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정통과 이단’, ‘신학과 이데올로기’는 한 끗 차이다.

‘정통(正統)’이 삐끗하면 ‘이단(異端)’이 되고 ‘신학(theology)’이 삐끗하면 ‘이데올로기(ideology)’가 된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 only oneness)이 삐끗하면 ‘단일신론(monarchianism)’이 되고,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삐끗하면 ‘삼신론(tritheism)’에 빠진다.

‘하나님의 형상’ 인간관이 삐끗하면 ‘인간의 신격화’로 흐른다. 선택(Election) 교리가 삐끗하면 배타적 ‘선민주의(Ethnocentrism)’로 흐르고, 기독교의 유무상통(행 2:44-45)이 삐끗하면 ‘공산주의’가 된다.

전통적 성경 해석의 원리인 문자적·역사적 해석이 삐끗하면 ‘율법주의’가 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된다.

그만큼 순수한 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고 성경을 오독(誤讀)하기 쉽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누룩비유에서처럼, 말씀에 인간의 사상이라는 ‘누룩’이 가미되면 온 신앙이 망쳐진다(눅 16:6-12, 고전 5:6).

신앙엔 조그만 오류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언제나 종교개혁자들이 모토(motto)로 내걸었던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라’는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물론 이 말씀조차 이단들에 의해 ‘이현령 비현령’되어 왔다. 역설적이게도, 이단들이 가장 잘 쓰는 말이 ‘성경적(聖經的)’이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외쳤던 “이스라엘아 들으라(신 6:4)”,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2:2)”는 언제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

이는 단지 ‘성경이 말씀하는 바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일뿐더러, 성경을 듣는 자가 성경을 취사 선택하거나 편견을 갖고 듣지 말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들려지는 대로 들으라는 뜻이다.

‘성경신학자’들은 ‘조직신학자들’을 향해 “성경을 ‘조직화(組織化)’하면, 필연적으로 성경의 일부 진리를 간과(看過) 부각(浮刻)시키거나, 혹은 인간의 생각이 개입될 수 있기에 ‘조직신학’이라는 용어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공격한다. 조직신학자들 역시 성경신학자들의 그런 공격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다.

그들은 ‘성경 신학’이라는 용어 안에 이미 성경의 조직화가 상정(上程)된 것이니, 둘 다 ‘오십 보 백 보’라고 주장한다. 유치한 논쟁 같아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인간의 사상이 들어가거나 작은 진리라도 희생시키지 않으려는 성경존중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조직신학자요 구(舊)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 교장이었던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가 말한 대로, 인간의 이성은 본능적으로 체계적이어서 상호 모순되는 진리를 동시에 수용하거나 비체계적인 신앙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이는 협의적(狹義的)으로는 자기 신앙의 뼈대를 세우기 위해서이고, 광의적(廣義的)으로는 이단이나 다른 신학에 대해 변증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인간 이성은 신학의 체계화를 요구한다. 교리 공부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딜레마(dilemma)도 있다. 곧 성경을 교리화, 체계화로 인해 일부 성경 말씀을 간과(看過) 부각(浮刻)시키거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킬까(마 23:24)’하는 우려이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겠지만, 이즈음 디오시니우스(Dionysios)가 부정신학(否定神學, negative theology)을 부르짖었던 것이 혹,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므로서 하나님 개념을 제한할까 하는 염려에서였던가?’ 라는 상상도 해 본다.

특히 ‘목회신학(牧會神學)’에서 일부 성경의 간과(看過)와 부각(浮刻)은 ‘이론 신학’에서보다 더 크게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 목회란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신학 이론을 보이는 현실로 구체화하는 것이기에, 목회에 신학이 잘못 접목되면 성도들의 삶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교회 전체의 방향성까지 잘못 설정하게 한다.

이단들이 개인을 광신적으로 만들고 가정을 파탄시키는 것도 거짓 선생들의 왜곡된 목회 부산물이다. 그런 일들은 개인의 성경 오독(誤讀)으로는 생겨나지 않고 거짓 스승들의 구체적인 가르침과 적용을 따름으로 생겨난다.

목회자들은 열매(교회 부흥)를 얻는 일에 우선을 두는 실용주의(pragmatism, 實用主義)의 유혹에 늘 직면해 있기에, 성경이나 신학을 목회에 접목시킬 때 자신도 모르게 목적지향적(目的指向的)으로 흐르기 쉽다. 어떤 경우엔 보다 적극적으로, 소위 ‘목회철학(牧會哲學)’이라는 것을 세워놓고, 성도들을 합목적적(合目的的)으로 몰아가기도 간다.

그러나 사실 ‘목회철학’이라는 용어는 성경적인 용어라기보다는 목회자가 교회를 자기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설정한 목회자의 신념이나 사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목회(실천) 신학’이라는 말을 쓴다.

물론 목회자가 신학적 분별력이 있고, 목적지향적(目的指向的)인 목회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의지가 있다면 별 문제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잘못된 목회관을 갖게 되면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심리학, 철학, 경영학 같은 인본적인 기법들을 동원하게 된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자신의 ‘목회철학’을 의식화(意識化)하고 합목적적(合目的的)으로 성도들을 이끌어가게 되고, 나아가 에너지를 집약시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 그 결과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役事)로 굳게 확신하게 되고, 더욱 일로(一路)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거기에는 반드시 다른 성경 진리들이 간과(看過) 부각(浮刻)되거나 희생되게 된다는 점이다. 꼭 이단으로 빠지지는 않을지라도 성경적인 목회를 구현하기가 불가능해지고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못쓰게 하듯, 작은 왜곡된 가르침이 성도들의 신앙과 삶 전체를 오도하게 된다.

