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발로 들어온 무슬림 난민들, 배제 아닌 포용으로 복음 전해야

입력 : 2018.12.03 13:48

[세르게이 선교칼럼] 배제와 포용

난민대책 국민행동
▲한 난민 체류 반대 기자회견 모습(본 사진은 해당 칼럼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우리의 삶은 대략 배제와 포용, 이원론적 삶으로 이루어진다. 역사 속에서 프랑스의 위그노들, 그들은 신앙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독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게 된다. 영국이나 독일은 그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 주고, 집과 일터를 제공해 주면서 따뜻하게 포용해 준다.

그 결과 영국에서 그들은 산업혁명의 기반을 닦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고, 독일은 기술을 전수받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산업을 이룬다. 바이엘, 벤츠, 철강산업 등 거대한 국제 기업들은 그들을 통해 얻은 것이다.

그러한 경제적인 이익을 떠나서라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들을 따뜻하게 받아주고 안아주고 베풀어준 것을 거대한 포용이라고 한다. 이 포용은 우리의 언어로 바꾸면 하나님의 포괄적 사랑인 것이다. 오늘날 시리아 등 중동 난민들을 대거 수용한 것을 보면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필자는 처음 러시아에 왔을 때, 긴 줄을 서서 빵을 사 먹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면서 ‘우리 먹을 것을 저들이 먹는다’고 하면서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매우 불쾌하고 편협한 민족주의 모습에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배제’, 바로 그것이다.

오히려 우리 때문에 저들이 개방되고 다른 생각을 갖게 되며 더 나아가 복음의 은혜를 받게 되는 일인데, 오직 자기 앞의 빵만 쳐다보면서 핀잔을 주는 모습이 참으로 불쌍하게 보였던 적이 있었다.

120여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나라임에도, 이러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았다.

대한민국은 단일 민족이어서, 세계인들이 겪는 민족의 다양성을 경험하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배타심이 매우 높다.

이민자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한국의 모습을 러시아 방송에서도 쉽게 보게 된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는 세계인들이 우리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이민자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염려한다. 첫째, 범죄가 높아진다. 둘째,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셋째, 이슬람이 전파된다. 여러 가지 이유를 찾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염려와 오만일 뿐이다.

일반 범죄를 제외하면, 한국인에 의한 악한 범죄가 훨씬 더 많다.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하지만, 한국인은 정녕 힘들고 어려운 일은 하려 하지 않아서 현장에는 일손이 부족하다. 그래서 저렴한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이 산업현장에 필수적인 일이다. 오히려 득이 된다.

무슬림들이 몰려온다며 염려하는 기독교인들이 아주 많은 것을 안다. 무슬림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 힘으로 막을 상황이 아닐 것이다. 현실 국제관계 속에서, 개방 사회 속에서, 글로벌 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교회 지도자들이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멋진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 게으르고 무지하며 잠을 자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염려만 하고, 한 번씩 떠들기만 하고, 그러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안은 전혀 갖지 못한다면, 정신적 무력감이 있는 것 아닌가!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네가 ‘복의 근원’이 되어서, 믿지 않는 네 이웃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아야 할 것이라 가르친다. 그럼에도 우리끼리 만 복 받고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인지, 너무 편협하고 옹졸하고 폐쇄적인 신앙생활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민자들이 몰려오는 것을 거부하고 반대할 수 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오히려 그들보다 더 앞장서서 이민자들을 막고 욕하며, 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을 거부한다. 멀리 선교를 나가지는 못하지만, 저들이 찾아와서 살겠다고 한다면 전도의 대상과 기회로 삼을 수는 없겠는가?

이주 노동자, 다문화 가족, 중고등학생들의 집단 폭행 사건은 한국 사회의 왜곡이 얼마나 심하고 부끄러운 사건인가를 말해준다. 인간의 악함의 끝이 어딘가를!

나도 자녀들이 러시아 현지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대학을 마치기까지 현지 학교에 보냈다. 유치원에 보냈는데, 한 번은 한 아이가 내 아들 다리에 오줌을 쌌다고 했다. 몹시 분이 났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 또 그렇게 하려고 할 때는 태권도 폼을 잡고 주먹을 쥐고 겁을 주라고 했다. 정말 그렇게 하니 그 이후에는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다.

딸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외국인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눈이 짝 찢어졌다고 놀린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부터 그런 소리를 들으면 눈이 작은 사람이 아주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하도록 가르쳤다. 당당하게 대하라고 했더니 다행스럽게 잘 지나가게 되었다.

어쩌다 한 번씩, 학교 선생들 중에서도 외국인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 그 외에는 별 불편함 없이 잘 마쳤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소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1990년대까지는 매우 많은 활동을 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지방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외국인이 살아가기에 크게 불편함이 없는 것이다.

한국은 아직까지 이민족들과 함께한 경험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웃이나 동리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이 많지 않았다. 요즘 들어 이주민 노동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지금은 어디를 가나 외국인 노동자들, 동양의 어려운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무시의 대상이고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만 관심의 대상이라고 보는 그 정신과 태도는, 아직도 얼마나 국민적 열등감에 빠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대는 시간과 물리적 공간이 갈수록 좁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1. 함께하는 법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이웃과 더불어, 나아가 세계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한국인들은 온 세계 곳곳에 퍼져 나가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 온 손님들과 노동자들에게 함부로 대하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외국에 나가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된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시대에 뒤쳐진 민족과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2. 우월감, 자만심, 교만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돈 조금 많이 가지고 있고, 경제적으로 좀 낫다고 그렇게 보는가? 그 경제는 존중받을 수 있는 문화로 나타나야 한다. 졸부 근성을 버려야 한다. 천박한 자본주의 정신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3. 외국인 나그네들과 가난한 자들과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힘써 돕고 함께 하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고 전도이고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바른 길이다. 교회가 이를 실천하여야 한다.

멀리 가지 못하지만, 제 발로 찾아온 이들에게 복음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말이 다가오니 더욱 더 그들을 생각하게 된다. 지도자들이 먼저 이를 깨닫고 배우고 가르치고 실천하기를 당부한다.

세르게이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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