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5)!”

베드로가 범죄한 형제에 대한 용서의 횟수를 질문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예수님이 앞의 비유를 통해 강조하신 것은, 형제가 자신에게 아무리 많은 죄를 짓는다 해도 계속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아마 베드로와 같이 “몇 번을 용서해야 할까요?”라고 질문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신 진정한 용서는 우리 자신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았고, 현재에도 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님의 공로에 기초한 무조건적 행위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비로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마 18:15-17).”

어떤 형제가 죄를 범했을 경우, 문제해결을 위해 따라야 할 권징의 원리, 개인적인 충고, 두세 증인을 통한 권면, 그리고 교회의 공식적인 권징을 먼저 말해줍니다. 동시에 본문은 교회가 결정에 앞서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말씀하며, 그 범죄한 형제를 위해 전심을 다해 회개할 수 있도록 함께 도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공동체는 사랑이 우선시하면서 용서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상의 두 강도를 생각해 봅시다. 한 강도는 예수님도 자신들처럼 흉악한 죄를 지은 범죄자인 줄 알고 함께 욕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강도는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욕한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나무에 매달려 있는 동안,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를 구원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의 응답을 받는 순간을 맛봅니다. 그는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최단 기간, 아니 최단 시간에 구원을 받고 천국을 차지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 이 강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쳤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놀라운 세상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다른 강도는 그렇지 못하고 끝까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음으로써, 음부의 세계를 얻게 되는 어리석고 비참한 자로 지금까지 알려지게 됐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사랑하기’와 ‘용서하기’ 중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아마 “사랑하기가 쉽다”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친절하게 잘 대해주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반면, 용서는 내가 싫어하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용서보다 쉽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내게 잘 대해주는 사람뿐 아니라,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단번에 용서하고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필자 역시 교회 안에서 거짓말하며 시기하고 모함하는 교인들을 볼 때, 참으로 서운하기도 하고 분통함을 참지 못하며 가슴이 아플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사과를 해올 때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해 하며, 오히려 그들을 더 사랑하게 되고 즐거워하게 됐습니다.

자연 돌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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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기까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를 미워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그 사람의 여러 행위는 잘못됐지만 언젠가 변화해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내 생각과 다를 수 있는 부분에서 그 사람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나의 최종 판단을 유보하고 기다려 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미워하는 원수 안에 우리가 모르는 성령의 역사로 이끄심이 있음을 확신하며, 겸손의 태도와 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온도가 필요하며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바라보셨을 때와, 현재 하나님을 외면한 채 세상 즐거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리를 바라보실 때를 비교해 봅니다. 과연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마음이 드실지 한 번쯤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우시기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는 사람들마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한 해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고요한 묵상으로 묵은 해를 보내며, 나를 돌아보는 귀중한 성찰의 시간이 요구됩니다.

기해년(己亥年) 새해를 기다리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이익이나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유리한 위치를 얻고자 진실을 감추고 그들의 권리를 빼앗은 것은 없는지 살펴보고 돌아보는 귀한 시간들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갈수록 초심을 잃어가고 세상 즐거움과 세속에 심취되어 가는 오늘날 공동체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참으로 애가 탑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정신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말세에 의인을 보겠느냐”는 주님의 벼락같은 음성을 귀담아 들으며, 초대교회의 순수한 용서와 사랑, 나눔과 배려의 ‘삶’을 기억합시다.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곧 믿음과 순종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를 만들어, 먼저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이웃에게 베풀면서 이 땅에 복음의 전진기지를 만들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