이는 교회사의 궤적(軌跡) 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계몽주의, 실존주의, 신비주의, 해방신학, 종교다원주의, 뉴 에이지, 자유주의, 무교회주의, 번영신학 등이 다 일부 성경의 간과(看過) 혹은 부각(浮刻)의 결과로 나온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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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미국과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 Rick Warren)> 역시 그 한 사례이다. 어떤 목회자들은 그 책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많은 비용을 들여 미국까지 날아가 저자가 인도하는 세미나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 거기에 대한 평가는 성경을 목적지향적(目的指向的)으로 이용하면, 성경을 짜깁기하게 되어 성경 진리를 왜곡, 희생시키게 된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국에서 유행된 ‘3박자 구원’, ‘4차원 신학’ 등도 이미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것 같다. <불가능은 없다(Move ahead with possibility thinking, 적극적인 사고 철학을 담은 자기계발서)>의 저자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1926-2015)의 수정교회 몰락도 그러하다.

미국의 유명한 TV 전도자요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 전도사인 ‘조이스 마이어(Joyce Mayer)’목사가 최근에 “인간에게 닥치는 환난은 믿음의 좋고 나쁨과는 상관없다”는 고백들을 내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자훈련(disicple training)’은 이미 오래 전에 신학화(神學化)되고 보편화(普遍化)되었기에, 지금 그것에 딴지를 거는 것은 뜬금없어 보일지 모르나, 한 마디만 해야겠다.

성경은 '제자훈련주의(disicple trainerism)'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마 22:16)’로만 말하지 않고, ‘구주와 죄인(딤전 1:15)’, ‘아버지와 아들(요 1:12)’, ‘목자와 양(요 10:11)’, ‘머리와 지체(엡 4:15)’, ‘남편과 신랑(엡 5:23)’ 등 다양한 관계로 말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둘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출 때, 필연적으로 여타의 관계는 ‘간과’ 혹은 ‘희생’된다. 춘천 ㅎ교회의 ‘부활신학’도 성경의 특정 부분을 부각(浮刻) ‘간과(看過)’시킨 결과이다. 그리고 근자에 분당 S교회의 ‘ㄷㅎ신학’도 약간의 우려를 들게 한다.

그리스도는 동행의 대상이전에 ‘믿음의 주(히 12:2)’이시다. 꼭 ‘동행’을 말해야 한다면, 동행과 유사한 의미를 가졌으면서도 ‘연합’과 ‘친근성’을 포괄한 ‘내재(갈 2:20)’가 더 성경적이다.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근자엔 신학자들을 초청하여 소위 ‘ㄷㅎ훈련’의 신학화 작업을 하는 듯하다. 초치(招致)된 신학자들이 그것의 신학적 빈틈을 메워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 단지 신학적인 담보(擔保)를 해 주는 것으로 그친다면 크게 염려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목적 지향(志向)’이 아닌, ‘성경 지향(志向)’임을 말하고자 한다. 교회는 ‘꿩 잡는게 매’라는 속담을 구현하는 ‘실용주의 공동체’가 아닌, 성경을 쫓는 ‘말씀 공동체’이다.

아무리 겉으로 드러나는 열매가 풍성해도 그것이 진리의 결과물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열매가 많을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will drive good money out of circulation)’는 서양 속담대로, 진리의 구현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예수님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3-14)”고 했다.

오늘 한국교회에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목적 지향(志向)’의 왜곡된 신앙을 버리고, 종교개혁의 정신인 ‘성경으로 돌아가는(Back to the Bible) 것’이다. 심리학, 철학, 경영학에 채색(彩色)된 ‘종교 이데올로기(religious ideology)’를 버리고, 말 그대로 ‘순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은 16세기 일어난 기독교의 한 종파운동이 아니라, 중세 1천년 간 로마 가톨릭이 폐기했던 ‘성경에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성경의 재발견’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루터가 주창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5 솔라(Five Solas)로 세분된다. 곧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예수(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 영광(Soli Deo Gloria)‘이다.

오늘까지 기독교는 종교개혁자들이 전수해준 이 5 솔라(Five Solas)를 5백 여 년 이상 견지해 오고 있다. 이는 5백 년 간 그것이 수많은 검증과 확증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부작용이 없다. 이 하나하나는 성경 전체를 대변하며, 이 하나하나를 가르치는 것은 성경 전체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런 검증받은 복음의 핵심이 있는데도, 이것을 제쳐두고 자신만이 깨달은 유일무이한 진리가 있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지금껏 수도 없이 부침(浮沈)했다. 오늘 새롭게 등장하는 이단들도 다 이전 것들의 복사판일 뿐이다.

기독교 역사 2천여 년 어간에 뭔들 안 해 본 것이 있고, 뭔들 안 들어본 것이 있었겠는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전 1:9)”는 말씀 그대로이다.

용기인지 만용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어느 한 곳에선가 자신이 깨달았다는 새로운 진리에 감격해하며 그것을 펴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후에라도 자기의 신앙과 신학이 무르익어, 자기가 만들고 파급시켰던 ‘목회 철학’이라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땐 어떡할 것인가?

그 동안 자기에게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영혼들을 어떻게 할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당할 국문(鞫問)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목회자가 심각하게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특별히 목회자들께! 여러분의 신앙과 목회의 기반은 심리학, 철학, 경영학에 채색(彩色)된 ‘종교 이데올로기(religious ideology)’인가 ’성경‘인가?’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