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설 명절을 맞아 김태리, 류준열, 문소리, 진기주 주연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대한 박욱주 박사님의 기독교 세계관에 따른 전문적 리뷰를 다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리틀 포레스트
▲일본영화를 리메이크한 <리틀 포레스트>. 농촌의 자연 속에서 향유하는 소소한 행복을 표현한 영화다.

 ◈일본영화 리메이크: 카미(神)의 위안을 구하는 상실의 시대,


상실의 시대: 과분한 욕망의 회피와 소확행

최근 언론과 인터넷 포털에서는 '소확행(小確幸)'이라는 신조어가 회자되는 모습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작지만(小) 확실한(確) 행복(幸)을 추구하는 오늘날 젊은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의미한다.

애초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다. 하루키는 1996년 <소용돌이 고양이의 발견법(うずまき猫のみつけかた, 한국어 번역 제목 '일상의 여백')>이라는 수필집을 발간했다. 미국 생활 2년 동안 각지의 고양이들을 만나며 느낀 감상을 표현한 이 수필집에서 하루키는 소확행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이처럼 소확행이란 일상에서 소소하게 느끼는 만족감을 의미한다. 이 용어가 일차적으로 전달하는 느낌은 안락함과 포근함이다. 국내 마케팅 및 컨설팅 업체들은 2018년의 소비 트렌드를 바로 이 소확행으로 확정했고, 언론은 이를 대중에게 소개하기에 바쁜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 용어를 소개한 원작의 출간으로부터 무려 20년이 넘은 시점에, 왜 일본 작가가 제시한 이 용어가 이처럼 국내에서 작은 이슈로 떠오르는 것일까? 이는 용어에 담긴 사회적 컨텍스트가 현재 국내 젊은 세대의 상황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
▲소확행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소용돌이 고양이의 발견법>.

하루키가 처음 '소확행'이라는 말을 사용한 1996년 당시, 일본 전역은 저 유명한 헤이세이 버블(平成 Bubble)의 부작용으로 심각한 경제적 난관에 처해 있었다. 일본 내 다수 기업과 자산이 해외 금융자본에 헐값으로 매각되고,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졌으며, 정규직의 축소 및 비정규직의 무한 확대가 자리잡아 가던 시기였다.

이처럼 '잃어버린 10년(1991-2001)'을 한창 몸으로 감내하는 가운데, 일본 젊은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고도성장기의 종결로 인한 미래의 불확실성, 경제적인 어려움, 비정규직과 바이토(バイト, '아르바이트'의 준말)를 전전하는 생활 가운데, 일본 젊은 세대는 더 이상 현실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중산층의 삶을 바라볼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해외에 수많은 지사를 거느린 대기업 혹은 탄탄한 중견기업에 입사해 정년이 확고하게 보장된 직위를 얻고, 나이 30이 넘어가기 전에 결혼을 하고, 나이 40이 넘기 전에 저축과 대출을 합쳐 도쿄 시내에 번듯한 맨션(マンション, 한국의 아파트)을 사고, 이 맨션이 나이 50이 넘는 시점에는 원 매매가의 3-5배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되는 삶. 이는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잃어버린 10년으로 채우던 일본 젊은이들의 부모 세대가 지향했고 또 향유해 왔던 삶이다.

버블 붕괴가 초래한 부모와 자녀 세대의 급격한 삶의 정황의 변화는 젊은 세대가 느끼는 박탈감을 가중시키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사회적 컨텍스트 속에서 사람들에게 인상깊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해진 경로만 성실하게 따르면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삶에 대한 바램이 좌절된 상태에서, 현실이 주는 압박감에 극도의 피로를 느끼던 이들에게, 소확행이란 가까스로 숨통을 트일 수 있는 길로 여겨졌다. 현실로부터 오는 거부할 수 없는 중압감이 일본의 젊은 세대로 하여금 소확행에 매달리게 만드는 주된 이유였던 것이다.

