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3)”.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이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찬송가 486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의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송가 412장)”.

평안(平安)의 사전적 의미는 걱정과 탈이 없음을 말합니다. ‘평안’ 혹은 ‘평화’는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평화(平和)의 사전적 의미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함’을 말합니다. 평화를 뜻하는 말에는 유대 교회의 살롬, 그리스의 에이레네, 로마의 팍스, 중국의 화평, 인도의 상티는 각각 정의, 질서, 친화와 평온, 편안한 마음을 주로 평화의 주 요소로 꼽고 있습니다.

보통 평화는 국가적 평화와 국제적 평화 등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국가적 평화는 국가의 정치적 이상인 정의의 실현을 통한 국민들의 정치·사회·경제의 안녕과 안정을 꾀하는 것이며, 국제적인 평화는 국가 간의 갈등 분쟁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평화란 ‘전쟁을 하지 않는 상태’이지만, 현시대의 평화학에서는 평화를 다툼과 분쟁과 다툼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 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류가 목표로 하는 가장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 세계의 인간들이 원하고 바라는 평화는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다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전쟁에 대한 불안함은 늘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의지와 욕심에 나오는 인간 본연의 모습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서의 평화는 외장 벽의 화려한 칠만 했을 뿐, 그 속에는 참혹한 권모술수와 꼼수, 그리고 거짓의 노래가 가득합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평화는 잠시 동안 있을 수 있어도, 결국에는 교만이 발동하여 갈등과 소유욕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주 사업 일환으로 남북 화해무드를 조성하고 평화를 이루어 내기 위해 온갖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의 평화라는 것은 강자가 베푸는 제스쳐에 불과할 뿐, 진실된 평화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 평안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위 찬송가가 말해주듯, 만군의 여호와를 신뢰하고 믿는 사랑의 마음을 누릴 때, 내려지는 하나님만이 베푸시는 고유의 선물로서밖에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평화를 얻기 위해 설쳐대는 것도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아 보입니다. 참 평안과 평화를 바란다면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고, 아픔을 준 사람들에게 신실한 사과와 용서를 구할 때, 비로소 그 계기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성탄절 아기 예수 내티비티
▲ⓒpixabay
구약성서에는 평화라는 말로 ‘살롬’ 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살롬’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전쟁과 갈등의 종식, 평안과 구원을 뜻합니다. 개인과 개인, 사람과 국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등에서 적용되는 말입니다.

나아가 살롬은 정의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평화가 정의로운 인간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를 위해 평화와 안정을 기원하는 보편적인 사랑도 포함됩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상징이자 평화를 위한 도구로,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를 담고 있는 존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육신을 통해, 만물의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졌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이 있습니다. 그 권리는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지’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서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를 인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임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에게 ‘갑질’을 합니다. 덜 가진 자나 하수인들은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마치 노예처럼 ‘갑 질’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약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긴 한숨을 내쉬며 ‘갑질’을 감내하고 수용하며 살아갑니다. 인권은 어디로 갔는지, 참으로 불행한 평화 속에 살아가는 현실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더구나 우리 신앙인들도 교회 안에서 ‘갑질’을 하거나 ‘갑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 참으로 곤혹스럽기도 합니다.

총회로부터 노회, 당회에 이르기까지 소위 지도자들의 편파적인 모순 때문에 양떼들은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 지도자들은 이러한 울부짖음을 아량곳하지 않은 채, 오로지 세상적 평화만을 구호로 내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에는 어찌 그리 함구하고 있는지요.

겉과 속이 다른 까마귀 같은 지도자들 때문에 믿음에 균열이 가고 복음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이 판국에도,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못된 지도자들 때문에, 만왕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다가옴에도 전혀 변화의 온도를 느끼지 못하고 있음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는 오로지 화해와 용서 그리고 갈등이 없는 완전한 사랑만이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도구요 소망인 것입니다. ‘참 평화’를 주실 분은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참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께만 의탁하고 신뢰하며,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순종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 작은 소유욕으로 인해 평화를 깨드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 작은 감정 때문에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작은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누를 끼쳐서도 안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사랑이 식어서는 안 될 것이며, 사랑이 식어 있는 형제자매들을 더욱 위로와 격려로 함께 사랑의 불씨를 늘 지펴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나를 내려놓는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겸손은 어떠한 폭풍이 몰아쳐도 꺼지지 않는 ‘참 평화’의 불씨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과 모든 평신도들은 함께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오로지 주님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며, 긍휼히 여기는 믿음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며 ‘참 평화’를 맛보는 아름답고 행복한 신앙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