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아름다움으로 물든 천혜의 낙동강! 낙동강의 쉼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 부산부터 경상남도와 전라도, 경상북도까지 이어주는 동맥 같은 강 주위로, 쏟아지는 먼동의 아침 햇살이 추운 겨울을 비웃듯 전해오는 따스한 빛은 소망의 한 줄기 빛이 아닐까요?

그 빛 속에서 빛을 발하는 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길 건너편에는 금강선원이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에서 지난해 말 현수막을 내걸고 있었는데, 그 현수막에 새겨진 글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축”,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발걸음을 천천히 줄이며 눈을 의심한 채, 현수막에 새겨진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와! 불교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다니,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현실에 차마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교계는 대개 타종교와는 부딪히지 않으려 하는데, 참으로 대단한 글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흥사경회나 집회 시에 어떤 목사님들은 스님이나 교황을 마귀나 사탄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어,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 교계가 아닌 타종교는 무조건 적대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말씀에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 성도들이나 혹 믿지 않은 비신자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싶어 안타깝기도 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축하하는 불교계의 깊은 인격과 도량에 고개가 숙여지며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태양, 밤하늘의 달과 별, 그리고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을 편견으로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셨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타종교는 물론 힘 없고 가난한 자라 해서 주지 않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그들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아침 해 뜨기 전, 이른 새벽에 우유배달을 하시는 분, 신문을 배달하는 아저씨, 새벽기도회를 나가시는 분들을 위해 가로등 불빛이 비칩니다. 밤새 철야 작업을 하고 귀가하는 직장인들이나 사업하시는 분들의 안전한 귀가를 위해, 가로등 불빛은 환하게 비춰줍니다.

특히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두움을 빛으로 바꿔 주시기를 좋아 하십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가시는 곳마다 환한 세상이 전개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소망과 광명의 빛이 비춰 질 것입니다. 그래서 빛은 어두움과 밝음을 구별하며, 어두움의 본질이 드러나게 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는 희망이요 사랑입니다. 도시의 하늘에서는 별을 보기란 힘듭니다. 늘 비춰주는 별이지만, 많은 빌딩 숲에 가려서, 그리고 밤새 꺼질 줄 모르는 조명과 네온사인의 향연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에서 별들을 구경하기란 참으로 어렵기도 합니다.

잠깐만이라도 하늘의 별을 헤아려 보면서, 낭만에 젖어 옛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던 어린 시절의 그리움을 추억으로 상상해 보는 것 자체가 사치로 여겨질 정도로, 도시의 달과 별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만약 밤하늘의 별들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한 삶을 누릴지 모르겠습니다. 별은 별, 달은 달 그 자체보다 하나의 희망 내지 꿈이라 여겨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별을 잃어 버렸다는 것은 희망과 꿈을 상실한 것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하늘 사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세상은 희망과 꿈을 잃어버린 채 절망과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고 있었고, 살아 있음이 무의미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특히 예언자들은 구세주 오심을 외치고 외쳤건만, 그 때가 언제인지조차 알 수 없는 현실의 삶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긴 한숨만 쉬는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밤하늘에 떠 있는 큰 별을 보고, 구세주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알게 된 그들은 짐을 꾸려 구세주에게 드릴 선물과 함께 빛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펼쳐질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알지 못한 채, 구세주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벅찬 설렘으로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별만을 바라보고 따라가며 긴 여행을 하던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베들레헴에 도착하게 됐고, 초라한 구유에 누워 있는 연약한 아기, 온 세상을 빛으로 비춰줄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들의 생애에 구세주를 만날 수 있음이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의 환희이자,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야말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건너가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 아닐까요.

대나무에 마디가 있고, 흐르는 물에 소용돌이가 있듯, 인생에도 마디와 소용돌이가 있습니다. 새해가 이미 시작됐지만, 우리의 삶은 더 팍팍해지면서 실직, 불화, 질병, 채무, 파탄 등 심리적 압박을 자극하는 상황들이 갈수록 범람하며, 내일의 희망이 없는 삶에 대해 마음만 천 갈래, 만 갈래 무거워질 뿐입니다.

특히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흔히들 마음을 비워보라고 말하지만, 그건 옳게 헤아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이 휴지통 비우듯 쉽게 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고통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로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절실할 때 기도가 나옵니다. 절의 스님이 얼음이 언 강을 건너다가 갑자기 얼음이 깨지자, 너무 놀라서 “아이쿠 하나님!” 하고, 하나님을 찾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절실할 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찾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한 강도도 구원 얻는 것이 절실했을 터임에도, 코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계시는 영원한 구원자이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음부로 가는 불행을 자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교계에서는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견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빛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만을 바라보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여정으로 묵묵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축하해 주신 금강선원 스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주님 안에서 핍박을 받고, 아픈 상처를 보듬으며 하루속히 교회가 바로서기를 애타게 기도하며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들이 되어, 주님의 따뜻한 위로를 누리는 이 땅에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