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기독교에서는 생명의 가치도 중시하지만, 죽음의 가치도 중시합니다. 죄인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곧 율법이 요구하는 ‘죄삯 사망(롬 6:23)’ 지불로 이룬 ‘율법의 의(義)’가 생명을 갖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죄로 죽은 죄인은 ‘참 죽음(true death)’을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 없기에, 죄인 스스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막혀버렸습니다. 죄로 죽지 않은 ‘참 죽음(true death)’만이 하나님께 ‘죄삯’으로 열납되어 생명을 얻게하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서(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가 가르치는 대로, ‘죄인의 죽음’은 ‘죄의 결과(the result of sin)’로서의 죽음이지(제 19문, Thomas Vincent) ‘죄삯(the wages of sin)’으로서의 ‘죽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죄인의 죽음은 ‘죄삯’이 못되므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죄삯’을 요구받고, 그 결과 ‘둘째 사망’에 떨어집니다(계 20:14).

이것이 죄인의 딜레마입니다. 따라서 죄인이 생명을 얻기 위한 ‘참 죽음’은 자기 밖의 누군가로부터 가져와야 합니다. 그것은 곧,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 ‘참 죽음’만이 하나님께 ‘죄삯’으로 열납되어, 죄로 죽은 인간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생명이요(요 14:6, 요일 5:11), 생명을 주시는(계 22:17) 분’이라는 말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생명이고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참 죽음’이 우리의 ‘죄삯’이 되어 우리를 살렸다는 뜻입니다.

더 포괄적으로 적용시켜 봅시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는 것은(행 16:31)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죄삯’으로 가져와(율법의 의를 이루므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무는 것은(요 3:36)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죄삯’으로 삼지않아 율법의 의를 이루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요 5:24)’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죄삯’으로 가져와 율법의 의를 이룬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룬 의(義)를 ‘율법의 의’라 하고, 그 ‘율법의 의’를 믿음으로 자기 것 삼은 의(義)를 ‘믿음의 의(빌 3:9)’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율법의 의’는 율법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그리스도만이 이룰 수 있으며, 죄인은 그가 대신 이룬 ‘율법의 의’를 믿음으로 취할 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이룬 ‘율법의 의’는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죄인을 대신한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은 당연히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가 대신 이룬 ‘율법의 의’를 자기 것으로 삼을 때 그리스도의 의도가 성취되고, 그의 죽음이 영화롭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룬 ‘율법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극악한 죄인의 죽음으로 만들고(사 53:4), 그의 피를 욕되게 합니다(히 10:29).

그리스도가 죄인을 대신해 이룬 ‘율법의 의’는 죄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당위성을 요청할 뿐더러, 믿음을 일으킵니다.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저를 믿으면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가 바로 그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죄삯을 갚았다‘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그 ‘하나님의 의’가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가면 구원 얻겠다’는 믿음을 일으킵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는 ‘복음은 오직 믿음만을 일으킨다’는 믿음의 강조 용법입니다(칼빈은 이것을 ‘믿음에서 또 다른 차원에로의 믿음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 목적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죄삯을 지불했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택자에게 들려질 때, 그의 영혼 속에 ‘그를 믿으면 구원얻겠다’ 는 믿음을 일으키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draw all men unto me, 요 12:32)”고 하신 것은,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택자의 ‘죄삯’이 하나님께 지불되고 또 그러한 사실이 사람들에게 선포되면, ‘그를 믿으면 구원받겠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생겨 그리스도께로 끌린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택자를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입니다(살후 2:14, 계 22: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7).”

그렇게 믿음이 생겨나면,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되어(롬 3:22) 그로 하여금 의롭다함을 받게 합니다. 곧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이 문자적으로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 의(義)에는 차별이 없습니다(롬 3:22). 평생 율법을 지키며 엄격하게 살아온 바리새인 서기관들이나, 악행만 일삼던 십자가의 강도나 ‘오직 믿음에 의해’ 차별 없이 동일한 하나님의 의(義)를 입습니다.

그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빌 3:9)’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의 ‘죄삯’으로 받아들여지면 의롭다 함을 받을 뿐더러, 그리스도가 그 안에 내재(immanence, 內在)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누구 안에 들어갈 때는 그의 죽음을 앞세우고 들어가신다는 대 전제에서 기인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먼저, 반드시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있는 그리스도 예컨대, 그를 단지 스승이나 삶의 모범자로 받아들이는 자 안에는 들어가실 수 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의 ‘죄삯’으로 받아들일 때, 그에게서 ‘율법의 의’가 이루어져 그와 화목하게 되므로 그 안에 그리스도가 내재하십니다(갈 2:20). 그리고 한 번 들어오신 그리스도는 그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그 안에 머무십니다.

성도가 혹 그를 근심시키며(엡 4:30), 무시해도(살전 5:19) 여전히 그 안에 내재하시며 떠나지 않습니다(마 28:20). ‘내재(immanence, 마 1:23, 갈 2:20)’는 ‘동행(walking together, 암 3:3)’이상입니다.

‘동행’은 인격적이며 조건적이며 서로의 협조, 동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에녹이 3백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창 5:22)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동행)하려면 그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재’는 무조건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접한 자 안에 그는 무조건적으로 거하십니다. 설사 ‘동행’의 친밀함은 소원(疎遠)할 수 있어도 ‘내재’는 불변입니다.

성도들 중에 ‘내재(immanence)’와 ‘동행(walking together)’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뭔가를 잘못하고 성령을 근심시키면 하나님이 자기를 떠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흔히 들고 나오는 구절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이는 다윗이 범죄 후 하나님과의 관계(동행)가 소원해짐을 느껴,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게 하시고 성령의 감동과 역사와 인도를 거두어 가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삯’으로 받아들인 성도는 그와의 ‘동행’은 소원해질 수 있어도, 그 안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는 결코 그를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