여기에 나열한 1990년대 일본 젊은 세대의 상황은, 1997년 IMF 사태 이후, 그리고 2008년 전 세계 금융위기 사태 이후, 두 차례나 연달아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하고 있는 국내의 젊은 세대의 상황과 거의 판박이라 할 만큼 일치한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20년이 지나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한국 청년세대는 그들보다 앞서 거의 유사한 난관을 맞이했던 일본의 대처법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여 왔다. 국내 대중문화계 역시 이런 흐름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리틀 포레스트(2018)>, <지금 만나러 갑니다(2018)> 등 최근 연속된 일본영화 리메이크 작품의 개봉은 소확행에서 삶의 위안을 얻고자 하는 이들의 관심을 반영한다.

◈카미의 위안: 소확행의 종교적 코노테이션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2018)>는 일본에서 2002년부터 3년간 연재된 동명의 만화가 원작으로, 일본에서는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영화화됐다. 원작 만화의 작가는 이가라시 다이스케(五十嵐大介)로서 일본 만화계에서 유명한 자연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리틀 포레스트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원작 만화 <리틀 포레스트>.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의 전체 줄거리는, 일본 만화 원작이나 영화화된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리 특별할 게 없다. 주인공 혜원(김태리 분)은 남자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취준생인데, 자신은 시험에 불합격하고 남자친구는 합격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혜원은 심한 열등감 때문에 무작정 고향으로 도피하고, 고향에서 자신과 유사하게 서울의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껴 귀향해 농사를 짓는 친구 재하(류준열 분), 그리고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근방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 은숙(진기주 분)과 재회한다.

그로부터 혜원은 시골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 소박한 먹거리, 친구들과 어머니와의 교감을 통한 정서적 여유를 향유하며 도시생활이 마음에 남긴 상흔을 치료해 간다. 자연에서 막 채취한 신선한 재료를 활용한 소박하고 풍성한 음식들의 향연은 스크린에 눈을 고정한 관객들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혜원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유로운 시골 생활에 매료된다. 원래 '이틀만, 사흘만' 지낼 생각으로 도피해 왔는데, 마음은 점차 '며칠만 더'를 외치다가 결국 1년 사계절을 시골에서 체류하게 된다.

이 영화는 일본 청년세대의 마음에 그려진 소확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소확행이 유발되는 원천은 여러가지일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다. 마음과 몸의 과한 욕망을 버리고, 자연 생태가 베푸는 눈 앞의 소소한 충족감을 따라 살아가는 삶, 이것이 일본식 소확행의 진체(眞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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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영화화된 <리틀 포레스트>.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이 사고방식을 피상적으로 바라본다면, 도가적 사상 외에 별다른 종교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리틀 포레스트>에 반영된 자연주의는 단순히 도가적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연주의가 일본인에 의해 그려진 것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확고하게 일본 특유의 토착적 종교성이 부여된다. 게다가 <리틀 포레스트> 원작 작가 다이스케의 작품 대부분은 바로 이 토착적 종교성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다. 이 종교성의 정체는 신토(神道)적 세계관이다.

통상 신토는 일본 불교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양자는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융합된 측면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종교다. 신토는 백제와 당을 통해 일본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이전부터 일본 내부에 자리잡고 있던 토속종교다.

1천 년 넘는 세월 동안 불교와 융합되어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기도 했지만, 메이지 유신(1868-1912) 기간 동안 일본의 제국적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명분 아래 불교와 차별된 국가종교로 새롭게 변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내 기독교계에서 신토는 우상숭배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돼 왔다. 이런 인식의 밑바탕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가 강압적으로 시행한 신사참배에 고통받은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 당시 여러 목회자와 성도들이 투옥과 고문으로 순교하거나 고초를 겪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신토를 보는 시선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족속의 바알 숭배를 보는 시선과 다를 바 없다.

신토의 기본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애니미즘(animism), 다시 말해 물활론(物活論)이고, 둘째는 조상숭배 사상이다. 이 가운데 <리틀 포레스트>는 주로 물활론적 종교성을 반영한 작품으로 확인된다. 애니미즘은 자연 모든 존재자에게 영혼 혹은 정령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정령 신앙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일본인들 특유의 정령 신앙은 일상생활에서 먹거리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착으로 표현된다. 그들에게 식사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배고픔을 해소하고 맛을 느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본인들에게 식사란 자연 속 정령, 즉 카미(神)가 가진 생명력을 인간의 몸 안으로 흡수해 들이는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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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다키마스"와 신사 앞 참배. 합장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신토와 불교가 혼합되어 창안된 의례다.

