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명언] 승리 이후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역행하고 있는지, 한국의 기독교 세계가 얼마나 혼탁한지 우리는 경험한다. 위폐를 감별하기 위해서는 진폐를 제대로 알아야 하듯, 이런 혼탁한 시대를 제대로 해석하고 읽어내기 위해 나는 적어도 초대교회 당시로 돌아가기를 추천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다음 본문 말씀을 상기시켜보자.

“그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겼기 때문에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났다(행 5:41).”

기독교의 진리를 접한다 해도, 요즘은 씁쓸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진리보다 비진리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비진리가 더 힘이 강해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과 나을 것이 없고, 교회의 논리도 세상 논리와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금은, 세상보다 못하다. 이런 뒤집힌 세계에서 우리는 방향을 어디에서 찾을까? 저 말씀이 아니면 어디에서 찾을까?

온 세상이 비진리였고, 이 진리의 사도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요 16:2)”이라 생각했던 저 시대를 생각해 보라.

진리가 미움을 받고 진리의 증인들이 핍박을 받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증인들은 세상에 복종해야 하는가? 그렇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의미에서 그런가? 아니, 그 반대다. 확실하다!

그들은 이런 능욕 받는 일을 당연히 여기며 기뻐했다. 그들은 이런 핍박과 매임을 자랑한다(빌 1:12-30). 한 마디로 그들은 개념을 뒤집는다. 그들은 “영광을 수치로, 망신을 영광으로” 뒤집은 자들이다(빌 3:19). 이런 뒤집기가 담대한 확신의 반전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죄와 잘못들에 대한 끔직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허구한 날 뉴스에서는 잔인한 사건이 보도된다. 게다가 성서의 예언서를 읽어보라.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가 많은가? 하지만 어떤 이야기도 이 사도들의 담대한 확신만큼 끔찍하지 않다!

생각해 보라. 최극단에 이르는 것, 곧 모든 사람이, 세상 전체가 비방과 위협을 가하는 것, 이것을 생각해 보라. 뉴스에 나오는 어떤 한 명이 위협을 가한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위협을 가하고 죽이려 한다는 것, 상상이 되는가? 그런데 사도들은 자신이 능욕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이것을 기뻐한다는 것!

심지어 가장 엄격하고 위협적인 비방과 비교할 때, 이것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고전 14:2). 아니, 어떤 방언보다도 진정한 방언이다. 세상은 이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곧, 이것이 하늘의 방언이다!

오늘날 점점 세상과 같아져 가는 교회가 벌벌 떨지 않고 이 상황을 생각할 수 있는지 나는 궁금하다. 이 말이 광기가 아니라면, 진정으로 사도가 저 말을 했다면, 이것은 뻔뻔함의 극치이든가, 담대한 확신의 놀라움이든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무엇이 끔찍한 일인가를. 아마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이 시대의 타락이란 선한 사람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뻔뻔함의 경계에 풀어놓는 겁니다. 그런 다음 그를 강제하여 능욕 받는 일을 자랑하도록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승리가 어디 있는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승리가 무엇인가?

“고난당하는 중에, 담대한 확신은 세상으로부터 힘을 빼앗고 그 힘으로 능욕을 영광으로, 파멸을 승리로 바꾼다!”

우리가 이것을 말할 때, 선한 사람이 다른 세상에서 마침내 승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그의 대의명분이 이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승리한다. 그가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 고난당하고 있지만 승리한다. 곧, 그는 고난의 날에 승리한다.

모든 인간적인 반대가 늘어나도, 세계가 그에게 맞서 폭동을 일으킨다 해도, 그는 더 강한 자다. 언어의 힘도 그를 억제할 수 없다. 말하자면, 그는 언어를 돌파한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담대한 확신을 얻어, 수치로부터 영광을, 파멸로부터 승리를 끌어내기 위해 앞으로 전진한다.

몽유병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면, 진실로 그가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방법으로, 거대한 자신감으로, 저 깊은 심연을 넘어 걷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우리가 벌벌 떨지 않고는 이 사도들의 자신감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광기의 극치로, 하나님에 의해 담대한 확신으로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인간의 법정에서 판결을 받는 것은 나에게 작은 것에 불과하다(고전 4:3)”고 말할 때, 이것은 확실히 강력하고 힘이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정말로 경솔하게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적인 심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말씀은 더욱 인간적이다.

그러나 채찍질을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능욕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 이것은 충격적이다. 이것은 또한 인간적인 심판이 작은 것보다 훨씬 더 작은 것으로, 무(nothing)보다도 더 작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든 정직함으로, 단지 위험만을 피하기 바라는 어떤 속임도 없이, 감히 다음과 같이 말할 만큼, 이것은 충격적이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시험을 받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런 담대한 확신을 가질만한 결단에 직면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들에게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 훌쩍거리며 울 만한 문제가 없다. 또한 그들에게는 모든 시대에 언제나 있었던 것처럼, 몇몇 타락한 개인들의 타락하고 뻔뻔한 사람들에 대한 문제도 없다. 반면에, 그때 거기에는 다시 언어와 개념들을 공통적으로 지니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도들은 그들과 맞서 세상과 더불어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나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자들과만 맞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도들과 맞서 있는 것은 전체 세상이었다.

이 세상과 그들의 관계에서, 사도들은 채찍질당하는 것이 영광이었고, 능욕을 받는 것이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는 것을 판단해야만 한다. 사도들은 이런 식으로 홀로 서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바울이 덧붙이듯 “다른 모든 유익은 손실이다(빌 3:7).” 슬픈 일이다! 이런 말이 너무 자주 반복되고 앵무새처럼 너무 자주 되풀이 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순전한 반복으로 인해 그런 말이 우리의 공통의 언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은 우리들의 언어와는 밤과 낯만큼이나 확실히 다르다. 이 진술이 담고 있는 담대한 확신의 의기양양한 반전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가 얼마나 될까.

열정가는 그가 아무리 세상적인 재물의 소유를 포기하고 손실을 견딘다 해도, 그 소유를 이익으로 간주한다. 사도의 관점은 소유를 손실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

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누군가 이 세상의 재물을 무로 여길 만큼 열정적이라면, 그때 세상은 그런 사람을 미쳤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이런 열정이 사도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사도는 세상적인 재물을 무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는 심지어 그것들을 손실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부, 명예, 존경을 추구하는 반면, 사도는 이런 재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 모두는 사도들과 의견이 같다. 우리 모두는 손실을 피하고 싶다. 그러나 다시 불일치는 그 크기가 가능한 만큼 크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도가 손실로 이해한 것의 정반대를 정확히 손실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확신이 이런 식으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언어와 모든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개념들에 하나님의 진실한 도장을 찍는 것(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자!), 이것은 기쁘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다.

이리하여 의기양양한 담대한 확신에게는 우리가 천진난만하게 울먹이며 손실이라고 일컬었던 것은 유익이요, 세계가 반역적으로 수치라고 일컬었던 것은 영광이다. 이리하여 세상이 유치하게 파멸이라고 일컬었던 것은 승리이다.

이리하여 전체 종족이 만장일치로 말하고 있는 언어는 뒤집힌다. 그리고 거기에 인간의 언어를 정확하게 말하는 유일한 단 하나의 인간이 있다. 그는 전체 종족이 만장일치로 전체 종족으로부터 쫓아버린 그 사람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