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삶이 어려울 때 사람은 신을 믿으려 하고 미지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 어떤 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며 기도한다. 만일 우리가 신이라면 과연 어떤 기도를 들어 주어야 할까?

남강에게 민족을 위한 신앙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했다. 머나먼 유배와 괴로운 투옥을 경험하면서 그의 신앙은 더욱 굳어졌다. 교회 장로가 되면서 그는 기독교계의 지도자로서도 솔선수범했다.

그는 모임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곤 했다.

“조선 사람이 살아나자면 하나님의 뜻 아래 단결이 되어 나가야겠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만 해서는 소용 없으니, 사람이 나서서 하나님의 뜻대로 실행하는 데 길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또한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며 보수적이고 물질적인 색채를 띠어 가는 기성 교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신앙인으로 살았지만, 알맹이는 허술하고 껍질뿐인 교회의 모습은 그를 고민에 빠뜨렸다.

그러던 그는 교회의 혁신을 위해 1929년 여름 기독신우회의 활동에 참여했다. 복음의 민중화와 실천을 기치로 내건 신우회는 기성 교회의 반성을 촉구하며 진리에 맞는 개혁을 주장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회복음주의를 중흥시키려 한다. 우리는 고통과 죄악으로 포위된 삶을 다른 세계에 미루기보다도 바로 이 땅에 자유, 평화, 진리의 천국을 임하게 하여 우리의 인격의 진선미를 완성코자 한다.”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개혁! 이것은 현실도피적인 천국 신앙을 걱정하고 있던 남강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남강은 실망하고 말았다. 신우회 지도층의 언행이 허황되고 책임감이 없으며 위선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번민하던 남강에게 새로운 기운을 준 것은 성서 조선 그룹이었다. 그들은 무교회주의자라고 불렀는데, 형식에 얽매인 교회에 나가지 않고 참된 복음을 찾았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연구했으며 <성서조선>을 발간했다.

무교회주의는 ‘성서’와 ‘조선’을 강조한 신앙단체로서, 그들은 조선의 역사를 성서에 비추어 해석하고 조선에서 참삶을 찾고자 했던 애국자들이었다. 그래서 진리에 바탕한 정의와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붙잡혀 수감되기도 했다.

무교회주의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연합하여 만들어 낸 사랑의 공동체여야 한다고 말했다.

오산학교의 <성서조선> 활동은 1928년 봄 함석헌이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마치고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함석헌은 이찬갑, 최태사 등 용동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청년들과 신상철, 유효원 등의 학생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다.

어느 날 서울을 다녀 온 남강이 함석헌을 불렀다.

“함 선생, 모임은 잘 되는가?”

“네.”

“여보게, 진리란 뭘까?”

“신앙은 근본적으로 형식이 아닌 정신이라고 봅니다. 교회의 제도와 의식 그리고 성직자가 있어도 이 정신이 없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천박한 종교적 도락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도 <성서조선>을 읽어 보았네. 신앙의 개혁을 위하여 그 방향이 옳다고 생각되더군. 열심히 해보게.”

“네.”

무교회주의 정신의 핵심은 기독교 복음의 진리, 즉 자유와 독립의 비판적 항거의 정신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서와 조선의 만남, 즉 조선적인 기독교의 수립을 시도했다.

형식적인 제도나 예식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조선의 현실에서 어떻게 성서를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세속에서 타락한 교회를 벗어나 성경 연구를 통해 성경 속의 진리를 찾아 실천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추구했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남강은 어느새 이들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그대로 배워 실천하면 교회 제도나 형식 등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으니 은근히 과격했다.

그 가르침은 신선한 조류로 등장하여 한때는 똑똑한 젊은이들이 거의 무교회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상황은 기성교회에 적지 않은 타격이 되었다. 과격한 사람들은 교회의 제도와 여러 가지 의식까지 부정했다.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