일본인들의 식사 예절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 식사 전 두 손을 합장하고 "이타다키마스(いただきます)"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 다수의 일본인들이 함께 먹는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식사 전 이 말을 한다. "이타다키마스"는 통상 한국어로 "잘 먹겠습니다"로 번역되지만, 정확한 뜻은 "감사히 받겠습니다"가 된다.

무엇을 받는다는 것일까? 바로 자연물 속에 담긴 정령의 생명력, 이를 감사히 받겠다는 의미다. 이 말은 일본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이긴 하나, 근본적으로는 이 불교와 융합된 신토적 정령신앙을 반영하는 말이다.

일본만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사찰에서는 발우공양(승려들의 식사)시 소심경(小心經, '작은 반야심경'이라는 뜻)을 외우게 한다. 이 소심경 안에는 '봉발게(奉鉢偈)'라는 이름의 게송(偈頌, 깨달음을 즉흥적으로 표현한 말)이 포함돼 있다. 이 봉발게를 외울 때는 밥이 담긴 그릇을 정수리 위로 올려 자연 만물에 감사의 뜻을 표시한다.

"이타다키마스"는 바로 이런 예식에서 유래됐다. 애초에 "이타다키마스"의 기본형 '이타다쿠(いただく)'가 정수리 정(頂)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처럼 자연물에 담긴 생명력을 섭취하는 데 감사를 표하는 불교 예식이 일본의 신토적 풍습으로 자리잡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영화화된 <리틀 포레스트>의 경우 러닝타임 가운데 거의 2/3 이상이 농장과 자연에서 식재료를 채취하고, 이를 다듬고, 요리하고, 먹는 모습을 보이는 데 할애된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도 상당 시간을 먹거리 채취와 식사 준비에 할애하지만, 일본판만큼은 아니다.

일본인들은 자연에서 신선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채취하고, 다듬고, 요리하고, 섭취하는 일을 자연물에 깃든 카미의 영적 생명력을 누리는 종교적 행위로 여긴다. <리틀 포레스트>의 식재료 채취 및 식사 준비 장면을 보면 거의 제의 준비에 가까울 정도의 진지함과 집중력이 포착된다. 즉 일본인들의 선의식 속에서는 먹거리를 통한 소확행이 하나의 종교적 행위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일방적으로 종교적 의미를 길어내는 데만 천착한 것은 아닐까? 자연과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 얻는 소박한 육체적-정신적 힐링에 과도하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구심은 <리틀 포레스트>의 원작 만화가 다이스케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면 즉시 해소된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작품 중 다수가 자연에 깃든 정령과 인간의 친밀한 교감, 혹은 조상신과 후손의 친밀한 교감을 주제로 삼고 있다.

한 시골 마을의 탄생에 얽힌 설화를 신화적으로 재해석한 <향토신(鄕土神)>, 홀로 남은 어린 딸을 걱정한 나머지 부엉이가 되어 주변을 떠도는 아버지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영혼(靈魂)>, 얼음에 갇혀 동사(凍死)한 한 남자가 봄의 자양분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 <여전히 겨울> 등, 다이스케의 작품 대부분은 자연 속 정령과 인간 영혼의 교감, 합일, 상호작용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는 일본 신토의 세계관을 온전하게 반영한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
▲<리틀 포레스트>가 그려낸 소확행 속에는 일본의 신토적 종교성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국내에 소확행이라는 말의 대중화를 선도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표현되고 있는 자연과 먹거리를 통한 힐링의 메시지는, 그 기원을 일본의 신토적 정령 신앙에 두고 있음이 확인된다. 일본과 유사하게 심히 고단한 사회적 컨텍스트 속에 신음하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일본의 토속적 종교성, 즉 카미가 선사하는 위안이 하나의 해답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영화계는 이런 움직임을 작품 제작 및 기획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일본영화 리메이크작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개봉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리틀 포레스트>와 불과 2주의 시간적 편차를 두고 개봉한 <지금 만나러 갑니다>도 소확행과 신토적 종교성 간의 연관을 바탕으로 서사를 전개하는 작품이다.

