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가 진짜 말하려 하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입력 : 2018.11.25 17:41

[크리스찬북뉴스 서평] 헤세드의 사랑으로

소외된 이들의 하나님: 룻기
소외된 이들의 하나님: 룻기

캐롤린 커스티스 제임스 | 이여진 역 | 이레서원 | 160쪽 | 9,000원

여담(餘談)이다. 룻기에 대한 자료를 찾다, 2010년에 서울신문에 이수영의 결혼식 기사가 올라와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제목이 이상하다. 이수영이 “남편 보아스 난 롯”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룻’을 ‘롯’으로 잘못 적은 탓이리라.

그런데 팔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오타가 수정되지 않았다니 그게 더 궁금하다. 제목뿐 아니라 기사 내용에도 ‘룻’이 아닌 ‘롯’으로 기재된 것을 보니, 기자가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우리는 얼마나 룻기를 알고 있을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룻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룻기를 읽었음에도 왠지 잘못 알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내친김에 독하게 마음먹고 룻기를 주해하기로 작정했다. 룻기를 프린트해 읽고 또 읽었다. 다양한 종류의 주석을 참고하며 주해하기 시작했다.

히브리어 본문은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성경을 이용했다. 두 달 가까이 원문과 비교하며 주석을 참고하여 한 자 한 자 찍어내듯 주해했다. 마지막 주해를 끝내고 <룻기 묵상>이란 제목으로 전자책을 출간했다.

룻기 주해를 끝내고 마지막 남겨진 단어는 ‘헤세드’였다. 그 흔한 헤세드, 너무 많이 들어 식상해진 헤세드가 룻기의 주제였다. 룻기를 시작하기 전으로 되돌아와 버린 것이다. 무엇 때문에 공을 들여 룻기를 읽고 주해했던가.

난 다시 질문했다. 룻기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다윗의 조상? 헤세드의 희생을 통한 구속사의 완성? 뭘까? 그리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1장 서론을 다 읽기도 전에 경악할 만한 몇 개의 단어가 들어왔다. 폭발물, 디즈니 영화, 고대의 서사, 빈곤과 절망. 그러나 이러한 단어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끌고 가는 전조에 불과하다.

저자는 헤세드가 룻기의 주제가 맞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단어는 ‘행동을 실행하는 원동력(15)’라는 점을 강조한다. 나아가 하나님께 항의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하나님은 욥에게처럼 나오미에게도 그들의 상실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신다. 아니, 응답하지 않으신다.

“룻기를 욥 이야기의 틀에 넣으면, 이 고대의 서사가 21세기로 쑥 들어온다. 갑작스럽게 룻기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데,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뜻하지 않은 문제와 자주 맞닥뜨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슬픔에서 보호하실 권능이 있으신 데도 그 문제를 막지 않으신다(16쪽).”

침묵 또는 방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나오미가 처절하게 망가지고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데도, 내버려 두신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을 저주받은 자들에게 사용한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인가?

룻기 1장은 내용 흐름상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가 나오미의 삶을 강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기근을 피해 약속의 땅을 피했고,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는 두 며느리를 들였다. 하나님은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데려가셨다. 그것도 후손은 단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후손이 없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태를 닫으신 것이 아닌가. 저자의 말대로 ‘폐경기가 지난 과부 나오미는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14쪽).’ 나오미는 여자 욥이지만, 동시에 여자이기에 욥보다 더한 상황에 처한 것이 확실하다.

저자는 서론에서 룻기의 메시지를 푸는 열쇠를 네 가지로 제시한다. 앞의 두 부분을 살펴보면 하나는 ‘하나님이 언제나 이 이야기의 영웅이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룻기가 ‘하나님의 더 위대한 이야기라는 틀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대한 서사 속에 룻기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해석이 고난과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까? 책 속으로 더 들어가 보자.

