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오요한
욥기 22장 강해

요절: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4절)”.

우리에게는 신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학을 고집하다 보면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정죄할 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신학을 고집하다, 욥에 대해 새빨간 거짓말을 하며 욥을 공격하였습니다. 엘리바스는 신학적인 도그마에 빠져 욥을 세 번째로 공격합니다.

1.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1-3절에 보면 엘리바스는 사람이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만 유익할 따름이지, 하나님께 유익하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의로와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으며, 행위가 온전해도 하나님께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충족성(自充足性)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사람의 혜택을 받으실 일이 전혀 없으십니다. 인간의 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의 기쁨을 증가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악되어서 하나님을 행위로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참된 의(義)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참된 의는 믿음에서 나오는 의로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의를 기뻐하시는 것은 당신이 인간에게 주신 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계적인 분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2. 엘리바스의 인과론적 결론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4-5절)”.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욥을 책망하는 것이 경건함 때문이 아니고 죄악 때문이라고 합니다. 욥의 죄악은 끝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엘리바스는 아무 증거도 없이 욥을 큰 죄인으로 몰아 넣습니다. 욥이 극한 환난에 빠진 것은 극한 범죄 때문이지 결코 그의 경건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어디까지나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인과론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이같은 논법은 고난 문제를 다루는 인과응보적인 논법입니다. 그가 고난 문제를 죄로만 취급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난 섭리는 신묘막측한 여러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늘 쉽게 깨닫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받는 자를 만났을 때에 판단하기보다는 겸손히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3.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엘리바스

6-11절에 보면 욥은 까닭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난한 동포에게 돈을 빌려준 일도 없이 잔인하게 물건이나 의복을 전당잡는 악한 행위를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은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돕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헐벗고 목마른 자들을 돕는 목자였습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욥에게 잘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잘못 적용하는 자는 병자에게 약을 잘못 처방해주는 거짓 의사와 같습니다. 목자가 양들에게 정확한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

욥의 잘못을 지적하는 엘리바스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목자가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 있나요? 그의 신학적인 논리에 따라서 욥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학은 죄인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왜 모릅니까? 엘리바스는 욥을 잘못 진단하고 잘못 처방하고 있습니다.

4. 엘리바스의 신학적인 도그마

12-20절에 보면 욥이 하나님은 무엇을 모르시며 흑암 중에 심판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빽빽한 구름이 하나님을 가리므로 하나님이 보지 못하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높은 곳에 계시는 이가 땅에 있는 것들을 완전히 다스리십니다. 엘리바스는 계속 욥을 오해하고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로 흠을 잡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가리켜 “인간의 일을 인식하지 못하시는”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엘리바스의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의 죄를 알고 벌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신학은 있었으나 욥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이해는 없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악인의 길을 계속 가겠느냐고 책망합니다.

악인의 터는 강물에 의해서 망했다고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께 우리를 떠나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실 수 있느냐고 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악인을 채우셨을지라도 악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이런 악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악인이므로 하나님이 그를 좋은 것으로 축복하여 주셨을지라도 욥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욥은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었습니다. 엘리바스는 나중에 의인은 이런 악인의 멸망을 보고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악인은 망하니 악인의 길을 가지 말라고 합니다.

욥이 언제 악인의 길을 갔습니까? 그는 “악인은 망한다. 욥이 망하였으므로 욥은 악인이다”는 신학적인 이론에 의해 욥을 정죄하고 권면합니다. 신학적 도그마에 갇혀 있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스스로도 신학적 도그마에 눈이 멀어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엘리바스의 권면

21-26절에 보면 엘리바스는 고난받는 욥에게 구체적인 해결책을 줍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면 복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전능자에게 돌아가면 새롭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집에서 불의를 내버리라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한 마디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돈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욥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이유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것이지, 죄에서 온 것은 아닙니다.

욥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줄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친구들은 욥의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보화나 금을 무가지치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보화가 되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뻐하며 은혜를 주신다고 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기도가 열리고 또 기도 응답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결심한 것을 실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의 경영하는 일이 형통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가 남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를 높여주신다고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면 축복을 받는다는 말은 백번 지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욥이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중시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이 말을 욥에게 하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욥이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지 않아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의 신학 이론을 욥에게 잘못 적용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재앙을 받았습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이 올지라도 계속하여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6. 겸손하라는 엘리바스의 권면

27-30절에 보면 마지막으로 엘리바스는 욥에게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면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욥이 결정하는 대로 이루어주시고 빛을 주신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이 그를 낮추시면 교만을 회개하라고 합니다. 겸손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고 합니다. 죄악이 있어도 하나님은 회개를 받으시고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지금 욥에게 기도하고 서원을 갚고 겸손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낮추실 때 교만을 회개하고 겸손하라는 엘리바스의 권면은 옳은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게 산 것으로 인해 자신의 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의를 깨뜨리시고 낮추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은혜를 배우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욥에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고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그것이 교만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의롭게 살았는데 고난이 왔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의를 깨시고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낮추실 때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을 통해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고 좀더 겸손하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오요한
▲오요한 목사.
7. 결론: 신학적 도그마에 빠진 엘리바스

우리는 엘리바스를 보면서 목자가 신학적인 도그마에 빠져 있을 때 얼마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봅니다.

인간에게는 신학이 필요합니다. 신학은 우리 신앙에 체계를 잡아줍니다. 성경을 보는 눈을 갖게 합니다. 성경적인 가치관을 형성하게 합니다. 이단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적인 도그마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돕는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신학을 할 때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뉴턴이 말했듯, 내가 아는 것은 바닷가의 조개 하나 주운 것과 같다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알면 알수록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신학적인 지식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람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과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신학을 하되 신학에 갇히지 않게 하시고, 신학을 알수록 더욱 겸손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오요한 목사(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로마서 강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