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으면 하나님과 화목해져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하기 시작하십니다. 이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수’이며 ‘임마누엘’이신 것도(마 1:21, 23),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확약입니다. 이처럼 ‘칭의’와 ‘성령 내주’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성경 구절들은 부지기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칭의)’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유대인 이방인 구분 없이 ‘복(칭의)과 성령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고 한 말씀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에겐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 믿어도 성령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어떤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성령이 계십니다. 만일 성령이 없다면 그는 육에 속한 비중생자입니다(유 1:1).

성경은 ‘성령의 내주(immanence Of The Holy Spirit)’외에 ‘성령의 부어짐(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행 10:45)’도 말합니다. 이 ‘성령의 부어짐’은 구원받고도 성령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비로소 성령을 받게 됐다 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면, 자연스럽게 성령강림의 ‘단회성(once for all)’과 ‘현재적 반복성’같은 해묵은 논쟁에 연루됩니다.

지금은 덜하지만, 30여년 전 한국교회의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성령 강림의 ‘단회성(once for all)’과 ‘반복성’이 뜨거운 감자였고, 그 논쟁의 중심에 ‘고신’과 ‘총신’이 있었습니다.

화란(네덜란드)의 캄펜(Kampen)을 졸업하고 부산 고신대학에서 구약신학을 강의하던 안모 교수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와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의 성령 강림의 ‘현재적 반복성’을 주장하다, 학교에서 퇴출됐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마 그런 문제로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입니다.

동일한 시점, 총신에서도 역시 성령 강림의 ‘현재적 반복’을 주장한 차영배 교수, 정원태 교수 등이 반대자들과 첨예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총신에서는 고신대학 같은 파국은 없었습니다.

‘성령 강림의 현재적 반복’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재적 동일 반복’이라기보다, 차영배 교수가 말한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재적 모사(模寫)’라고 함이(김영한 박사)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15장 26절, 사도행전 10장 45절과 19장 1-6절 등을 비롯해,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가 가르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시는 성령(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1646년판 2장 3절)을 근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부으심(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은 이미 성령이 ‘내재(immanence)’하는 자를 향한 ‘밖으로부터의 부어짐(The Outpouring from above)’으로 파악됩니다. 한 마디로, '이미 내재해 계신 성령이 또 그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이미 오신 성령이 어떻게 또 오시느냐며 이는 존재론적 모순이라고 공격했습니다.

대표적 신학자가 화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 1920)입니다. 그는 ‘성령 저수지론’을 통해 “한번 오신 성령은 저수지처럼 수원(水原)이 되어 필요에 따라 성도들에게 공급되며, 성령이 다시 오는 일 같은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부어짐’을 외부로부터의 임팩트(Impact)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being filled with the Spirit, 엡 5:18)’도 믿는 자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북돋음(invigoration), 고무(incitement)’로 봅니다(행 2:2-3은 ‘성령 충만’을 ‘각 사람 위에 내려앉음(sat upon each of them)’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생각’이라는 비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초월적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유한된 인간의 존재방식과는 달리 ‘이미 와 계시면서 동시에 또 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계1:4, 8; 4:8)”라는 성경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에베소교회’의 사례를 근거로, ‘성령의 부어짐’과 ‘내재’를 구분지었습니다. 유능한 성경학자 아볼로(Apollos)의 지도를 받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내주는 있었지만 ‘성령의 부으심’은 없었으며, 바울을 통해 비로소 그것이 성취됐다(행 19:1-6)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에 대한 것이었으며,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는 답변 역시 ‘성령의 부어짐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방언 은사 성령 불꽃
▲ⓒPixabay
◈성령 부으심의 목적


그들은 ‘성령의 부으심’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 뚜렷이 해 준다고 말합니다. 물론 내재(內在)하는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 지식을 가르치지만,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그 지식이 더욱 풍성해지고 확고해진다고 봅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의 ‘부으심’이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더욱 분명한 이해를 갖다 주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무지한 것은 아들을 믿지 않아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요 15:26)’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사도들이 유대교인들에게 “성령이 없는 자(유 1:19)”라고 한 것은, 그들이 아들을 부인하므로,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을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 ‘성령의 부으심’과 삼위일체 하나님 지식을 여는 출발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성령의 부으심’을 원하는 자는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우리 죄 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성자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가질 것을 권면받습니다.

그들은 또 ‘성령의 부으심’은 의, 죄, 심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며(요 16:8), 믿음의 확신(살전 1:5), 하나님 자녀 됨의 확신(롬 8:16)을 더욱 공고히 해준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사변적이고 주지적인 신앙에서 생생한 체험적 신앙으로의 변환을 갖다 준다고 믿으며, 수학자 파스칼(Pascal, Blaise, 1623- 1662)의 사례 등을 들길 좋아합니다.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확신, 감정, 기쁨, 평화… (Blaise Pascal, 'le memorial', 553-554쪽)”.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령의 부으심’의 목적을 복음 전파를 위한 것으로 봅니다. 이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령의 부으심’의 목적을 신유, 은사, 능력 행사를 위한 것으로 보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의 ‘부으심’이 사람의 지성으로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것의 가치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요 16:13, 고전 2:9-12).

그들은 ‘그리스도’를 복음의 의를 이룬 구속자로, ‘성령’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시는 교사로 여깁니다(요일 2:27).

하나님은 택자를 복음을 통해 부르시되, 특별히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전도자를 통해 복음이 더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전파된다고 봅니다.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사도 베드로가 복음을 말할 때 회중들에게 성령이 내리신 것이 그 예증으로 제시됩니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행10:43-45)”.

성령을 중생(重生), 연합(聯合), 조명(照明), 성화(聖火)와 연결 짓기 좋아하는 개혁주의 진영에서, 성령을 복음 전파와 연결 짓는 것이 희귀한 듯 하나, 사실 그들은 성령을 무엇보다 복음전파를 위해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위대한 칼빈주의자요 성령의 사람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전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1770- 1775년까지 스톡브리지(Stockbridge) 에서 인디언 선교를 했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칼빈주의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 1770), 마지막 청교도로 일컫는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92)은 모두 탁월한 전도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을 받은 120문도 모두가 복음전도자가 됐다’는 사실 역시, ’성령의 부으심‘과 ’복음 전도‘의 긴밀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 받은 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전도에 열심을 보이기보다는, 더 센(?) 불을 받아 능력자가 되고자 여기저길 기웃거리는 것을 보면 씁쓸해집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표적을 행했으나 표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그것을 통해 죄인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요 20:30-31).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전도라고 밝혔습니다(막 1:38). 여러분은 왜 성령을 구하십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