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사회주의의 여파는 오산고보에도 밀어닥쳐 동맹휴학이 벌어졌다. 그것을 주도한 학생들은 ‘독서회’라 불리는 이념 동아리의 회원이었다.

그런 동맹휴학은 옛 오산학교의 분위기에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교사와 학생들은 서로 믿고 따르며 부모 형제나 다름없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물결은 온 사회를 변화시켰다. 오산고보도 무풍지대가 아니었다.

그런 혼란기 앞에서 남강은 깊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교무회의에서 말했다.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맹휴사건으로 머리가 아프겠다고 위로하는데 나는 이번 일이 일어난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학교 측에 잘못이 있든 학생에 잘못이 있든, 이 나라 교육계를 위해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드러내야 합니다.”

그는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금년 3월 이래 조선 전국에서 맹휴사건이 70여 건이라 하니 이래서야 어찌 교육을 하겠소? 학생만 잘못이라는 게 아니오. 선생 중에도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전부 사회에 드러내 처리해야 할 것이오. 사회에 별별 흑막이 다 있으니 선생님들이 철저히 조사를 하면 전부 드러날 것입니다.”

이듬해에도 동맹휴학은 이어졌다. 학생들의 요구 조건은 일본인 교무주임을 바꿔줄 것과 조선어와 조선문법을 정식 과목으로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일제의 강압이라 교장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학부모들의 중재로 겨우 사태가 수습되었다.

1929년엔 3·1 만세운동 10주년을 기념해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남강은 혼란스러웠다. 과연 수업까지 거부하며 그래야 하는 것인가?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은 3·1만세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투쟁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은 광주고보생 10여 명이 조직한 성진회(醒進會)라는 학생들의 비밀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조선독립과 일제의 노예교육 폐지를 강령으로 내세운 성진회는 ‘독서회중앙본부’로 개편하여 각 학교 학년별로 조를 편성하여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학습을 실시했다.

광주고보 학생 이경채가 ‘조선독립’이란 선전문건을 교내에 배포하다가 발각돼 경찰에 구속당한 사건이 일어나자, 독서회가 중심세력이 되어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휴학은 5개월간이나 계속되었으며, 1929년에는 ‘조선독립만세’, ’식민지교육 철폐’, ’일본제국주의 타도’ 등의 전단이 광주고보 내에 살포되어 학생시위의 움직임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항일 학생운동은 전남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 통학하는 광주중학생(일본인)과 광주고보생(조선인) 사이의 충돌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 등이 광주여자고보 학생인 박기옥 등 여학생들의 댕기꼬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했다.

이때 개찰구를 나오던 박기옥의 사촌 남동생인 광주고보생 박준채와 싸움이 일어나고, 급기야 나주역 앞에서 광주고보생들과 광주중학생들 사이의 편싸움으로 번졌다.

그러자 일본인 순경들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을 편들고 한국 학생들을 구타했다. 역전 충돌은 광주 전체의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의 집단적 격돌로 발전했다.

광주고보생들은 일방적으로 한국인 학생들을 비난하는 기사를 쓴 <광주일보>를 습격해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또한 광주고보의 다른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과 광주천에서 맞붙어 광주역 앞까지 쫓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학생 수백 명이 검도 등으로 무장을 한 채 광주역 앞으로 몰려들자, 광주고보생들은 농업학교 학생들과 합세하여 일본인 학생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엄격한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생시위 사실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불길은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오산고보의 시위는 한겨울의 찬바람 속에 일어났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격문을 뿌린 뒤 정주역까지 만세를 부르며 진출했다. 일본 경찰과 충돌이 일어 많은 학생들이 다치거나 붙잡혔다.

남강은 고민에 빠졌다. 학생들이 민족정기를 잃지 않고 항일시위에 나선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혹시 그 과정에서 학교와 학생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학생들의 우국충정을 잘 이해하면서도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그에겐 있었던 것이다.

하얀 눈길을 따라 정주를 향해 달려가는 노인이 있었다. 바로 남강 이승훈이었다.

“우리 학생들이 저렇게 고생하는데 내가 어떻게 보고만 있단 말인가…. 실수가 없어야 할텐데.”

그는 착잡한 심정을 억제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남강은 일본 경찰과 학생들 사이에서 중재를 맡았다.

“청소년은 원래 혈기가 왕성하여 불의를 보곤 못 참지요. 앞으로 잘 교육 시킬 테니 선처해 주시지요.”

“다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영감부터 잡아넣겠소! 알겠소?”

“예, 허허….”

결국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는 1주일 정학 처분을 내리고 졸업을 앞둔 5학년 학생들만 등교시켰다.

그는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 결과 대부분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실형을 선고받은 아이들은 끝내 제적되고 말았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애쓴 학생들을 졸업시키지 못한 남강의 가슴은 메어지는 듯했지만, 그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음, 꼭 졸업장을 받아야만 오산인(五山人)인 건 아냐. 퇴학당한 학생들도 오산학원에서 배운 진리와 정의로운 정신에 따라 행동한다면 이 나라를 구할 인재가 될 수 있을거야. 그들을 믿어야지.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그들은 우리 민족의 억울한 심정을 모아 일본의 압제에 저항한 어린 애국지사들이라고 할 수 있어. 그들이 오산에서 다짐한 진실과 정의심을 지닌 채 올곧게 살아간다면 우리 나라와 민족에게도 희망이 있을 거야.”

그는 독백하듯 중얼거리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