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오요한
욥기 19장 강해

요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25절)

오늘 말씀은 빌닷의 두 번째 변론 후 욥의 반론입니다. 욥은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처럼 징그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소외되어 고통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속자가 오셔서 자신을 구원하여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은 이 후에 그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그를 구원하십니다.

1. 하나님의 섭리 속에 받는 고난


1-6절에 보면 친구들은 욥을 괴롭혔습니다. 말로서 욥을 짓부수었습니다. 친구들이 다섯 번이나 말로서 욥을 학대한 것이, 욥은 열 번이나 학대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욥을 학대하는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습니다.

욥은 모두가 죄인인데 왜 나를 긍휼히 여기지 않고 판단하느냐고 말합니다. 친구들 생각에는, 그들이 욥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욥이 겪는 이 모든 고난은, 욥이 지은 죄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이 이것만은 알기를 원합니다. 욥을 궁지로 몰아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을 고난의 그물로 덮어씌우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욥이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이 죄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원합니다.

욥은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기 고난을 하나님 섭리에 속한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고난을 주셨다고 생각하면 고난에 의미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2. 침묵하시는 하나님


7-12절에 보면 욥은 자신이 받는 고난이 억울하다고 소리쳐도 하나님은 욥에게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호소해 보아도 시비를 가릴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심으로 우리에게 인내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침묵하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더 크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넘을 수 없는 담을 쌓아 욥의 앞을 막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현재 욥에게서 명예를 빼앗아 가셨습니다. 면류관을 벗겨가셨습니다. 자녀도, 재산도, 건강도 가져가셨습니다. 그의 희망도, 신앙적인 의도 다 가져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욥의 사면에서 벽을 헐으셔서 욥은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희망을 나무 뽑뜻이 뽑아가시자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진노하시며 원수같이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일제히 나와서 욥을 치며 포위하고 있습니다. 욥은 고난과 질병을 하나님의 군대로 보았습니다. 그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절망이 하나님께는 새로운 희망입니다. 그때는 욥의 의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서는 때입니다. 온전한 은혜를 배우는 때입니다.

3. 변신에 나오는 벌레처럼 된 욥


13-19절에 보면 욥의 형제들은 욥이 가난해지고 병이 나자 욥을 떠났습니다. 친척은 욥을 버리고 친지들은 욥을 잊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욥을 낯선 사람처럼 대합니다. 욥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께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욥의 집에 머물던 자와 여종들도 욥을 마치 벌레 보듯 낯선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전에 욥이 행복하던 시절에는 그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그의 후대를 받았고, 그의 종들도 욥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곤궁한 시절에는 그들이 배은망덕합니다. 욥은 그들 앞에서 타국인처럼 되었습니다. 그들과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고독하게 되었습니다.

욥이 종을 불러도 종은 무시하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인 욥이 종에게 오히려 간청해야 했습니다. 아내도 욥의 숨결을 싫어합니다. 허리에서 태어난 욥의 자식들도 욥을 업신여깁니다. 욥의 자녀는 살아남은 친척들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들도 욥을 업신여깁니다. 욥은 그것도 참고 견디었습니다.

욥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욥을 조롱합니다. 가까운 친구들이 욥을 미워하며 사랑하는 자들은 원수같이 되었습니다. 욥은 가장 가까운 자들이 자기에게 원수가 된 것이 큰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가까운 자들이 그렇게 된 것은 본래 원수였던 자들의 핍박보다 더욱 괴로운 것입니다.

욥은 이와 같은 고난을 받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만합니다. 우리는 욥기를 읽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받으신 고난의 한 부분을 조금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받으신 고난은 사랑하는 자에게서 발꿈치를 들리운 것입니다(요 13:18 下).

욥의 고난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을 보는 듯합니다. 어느날 벌레가 된 그레고리를 가족조차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몸에 박혀 죽어갑니다. 가족들은 그레고리가 죽어가는데 유유히 소풍을 떠납니다.

4. 불쌍히 여겨다오


20-22절에 보면 욥의 피부와 살은 뼈에 붙었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남은 것은 잇몸뿐입니다. 욥은 그 질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과 사람들의 배신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그의 피골이 상접하였습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긍휼을 구합니다. 하나님이 욥을 치셨으니 친구들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욥은 왜 친구들이 하나님처럼 심판자가 되어 자신을 심판하느냐고 책망합니다. 하나님께 고통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으로 욥을 "핍박"하실 수 있겠으나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아니니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맹수가 물듯이 친구들이 다른 사람을 거짓말로 비방하느냐고 합니다.

나를 비방하고도 무엇이 부족하여 더 괴롭히느냐고 묻습니다. 욥은 친구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처럼 심판하지 말고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5.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신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23-25절).”

욥은 자신의 말이 책에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영원히 돌에 새겨지기를 원합니다. 욥은 자기의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변호가 영구히 후세에 전달되기를 원합니다.

그의 소원대로 욥의 무죄한 고난은 욥기로 기록되었습니다. 욥은 나의 대속자를 갈망합니다.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설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속자는 공동번역에 변호인 후견인이라고 나옵니다. 표준새번역에는 구원자라고 나옵니다. 쉬운 성경에는 나의 구세주라고 나옵니다.

대속자는 히브리어로 고엘입니다. 노예의 값을 치르고 해방시켜 주는 자입니다. 후일에 대속자가 그를 신원해 달라고 합니다. 욥은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와 옴을 생각하면서 살아 계신 대속자가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내다봅니다. 사람들은 다 떠났어도 대속자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란 말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뜻입니다. 우리는 죽으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완전한 구주가 되십니다. 욥이 죽은 후에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땅에 서십니다. 그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구원해주신 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뿐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비방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외면 받고 제자에게 버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억울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여 정의가 이기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영광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완전한 정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독과 소외를 극복하는 길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영광의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6. 친밀하신 하나님을 보리라


26, 27절에 보면 욥은 가죽이 벗겨져 죽은 뒤에라도 메시야를 보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육체 밖에서”란 말은 죽은 후라는 뜻입니다. 그는 죽은 후에 그리스도를 만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의 메시야는 주위 사람들처럼 자신을 낯선 사람처럼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는 그의 고통을 이해해 주시는 친밀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메시야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초조합니다. 그가 육체를 떠나서 하나님을 볼 터인데 간접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고 직접적으로 친히 보게 된다고 합니다.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으로 나타나지 않으시고 친밀하신 구원자로 나타나십니다.

질병으로 인하여 그의 내장은 모두 녹아버려 그가 죽은 뒤에라도 주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욥은 그의 마음 속으로 주님을 보기 원하고 사모하여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을 사모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요한
▲오요한 목사.
7. 심판장을 알라


28, 29절에 보면 친구들은 어떻게든지 욥을 죄인으로 몰아세울 작정이냐고 합니다. 그들은 결국 문제는 욥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칼에 맞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할 것은 오히려 친구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칼에 맞을 죄가 어디에 따로 있지 않다고 합니다. 시비곡직을 가리는 하나님의 재판이 끝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욥이 자기에게 대한 그 친구들의 취급이 위태하다고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들이 고난받는 욥을 동정하지는 않고 계속해서 율법적으로 정죄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징벌이 그들에게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심판장이 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고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라고 합니다. 욥의 말대로 친구들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그리고 욥에게 용서를 빌고 욥의 중보기도를 받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욥의 소외와 고독을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우리는 욥의 고독과 슬픔을 이해하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대속자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위로를 얻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통하여 회복의 소망을 갖습니다. 아멘!

오요한 목사(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로마서 강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