목사와 장로는 양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없는 목사와 장로가 과연 필요한 직분일까요?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지도자들이 참 지도자들일까요? 오늘날 교회 안과 노회, 총회에서 감투에 혈안이 되어 성도들은 아예 뒷전이고, 자신의 목적 달성에만 혈안이 되어 날뛰는 그 눈꼴 사나운 모습들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원로란 믿음의 선배요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들입니다. 평생 주님과 교회 화평을 위해, 그리고 성도들의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봉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만사를 제쳐두고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질책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질책이나 징계는 사랑인 것입니다.

문제 투성이인 교회를 바라보면서,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이 주를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그럴 바에는 왜 원로를 하려고 애가 마르게 힘을 썼던가요?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왜 모르고 계실까요? 맡은 사명은 철저히 감당하고 날마다 십자가의 참 뜻을 알고, 그 뜻을 이행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지도자들은 많지만,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일꾼들은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입니다. 원로라는 이름으로 초대받는 자리에는 선뜻 나서면서, 위로하고 당부의 말씀을 전해야 할 곳에는 함구하고 있는 원로들이나 지도자들을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오히려 성도들에게 상처를 제공하는 그들은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연기해달라고 소리치시는 분들 아닐까요? 그리고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자고 하는 제자들이 아닐까요?

반대로 애가 타도록 부르짖는 바디메오의 짐을 함께 들어주며, 충성스럽게 주님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와 원로들이 되어야 합니다.

늘 뒷전에서 고요한 믿음 안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되새기며 맡은 청지기의 사명을 목숨을 다해 감당하는 신실한 원로들의 믿음을 본받아 실천하며 살아가는 원로들과 지도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