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존스의 예수 그리스도
마크 존스의 예수 그리스도

마크 존스 | 오현미 역 | 이레서원 | 120쪽 | 8,500원

마크 존스, 그는 누구일까?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뻔해 보이는 주제인데 글이 생동감이 있고, 독특한 서술 방식을 통해 맛깔스럽게 풀어간다. ‘이 사람 누굴까?’ 나도 모르게 저자를 찾아보았다.

첫 책인 <선행과 상급>은 주제 자체만으로 매력적인 책이었다. 그런데 일종의 기독론이라 할 수 있는 예수와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전혀 식상하지 않고 약간의 서스펜스가 느껴진다.

저자는 청교도 사상 전문가이며, 포체스트롬에서 M.A., 레이던 대학에서 토머스 굿윈의 기독론 연구로 Ph.D.를 받았다. 프리스테이트 대학교 신학부 연구교수이며, 캐나다 밴쿠버 소재 페이스 장로교회 목사로 섬기고 있다.

이런 식의 이력만으로 저자를 이해하기는 불충분하다. 그의 또 다른 매력이 있는데, 그것은 철저한 보수적 개혁파이면서 배타적이지 않으며, 모든 이론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만의 성경관으로 재해석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온 마음과 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글로 읽을 수 있다. 이제 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종교개혁 이후 개혁교회가 인정하는 7대 공의회가 있다. 7대 공의회는 제1차 니케아(325), 제1차 콘스탄티노플(381), 에베소(431), 칼케돈(431), 제2차 콘스탄티노플(553), 제3차 콘스탄티노플(680), 제2차 니케아(787)를 말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와 칼케톤 공의회이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대한 논의를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예수가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낳은 존재, 즉 신성을 옹호한다. 에베소 공의회에서는 신성과 인성을 다른 두 인격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를 배격한다.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신성밖에 없다는 단성론을 배격하고,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시다’인 것을 확정한다. 이로써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조화롭게 머물고 있다는 교리를 확정하여 ‘칼케돈 신조’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삼위일체 교회에 관련된 공의회는 칼케돈 공의회가 매듭을 지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칼케돈 신조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며, 특히 토마스 굿윈의 삼위일체론을 따라 설명해 나간다.

1부 ‘그리스도의 위격’에서는 초대교회 공의회의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신성과 인성의 교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설명한다. 2부에서는 인성을 가진 예수를 다양한 관점에서 다룬다.

마지막 3부는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제목으로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그 외의 주제들을 설명한다. 흘러가는 내용은 그다지 어렵거나 생소하지 않다. 하지만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고, 문단과 문단을 엮어가는 능력은 읽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이 책은 정보를 넘어, 기독론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색다름을 보여준다. 추전 도서 목록까지 다 합해도 고작 117쪽이지만, 2천년이 넘는 교회사를 아우르는 장엄함이 느껴진다.

칼케돈 신조는 현재의 사도신경과 별반 다르지 않으나 본성에 대한 언급이 첨부된다.

“독생자는 두 가지 본성을 입으셨으되 섞이지도, 나뉘지도, 변하지도, 갈리지도 않으며, 연합으로 인해 그 본성의 차이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성이 유지되어 하나의 위격과 한 본체 안에 결합되어 두 인격으로 갈리거나 나뉘지 않는 한 분의 동일한 성자,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니. …”

칼케돈 신조 이후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정의한 신조는 없다. 그러나 신인성의 연합에 정의는 명징하지만 난해하다. 삼위일체 교리 자체가 난해하지만 연합 교리는 더욱 난해하다.

아기 예수 마리아 요셉 동방박사
▲2018 ‘서울 크리스마스 페스티벌’ 현장 ⓒ크리스천투데이DB
저자는 토마스 굿윈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나 하나님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20쪽)’이라고 말한 것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위격의 영광’으로 나아간다.

성육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인간의 대표로서 인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속죄제물이 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신성을 가진 하나님,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함을 의미한다. 약간 길지만 직접 인용해 보자.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분으로, 인간이신 분으로, 그리고 신인(중보자)이신 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성부·성령에게 예속되며, 늘 예속되실 것이다.

중보자 직분을 행하실 때 성자께서는 자원하여 성부에게 자신을 예속시키고, 택함 받은 사람들 편에서 중보하신다. 이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단순히 한 인간의 일이 아니다. 이 일은 중보자, 곧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분이 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가 무한함은 그 위격의 가치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인간이기만 한 분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진 빚을 대신 갚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참된 인성을 지니셨기에 죄인인 인간을 대표해 빚을 갚을 수 있었다(44쪽).”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속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신인성의 연합 교리는 곧장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완전한 연합은 한 가지의 뜻만 가진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의론자들(monothelites)은 680-681년 있었던 제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정죄당하고 이의론(duotheletism)을 확정한다.

어찌 완전한 연합에서 두 의지가 가능할까? 개혁파의 정교한 교리는 ‘순종’으로 나아간다.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는 성부의 뜻에 완전한 순종을 통해 완전한 연합을 이룬다.

이 순종은 ‘대표의 의미를 띤 순종(48쪽)’이기에, 모든 백성들을 대신하며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

순종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바로 성육신 사건과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포괄하는 ‘그리스도의 비하’이다. 존스는 토머스 굿윈의 말을 인용하여 ‘그분의 뜻의 목표와 의도는 중보자인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향해 가도록 방향을 안내된다(55쪽)’고 말한다.

성자 예수는 아버지께 완전한 순종, 완전한 의탁, 완전한 의존을 통해 완전한 연합을 이룬 것이다. 나머지 부분은 책을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이 책은 ‘기이한 책’이다. 이렇게 얇은 책에 이렇게 심오함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끌어가는 서술방식은 이 책이 딱딱한 교리 서적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게 만든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밀려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갈망은, 읽은 이들에게 성육신의 신비에 목마름을 선사할 것이다. 하나님을 깊이 갈망하는 자들은 복을 받을 것이니,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