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세월은 삶의 기억이 새겨진 나뭇잎을 띄운 강물처럼 유유히 흐른다. 그러나 영영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라, 어느 날 문득 곁으로 에돌아와 옛일을 떠올리곤 무심하게 흘러가기도 한다.

경성(京城)의 거리는 여느 날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멀리 수도를 빙 둘러친 남산 자락으로부터 쓰르라미 울음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물론 일상사에 바빠 정신없는 사람은 그 가슴속을 긁어 내는 듯싶은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한낮의 햇볕은 쨍쨍 내리쬐어 각양각색인 인간들의 모습을 비추고, 흰옷 입은 사람의 땀에 젖은 등짝에서 하릴없이 반사되기도 했다.

“자, 싸구려! 싸구려요! 지금 안 사면 기회가 없어요!”

각종 장사치들은 몇 푼이라도 이윤을 남기기 위해 웃는 얼굴로 흥정을 받아주고, 손님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품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고 짐짓 떼를 쓰거나 진상 짓을 떨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리에는 어떤 흥정도 붙여 볼 수 없는 백수들이 더 많았다. 그들의 초라해 뵈는 얼굴은 삶의 고달픔에 찌들 대로 찌든 모습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인 1910년 늦여름.

그들이 아는지 어쩐지 모르지만, 그날 8월 29일은 한국(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의 수중으로 완전히 넘어간 날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설령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 경찰과 군인들이 긴 칼을 차고 총을 든 채 여기저기서 감시의 눈을 번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총검은 언제라도 불온분자의 목숨을 단번에 끊어 놓겠다는 듯 살벌했다.

남궁억(南宮檍)은 종로통에 자리잡은 신문사의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햇볕 속을 걸어다니는 인간들이 집을 파괴당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개미처럼 보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유령이나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아, 애닯구나! 나라 잃은 백성들은 이제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천하의 날강도 같은 일본 놈들! 나라의 힘이 허약하니 결국 도적들에게 누천년 동안 살아온 강토를 강탈당하고 마는구나.”

그는 눈초리에 울분과 원한이 서린 눈물을 비치며 탄식했다. 물기에 젖었을지언정 그의 눈빛은 형형했다. 나라와 민족의 슬픈 운명을 마주한 듯한 눈이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오늘의 참변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1906년 봄, 조선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 자리에 올랐었다. 그는 치밀하고도 계획적인 공정(工程)으로 한반도를 자기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거대한 음모를 꾸몄다.

우선 일본 경찰을 늘리고 각급 학교에는 일본인 교사를 배치해 미리 식민교육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얼마 후엔 내각 총리대신이 된 이완용을 감언이설로 꼬드겨 한일신협약을 맺었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일본인을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하여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이 나라를 말 그대로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짓이었다.

그리고 한국인의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기 위해 신문지법을 제정해 민족 언론을 철저히 검열하고 통감부를 조금만 비판하면 폐간시켜 버리기도 했다.

지난 을사늑약(조약을 강제로 맺었다는 뜻) 때는 한국인의 저항이 무척 심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났었다.

아, 그런데… 수천 년 동안 조상들이 살아온 땅, 앞으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자식들이 살아갈 나라를 강탈당한 지금, 국민들은 울분을 느꼈지만 일본군의 총칼 앞에서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경성 시내 곳곳에 설치된 게시판에는 일본 황제의 칙어(勅語)와 조약문을 붙여 한일병합의 내용을 알렸다. 사람들은 게시판 앞에 모여 서서 한 자 한 자 똑똑히 읽었다.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며 이빨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기도 했다.

하지만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귓속말로 수군거릴 뿐이었다. 이미 5년 전에 중요한 것을 다 빼앗겨 버린 상태라 울분을 씹어 삼키며 체념한 듯도 했다.

김영권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할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