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

택자인 성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사랑하기로 택정하셨습니다(엡 1:4). 칼빈(John Calvin)은 이것을 소위 ‘타락 전(전) 선택(Supralapsarismus)’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후 인류가 아담의 원죄 안에 들어오므로 모든 인류가 다 타락했고, 택자 역시 거기서 비켜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택자들처럼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엡 2:2)”을 따랐습니다.

오리가 태어날 때 처음 본 사람이나 짐승을 엄마로 알고 따르듯이, 원죄를 유전받아 난 택자는 날 때부터 죄와 사망의 권세자 마귀를 따른 것입니다(엡 2:2).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엡 2:3). 사랑하는 택자들이지만 그의 공의로우심을 비켜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엔 ‘사랑’과 ‘진노’가 교차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애증(愛憎)은 독생자 그리스도에게도 예외 없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죄의 대속물(ransom, 代贖物)로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님의 공의는 그를 외면하도록 했습니다(마 27:46). 하나님 안에 ‘공의’와 ‘사랑’이 얼마나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정’에서도 이미 암시됩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엡 1:4, 새번역)”. 이는 사랑하는 택자가 원죄(原罪)에 참여할 것을 하나님은 미리 아셨고, 그들의 죄가 대속물 그리스도를 요구할 정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것’을 시사한 것입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긍휼(矜恤)’은 사랑하는 자에게 징벌을 내릴 때 갖는 연민입니다.

그 대표 구절 중 하나가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긴다(히 8:12)”입니다. 진노를 일으키는 ‘불의’를 ‘긍휼히 여긴다’고 한 것이 모순돼 보이나, 사랑하는 자가 범죄할 때(그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갖는 연민을 일컬은 것입니다. 예컨대, 속 썩이는 자식을 징계할 때 갖는 부모의 심정에 비견됩니다.

반면 본래 마귀의 자식이었던 불택자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증오일변도입니다. 또한 그 미움이 근원적이고 영구적인 것입니다. “에서는 미워했다(롬 9:13)”는 것은 택자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일시적인 진노와 미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11, 13, 21).”

에서는 ‘토기장이 비유’에서 처음부터 미움의 대상인 ‘천한(진노의) 그릇(롬 9:13, 21-22)’에 해당됩니다. 칼빈(John Calvin)은 이 유기(遺棄) 작정을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이라 명명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한다(요 8:44)”고 그로부터 책망을 받은 유대인들 역시 같은 부류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마귀에게 속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들에게는 대속자(代贖者)가 없기에, 그들은 받아도 받아도 삭감되지 않는 죄벌을 영원히 자기 몸으로 직접 받아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1인 3역

전능하신 주권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을 심판하신다면, 아무도 그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습니다.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13).”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심판아래 있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심판하면 건질 자가 없는 그 하나님이 또한 우리를 구원(救援)해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창과 방패’의 논리처럼 ‘모순(矛盾)’돼 보이나, 유일한 ‘심판자’ 하나님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다윗의 열쇄를 가지사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계 3:7)’”란, ‘구원하면 심판할 자가 없고, 심판하면 구원할 자가 없는’ 심판자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한 분 하나님이 ‘심판자’가 되시고 ‘구원자’가 됨은 하나님의 공의(公義)인 율법의 요구 때문입니다. 율법은 무죄한 자의 완전한 죽음을 받아내야만 진노를 그치는데, 은혜롭게도 하나님은 진노의 대상을 창세전부터 어린 양 그리스도로 지정하셨으며(계 13:8, KJV, NIV), 그에게 마음껏 진노하심으로 믿는 택자에게서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하면, ‘질병의 치유’ ‘귀신에게서 놓임’ ‘가난에서의 탈출’ 같은 것을 떠 올리는데, 구원의 핵심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救援)’을 뜻하는 헬라어 ‘소조’(σώζω) ‘소테리안(σωτηριαν)’은 위와 같은 다양한 구원 개념을 갖고 있지만, 성경 전체의 개념으로 보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신칭의적(以信稱義的) 구원으로 한정됩니다. 아무리 그런 것들에서 건짐을 받았어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지 못한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들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치유’와 ‘구원’을 분리해서 사용했습니다.

단지 문둥병에서만 고침을 받은 9명에게는 문둥병에서 ‘깨끗케 됐다’는 헬라어 ‘카다리조(καθαρίζω)’를 썼고, 예수께 돌아와 그의 발앞에 엎드려 감사하며 그를 하나님 아들로 믿은 사마리아 문둥병자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σώζω, 눅 17:19)”고 했습니다. 후자(後者) 한 사람 만이 이신칭의적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이신칭의적(以信稱義的) 구원은 그리스도가 그를 대신해 받은 율법의 심판을 믿음으로 덧입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구원인 줄 아나, 율법의 심판을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이 점에서 ‘구원’이란 단순한 자비나 시혜를 뛰어넘은 ‘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심판은 아무나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2위 그리스도만이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유일 자격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심판을 받아야만 심판을 받은 것으로 인정되며, 나아가 그가 율법의 요구인 ‘죄삯 사망(롬 6:23)’을 대신 지불해 준 사람만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소위, 폼 나는 ‘대신(代身)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격없는 우리 대신 죄의 대속물(代贖物)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부정하는 이들은 ‘죄는 인간이 범했는데 죄 값은 왜 그리스도가 치러야 하느냐?’고 말하는데, 인간은 범죄 하는 순간 죄값을 치룰 자격을 상실하여, 그의 죽음은 죄값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선, 심판자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구원자의 자격’을 말했다면, 지금 여기선 ‘심판받을 자’의 자격과 그 유일한 자격자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값을 지불할 유일한 자격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그 분은 하나님의 2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죄값 사망’을 지불했다는 것은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의 2위 성자께서 사망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택자를 구원하시려고 ‘2위’ 그리스도를 심판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곧 심판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자, 구원자, 피(被)심판 자’ 1인 3역을 행하신 것입니다.

불가사이(不可思議)하고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으며, 그야말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고전 2:9)”, 은혜 경륜의 절정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죄삯 사망(롬 6:23)’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심판받을)을 범할 일이 없게 됐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이 없으면 범함도 없다(롬4:15)”,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다(롬 7:4)”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범할 일이 없어지니 하나님이 진노하실 일도 없어졌습니다.

이렇게 율법이 요구하는 죄값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아내어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지니, 진노의 결과인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고, 사망에서 구원을 받으니 사망의 세력을 가진 마귀에게서도 벗어납니다.

율법에서의 구원이 명실공히 ‘인류의 4대 원수’ 모두에게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즉 최고위층에 있는 율법에서 벗어나니 율법의 장악 아래 있던 죄에서 벗어나고, 죄에서 벗어나니 사망에서도 벗어납니다. 그리고 사망에서 벗어나니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히 2:14)’에게서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