◈참된 행복과 영혼: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유래되는 영혼의 행복의 장애물, 소확행

소확행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신토 사상은 한국인들이 극도로 경계하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신토 사상보다도 더 위험하다. 전쟁에서 죽은 영혼들이 일본의 산천에 수호신으로 재탄생한다는 믿음 때문에, 일본 지도층 다수는 주변국의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에 제물을 바치고 예를 올린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그 명백한 정치색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경각심의 대상이 될 뿐이다. 정치적이고 군국주의적 신토 사상은 한국인의 마음에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한다.

반면 소확행의 주된 방편으로 제시되는 정령 신앙은 먹거리를 통해, 애정 관계를 통해, 한국인도 공감할 수 있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조상신 혹은 죽은 자의 영혼으로부터 얻는 위로와 감동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이 평소 갖는 경계심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신으로부터 수득하기를 갈망하는 참된 행복의 의미를 왜곡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죽은 자의 영혼으로부터 얻는 위로와 감동에 대해서는 이미 <신과 함께> 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소확행의 이념이 초래하는 참된 행복의 의미 왜곡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리틀 포레스트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일본식 소확행을 소개함으로써 국내 관객들의 마음에 감흥을 일으킨 영화, <리틀 포레스트>와 <지금 만나러 갑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행복이란? 지극히 당연하게도 구원과 영생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두 용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내용과 사례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말씀의 교사들이 구원과 영생이 수여하는 참된 행복의 구체적 내용을 내보이고 가르치기 위해 고심해 왔다.

그 가운데, 기독교 신학 역사상 최초로 행복한 삶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한 것은 어거스틴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 외 초대교회 교부들 다수가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 행복이 실제 현실적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지 세밀하게 가르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로 어거스틴을 지목하는 데 많은 기독교 역사가들이 동의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대표적 신앙서이자 신학서인 <고백록> 제10권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모습들을 다음의 일곱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애욕과 정념의 충족, 둘째는 식욕의 충족, 셋째는 좋은 냄새와 향기를 즐김, 넷째는 아름다운 소리와 음악을 즐김, 넷째는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함, 다섯째는 새롭고 신기한 것에 대한 호기심의 충족, 여섯째는 교만과 칭찬받고자 하는 욕심의 충족, 일곱째는 자기의 기분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의 충족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욕구들의 충족으로부터 오는 기쁨들이 헛될 뿐 아니라, 영혼에 대단히 해롭다고 역설했다. 그는 참된 기쁨과 행복은 영혼의 빛이요 생명이며, 지고한 진리이자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와 함께하는 데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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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토 사상에 바탕을 둔 일본식 행복의 길은 기독교적 행복의 길과는 상반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참된 기쁨을 알기 전에 앞서 설명한 일곱 가지의 기쁨에 현혹되어 그 속에 안주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행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관찰인 동시에 비판이다.

어거스틴이 나열한 헛되고 해로운 행복들을 소확행과 비교해 볼 때, 양자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이 1,700년 전에 진술한 헛된 행복의 세부적 내용들이 오늘날 그대로 행복의 기준이 되고 있다. 전편의 칼럼에서 제시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시한 소확행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소소한 식욕, 안목의 정욕, 소리와 음악에 대한 소욕, 주위 세계의 일상적 정황들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만족 등, 소확행의 내용은 기독교인들이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하는 낮은 등급의 행복들을 나열한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리틀 포레스트>나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이 행복을 이루는 방편으로 세상과 사물에 깃든 정령신들과의 조화 및 합일을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리틀 포레스트>와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제시하는 일본식 행복의 길은 바로 현세의 잡다하고 소소한 행복들이 그 근본에서 부정적인 방향의 영적 코노테이션을 담지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기독교는 무조건적으로 금욕을 강제하지는 않지만, 현세적 행복을 탐닉하고 거기에 만족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게 보지 않는다. 크든 작든 간에, 현세적 행복이 마음을 지배하는 즉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혼의 참된 행복은 우리의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기독교적 가르침이다.

그리고 실상 오늘날의 현실에서 본다면, 현세적으로 규모가 큰 행복보다 규모가 작은 행복, 즉 소확행이 우리 마음을 영혼의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더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명과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이전 세대보다 적은 노력으로도 이 소소한 행복들을 채울 길이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