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억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본지는 지난 2018년 오산학교를 세운 민족 지도자 남강 이승훈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꽃불 영혼>에 이어, 독립운동가이자 ‘무궁화 사랑’으로 잘 알려진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보리울의 달>은 연재합니다. 두 작품 모두 김영권 작가님이 쓰셨습니다. -편집자 주

프롤로그

화단에 핀 봄꽃이 무색할 정도로 쌀쌀한 날씨다. 꽃샘바람이 윙윙 불어대며 창문을 덜커덕거리게 한다. 방안의 냉기도 만만찮다. 초봄이 되었는데도 이상 기후로 폭설과 폭우가 번갈아 쏟아지고 어젠 천둥 번개까지 심하게 쳤다.

나는 벌떡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방문을 나선다. 이런 날엔 방구석에 박혀 판에 박힌 컴퓨터 게임이나 하기보다는 별일 없어도 일단 거리로 나가서 돌아다니기라도 하는 게 차라리 낫다.

언 눈이 발밑에서 투명한 얼음 씹히는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찬바람이 윙윙대며 나무 위의 눈꽃을 흩날린다. 냄새 배인 골방도 이 집도 내 삶도 별로 달라진 건 없는데, 계절이 한 번씩 바뀌며 세상은 변해간다.

별다른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골목길이건만 간간이 낯설어 보이는 건 그런 변화의 표시일까. 지구가 맹렬한 속도로 돌고 있다는데 난 붙박힌 건물들만큼이나 고정된 길을 걷는다.

이곳은 연신내. 이름처럼 초록빛이 감도는 시냇물은 어디를 둘러봐도 없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서 난 걸을수록 바람에 밀려 뒷걸음질치는 듯하다.

로터리에서 길을 꺾어 산자락 아래쪽으로 난 도로로 들어선다. 푸른 산의 기운이 느껴져 온다. 주변엔 등산객을 위한 음식점들이 거창스런 간판을 달고 늘어섰다. 차들만 부산히 다닐 뿐 평일이라 그런지 행인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앞에 터널이 컴컴한 입을 벌리고 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터널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서너 발짝 걸어 들어가자 숨이 턱 막혀 온다. 질주하는 차들이 바깥에서와는 달리 살아 있는 사나운 짐승 같아 보인다. 언제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기세이다.

매캐한 냄새를 품은 바람이 맹수가 돌진할 때마다 세차게 휘몰아친다. 자칫하면 휩쓸려 갈 것 같다. 금방 맹수의 발톱에 찍혀 갈가리 찢어진다 한들 누가 알 것인가.

되돌아 나가고 싶다. 예전에 여자친구와 함께 갈 땐 간간이 얘기를 나누며 깔깔 웃기도 했던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본다. 얼마 들어오지 않은 성 싶은데 입구는 무척 멀어 보인다.

뒤돌아보지 말아야 했다. 천장에서 희끄무레한 쇠살이 내려와 박혀 입구를 막아 버린, 환상이지만 현실 못잖게 절박한 느낌에, 급히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한다. 그럴수록 뒷걸음질치는 기분이다.

출구는 까마득히 멀어 보인다. 휙휙 닿을 듯이 스쳐가는 짐승들이 무서워 발밑만 내려다본다.

어제 티브이에서 본 기이한 사건들이 떠오른다. 질주하던 화물차의 거대한 바퀴가 빠져 튕겨나가 마주오던 승용차의 유리창을 박살내고 운전자를 죽인 일, 맨홀 뚜껑이 백여 개나 사라져서 행인이 빠져 죽은 일 등등….

정말 혼란스런 세상이다. 사실 나는 요즘 방황하고 있다. 모두들 저만 잘 살면 장땡이라 하며 막무가내로 내달리는 세상이 두렵기조차 하다. 어쩌면 모두들 어느 쪽이 옳은 길인지 몰라 훤한 불빛 아래서도 어둠 속에서처럼 헤매는 것만 같다.

저쪽에서 무엇인가 움직여 오는 것 같다. 그 물체는 까딱까딱 움직이며 점점 다가온다. 고개를 수그린 채 걷던 나는 흠칫 놀라 멈춰 선다.

흰 고무신을 신은 발이 내 발 앞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머리를 든다. 낡은 벙거지를 푹 눌러쓴 노인이 구부정히 서서 떨리는 손을 내민 채 합죽한 입으로 웅얼웅얼한다.

벙거지 밑으로 백발이 드러나고, 아무렇게나 자라난 허연 수염이 추저분한 옷자락 위로 엉켜 있다.

내가 망설이고 있자 노인이 고개를 슬쩍 든다. 창백한 얼굴에 박힌 검은 눈이 나를 쏘아본다. 노인의 눈 같지가 않게 빛이 난다. 나는 흐리터분하게 변질된 내 눈이 좀 부끄럽다.

“할아버지, 어디로 가는 길이세요?”

엉겁결에 생각지도 않았던 물음이 나온다. 누가 나 자신에 대해 물은 것처럼 귀청이 생경스레 울린다.

“흐흐흐… 이승을 지나 저승으로….”

노인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온다.

“저, 길을 찾는데요… 도무지 찾을 방도가 없군요.”

“찾지 마. 이 세상의 낙오병이 무슨 대답을 하겠어. 난 죄를 많이 지어서 아무것도 몰라. 거렁뱅이에게 뭘 묻지 말고 적선이나 하든지. 자기 자신이나 찾든지. 흐흐흐….”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깊은 심연 같은 목구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다. 내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주자 노인은 잽싸게 받아 움켜쥐더니, 갑자기 등에 멘 배낭에서 노트 한 권을 꺼내 내민다. 받아 보니 표지가 푸른 두꺼운 노트다. 그런데 노트는 물에 젖어 축축하다.

“이게 뭐죠?”

“나도 몰라. 저쪽 세검정에 앉아 있던 어떤 술취한 자가 개울 속에 던져 버리고 가길래 뭔가 하고 주워 왔지.”

“이걸 왜 제게 주시죠?”

“그냥. 만원짜리 한 장 줬으니 그냥 주는 거지 뭐. 혹시 대단한 길이 있을지도 모르니 한번 읽어 봐. 세상엔 별별 일이 다 있으니 혹시 보물지도라도 암호로 적혀 있을지 알아?”

노인은 나를 스쳐 지나간다. 두꺼운 옷을 잔뜩 껴입어서 뒤뚱뒤뚱 걷는다. 노인은 굼벵이처럼 등을 구부리고 천천히 굴 속으로 사라져 간다. 혹시 다른 세계에서 왔다가 스쳐간 환상이었던가 싶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반대쪽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간다. 굴 밖으로 나서니 긴장으로 인해 진땀이 났던 살에 바람이 닿아 서늘하다. 아주 길었던 것 같은 굴 속에서의 시간이 그 바람결에 녹아 사라진다.

길을 꺾어 흰 눈을 머리에 인 산을 바라보며 올라간다. 구름이 끼어 우중충한 하늘 한쪽 가에 옥빛이 조금 비치고 있다.

계속 걸어오르자 길 양쪽에서 졸졸 물소리가 들려온다. 구청에서 쉼터로 지어 놓은 듯한 아담한 정자가 나온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 앉아 푸른 노트를 조심스럽게 펼친다.

‘무궁화 선비’라는 큰 제목 아래 깨알같이 작은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지우고 고쳐 쓴 대목도 제법 많다. 청색 볼펜으로 쓴 것이라 물에 젖었지만 별로 번지지는 않아 충분히 알아볼 수가 있을 정도이다.

나는 누가 쓴지도 모르는 그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계속>

김영권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