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최재건 박사(하버드대학교 Ph. D. 연세대학교 교수 역임)의 논문 '삼일(3.1)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을 매주 한 차례 연재합니다.

3.1운동 이방인
ⓒ한민족평화나눔재단
③ 자유민주국가 건국을 위한 반공정신

대한민국의 건국은 자유, 민주국가의 건설로 3.1정신을 계승하고 성취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 동서냉전의 전초기지가 되었고, 좌우파의 이념의 대결장이 되었다. 남한 내에서도 어떤 정부형태로 건국할 것인가에 관해 좌·우파만 아니라 중간파도 있어 대립이 극렬하였다.

북한에는 공산 정권이 수립이 이미 가시화되었다. 남한에서도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남한 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이 등장하였다. 남한마저 공산화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판단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는 소련의 공산정권 팽창주의를 먼저 간파하여 반공을 강조하였다.

집권 후에도 반공 방일을 외치며, 반공을 일제 청산보다 앞세웠다. 대한민국 내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 활동은 물론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해서도 반공이었다. 당시에 남한 안에서는 남로당 세력이 제주도 까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전반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반공이 민주주의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소련의 팽창정책을 일찍 간파하였고, 점령지 일본에서의 정책도 반공산주의 정책을 폈다. 그는 자기를 로마 교황과 더불어 가장 반공적인 인물이라고 스스로 자평하였고, 기독교가 민주주의 건설에 가장 큰 도움이 되고 반공에 가장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한국교회는 1920년대부터 만주에서 공산당원들로부터 한경희 목사를 비롯한 순교자가 나온 이후 반공하는 교회가 되었다. 한국의 교계는 기독교가 미제의 앞잡이, 자본주의의 경찰견, 미신과 허위의 선전자, 자본주의의 확장을 위한 악마적 침략자라는 공격에 분노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또한 북한 체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을 위한 미군정의 정책이 신생 국가를 반공정책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북한에서도 반공이 교회에서 먼저 표면화 되었다. 슈티코프 사령관의 소련군정은 반공과 반탁을 주창하는 평양과 의주 교회들의 3.1절 기념행사를 못하게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신의주에서 반공학생 의거도 있었다. 교회를 중심으로 북한 내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기류가 뚜렷해지자 당국은 기독교도연맹을 만들어 회유와 아울러 탄압하자 남하하는 교인들이 늘어났다. 조선민주당을 창설했던 조만식처럼 "나는 북한의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소"라며 잔류하는 이도 있었지만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북한 주민들이 공산정권을 피하여 월남하였다.

그 가운데는 친일 분자도, 지주층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남하한 기독교인들이 세운 대표적 교회가 영락교회와 성도교회였다. 영락교회의 담임 한경직 목사는 윤하영 목사와 함께 조선사회민주당을 창당하여 활동하다가 북한당국의 체포령을 피하여 급히 남하하였다.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서북청년단이 조직되어 반공 투쟁에 앞장섰다.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의 1개 대대가 일으킨 폭동인 소위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계기로 보안법도 제정되었다. 대구 폭동에 이어 6.26전쟁 후에는 더더욱 철저한 반공정책이 펼쳐졌다. 후에는 연좌제 까지 등장하여 사회적 문제화도 되었다.

6.25 전쟁 때에 서울에 잔류했던 김유순 감독을 비롯하여 양주삼, 송창근, 박현명 같은 각 교단의 대표자급 목사들은 피난 가지 못하고 있다가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때 납북 당하였다. 그 후 1951년 1.4 후퇴 때는 서울이 거의 동공이 되었을 정도로 모든 시민들이 다 피난 갔다. 이는 공산 치하 3개월의 경험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표시였다.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를 비롯하여 남하한 교인들이 세운 교회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한국교회들이 철저한 반공교회가 되어 갔다. 한국교회와 반공에 대해서는 대 저작이 나올 정도로 연구가 진척되었다. 한국은 냉전의 희생물로 이념대결의 최전선이 되었다. 보수적인 교회와 남하한 이북 5도민들이 가장 반공적이었다. 수많은 인명 피해자도 나왔다.

최재건
▲최재건 박사
공산주의가 친소주의이듯 반공주의는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었다. 친미주의와 짝을 이루고 있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반탁=반소=반공=친미=애국이라는 도식도 성립되었다.

한국에서 반공이 극렬해진 한 이유는 건국의 정체성과 6.25와 같은 전쟁의 여파는 말할 것도 없이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운동이 유럽과는 다르게 펼쳐진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서구의 사회주의체제는 시장경제를 용인하였다.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공산주의 운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야 한다는 폭력성을 띄고 전개되었고, 자유를 억압하였다. 무신론적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용인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분배문제보다도 정치적으로 일당 독재가 더 문제였다. 이북의 교회와 크리스천은 공산주의와 대결하려다 희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방일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다. 반공이 더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친일파 청산이 남한보다 앞설 수 있는 여건이었다. 군사정권 때도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았다. 문제는 때로는 정략적으로 이용도 되어 색깔논쟁의 뿌리를 깊게 하였다. 그러나 그 동인은 건국기의 사상적 혼란과 북한 정권에 맞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희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