이 책은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룻기보다 특이하고 실존적이다. 룻기는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오미가 절대적 절망으로 내던져진 이유, 나오미의 상실이 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이유는 그 사회가 과부로서 생존이 척박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나오미의 모든 것이 끝난 후, 하나님은 베들레헴을 축복하신다. 나오미는 일어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 이 대목은 누가복음 15장에서 그려낸 탕자가 아버지를 생각하고 돌아가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가부장제라는 문화 배경을 통해 나오미가 ‘다시 살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가는 것(47쪽)’이라고 정확하게 통찰한다. 그렇다. 그녀는 죽으러 가는 것이다. 차마 우상의 나라와 낯선 이방의 땅에서 죽기 싫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룻기의 첫 번째 헤세드가 등장한다. 며느리들의 미래를 절망으로 채울 수 없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한다. 아버지의 집이 상속과 권위의 의미라면, ‘어머니의 집’은 여성들의 결혼과 관련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명령은 ‘텅 빈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헤세드인 셈이다.

오르바는 돌아간다. 그러나 룻의 입술에서 나오미의 헤세드가 메아리 되어 돌아온다. 어머니와 함께 돌아갈 것이며, 어머니가 계신 곳에 함께 거할 것이며, 어머니의 백성들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나도 죽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절망과 죽음, 미래 없음과 고통만 남겨진 채 회의적 존재가 되어버린 나오미의 믿음에 일침을 가한다. 룻의 헤세드는 나오미의 헤세드를 능가한다. 룻은 나오미와 죽기를 각오한다.

룻 나오미 룻기
▲‘The Story of Ruth’, Thomas Matthews Rooke, 1876
그 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 다른 헤세드가 기다린다. 나오미는 보아스의 헤세드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 위험한 음모(?)를 진행한다. 룻을 보아스의 침대에 들이는 것이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보아스가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룻이 몰랐을까? 알았다. 그럼에도 룻은 자신을 깨뜨렸다(110쪽). 나오미를 위해서. 함께 죽을 것이라는 룻의 다짐은 삶으로 드러난다. 요즘처럼 불임 검사를 통해 자신이 아닌 남편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그런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룻은 불임의 여인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의 처소에 침투한다. 룻은 이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했는가? 저자는 말한다. 룻은 ‘자신을 깨뜨렸다.’ 혹시 모를 보아스의 헤세드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평가한다.

“헤세드가 법적 측면을 희생적인 사랑으로 바꾸었고, 절망 한복판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여호와의 마음 속으로 더 깊이 이끌려 들어가게 했다. 룻과 보아스의 공동 노력 덕분에 비탄에 잠긴 나오미에게 새로운 희망과 생명의 숨결이 들어갔다(118쪽).”

이쯤 되면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보아스는 누구인가? 저자는 말한다. “룻기는 온통 남자에 대한 책이다(124쪽).” 무슨 말인가?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보아스는 얼마든지 과부의 재산을 약탈할 수 있고, 룻을 붙잡아 자신의 첩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오미가 룻을 보아스의 침대로 떠밀 때 절호의 기회일 수 있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오미는 그때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보아스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저자는 보아스의 위대함을 이렇게 평가한다.

“보아스는 어떻게 하면 남성의 권력과 특권이 선을 위하는 강한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보아스는 법이 요구하는 바를 자발적으로 넘어서는 보기 드문 희생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모습이 헤세드다(134쪽).”

이 놀라운 남성을 보라. 저자는 세상이 가진 가치 체계와 관습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길을 알려 준다(24쪽).’고 말한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께서 처음 계획하신 ‘남자’인 것이다. 룻은 ‘바로 그 여자’이다.

히브리 원어를 보면 보아스는 ‘깁보르 하일’이며, 룻은 ‘에세트 하일’이다. 룻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정확하게 두 가지라고 확신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되라. 문자적 율법에 얽매여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그대로 살아가려는 진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할 때 ‘헤세드’를 통해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짧은 글로 이 책을 평하기에 역부족이다. 중요한 핵심을 짚었다고는 하지만, 행간 속에 조밀하게 박힌 보석 같은 통찰들과 영혼을 울리는 해석들을 어찌 표현할까. 몇 달 만 일찍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필자의 <룻기 묵상>은 얼마나 풍성해졌을까. 이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이곳에 옮김으로써, 이 책이 얼마나 귀한지를 대신할까 한다.

“우리가 예수께 초점을 맞추고 세상을 향한 그분의 심정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기독교인 형제자매들에게, 이웃들에게, 동료들에게,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헤세드의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날 때, 예수께서 오셨으며, 그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님을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156쪽).”

아멘!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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