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최재건 박사(하버드대학교 Ph. D. 연세대학교 교수 역임)의 논문 '삼일(3.1)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을 매주 한 차례 연재합니다.

3.1운동 이방인
ⓒ한민족평화나눔재단
(4) 3.1운동과 교회의 역할 평가

3.1운동은 한국교회의 사회참여 표본이 되었다. "양심이 나와 함께 있고, 진리가 나와 함께 행한다"는 신앙의 확신을 나타낸 것이었다. 민족운동이었지만 신앙 양심에 의해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의 거족적인 만세시위를 통해 독립을 얻지는 못했지만, 소망 속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는 결실을 얻었다. 우선적으로는 명목상이나마 총독이 사이또(齊滕實)로 경질되면서 무단정치 대신 문화정치가 표방되었다. 3.1운동 후 잠시 하락 하던 교세도 1920년대에 다시 성장하게 되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속에서 남녀 학교의 교육열도 크게 증폭되었다.

거족적인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한국의 기독교는 비 기독교인들로부터 외래종교와 서양종교라는 인식을 벗게 되는 계기를 얻었다. 토착종교로 인식되고 있던 불교나 유교 사람들보다 기독교인들이 더 열심히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그동안의 괴리감에서 벗어나 예수 믿으면 나라와 민족도 사랑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3.1운동으로 다양한 민족 구성원이 항일 민족독립운동이란 당면문제 앞에서 통합되었다. 오늘날 배타적, 독선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당시에는 신앙의 차이를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천도교, 불교와도 연대하였다. 이승훈 장로가 오히려 앞장섰다. 기독교회가 독립운동을 앞장서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이승훈의 말처럼 독립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다는 신앙이 기본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재도 독립만세 시위를 누가 주동했느냐는 일경 심문에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였다. 그에 따라 한국교회는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절대 명제로서 추구하고, 군국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때까지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서구의 힘, 미국의 힘, 교육의 힘, 의료의 힘, 문화의 힘을 대표하고 있었다. 3.1운동으로 이제 교회는 민족의 고난에 십자가를 지고 최대의 피해를 함께 체험한 곳이 되었다.  

3.1운동 때 기독교인 여성들의 참여와 활동은 월등하게 높았다. 하란사나 이화학당의 유관순 같은 열사를 비롯하여 생명을 받친 이들도 있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교회의 전국적 조직망은 3.1운동이 기독교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에 확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해외의 한인교회를 통해서도 유기적인 대외 연락체계가 가동되었다. 교회는 결속력, 기구, 조직, 교육을 통한 인물을 보유하고 있었고, 민주주의적인 자치능력을 양성 받고 있었다. 이런 조직이 없었다면 3.1운동의 확산은 불가하였다. 펜실베이니아대학(Uni. of Penn.)의 교수 이정식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애국심을 고취한 3.1운동은 동학혁명과도 다르고 의병운동과도 다른 적극적 민족운동이었고, 이 운동에 개신교가 공헌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선교사들의 간접적인 도움과 지원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기록으로 증인의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렸다. 한국교회는 이를 힘입어 세계교회와 동류의식을 갖고 군국주의 퇴치, 민주주의 정착을 지향하면서 세계의 사회와 교회에 증언자의 역할을 하였다.    

한국교회는 겨레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지탱하였다. 한말 이래로 국가를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닥 소생의 빛을 주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민비가 피습을 당하던 상황에서 고종이 선교사가 없느냐고 부르짖었을 때, 교회는 이미 임금과 민족에게 소망을 주는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교인들이 크고 작은 규모의 항일 운동과 3.1운동에 앞장섰을 때도 교회는 민족에게 소망을 주었다.

최재건
▲최재건 박사
3.1운동 때 한국교회가 사회적 비판 받는 역기능들도 있었다. 한국교회는 민족운동을 신앙운동으로 여기고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신앙의 기조가 현실부정 내세중심적인 것으로 변하여 갔다. 독립의 성취가 어려워지자 신앙이 사사로워졌다. 개 교회, 개인주의 중심의 신앙으로 변화되었고, 내세적이고 미래적인 축복을 추구하는 초월적 신비주의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들이 수감 중에 가진 신비체험이 그런 것을 부추겼다. 부흥회가 유행하면서 말세론에 치중한 길선주, 신비적인 부흥운동의 이용도, 신유의 기적을 많이 행한 김익두 등에 의해 신비 체험적이고 내세주의적 신앙이 강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농촌계몽과 여성계몽, 문맹퇴치, 절제운동, 야학운동, 문서운동이 전개되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의 고양으로 신앙 양상의 분화가 크게 뚜렷해졌다.

3.1운동의 준비과정에서 독립선언보다 독립청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기독교계 일각에서 대두되었다. 그런 이들도 결국에는 독립을 선언하는 데에 동참했지만, 적극적이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위로 폭력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박희도가 독립선언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꾼 것도 비판의 여지는 있으나 충돌은 막았다. 독립선언현장에 나오지 않은 4명 모두가 기독교 대표라는 것도 불참 이유야 타당했지만 비판적 평가도 있다. 재판 석상에서 민족대표들이 했던 진술도 강력한 항일자세를 나타내지 않아 아쉬운 점을 남겼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천도교로부터 생활비나 활동비 조로 재정지원을 받은 일이 있었던 것도 부정적인 요인으로 지적될만하였다.

가장 크게 아쉬움을 남기는 점은 독립 운동가들이나 민족대표들에서 3.1운동 후에 교회를 떠나 공산주의로 전향하거나 친일로 변절한 자들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념을 바꾸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기는 하지만, 회유와 위협에 넘어가서 지조를 잃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 중국, 만주로 떠나간 이들도 많아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