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다. ⓒ연구소 제공

‘평양대부흥 운동’으로 잘 알려진 1907년의 ‘비정치적’ 영적대각성 운동이 미국의 당시 ‘일본 우선 정책’에 균열을 일으켰고, 결국 후일 대한민국 독립의 단초가 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러한 내용은 22일 오후 부천 서울신대 우석기념관 강당에서 열린 ‘한미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에서 김명구 교수(연세대 이승만연구소)가 공개했다.

심포지엄에서는 김 교수는 ‘초기 한미관계와 기독교’라는 제목의 제1발표를 통해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이 미국 기독교계를 자극했고, 결론적으로 미국의 대일(對日) 인식과 정책에 변화를 일으켜 후일 우리나라 독립 문제를 논의한 최초의 국제 회담인 카이로 선언(1943)으로 연결됐다”며 “비정치화를 내세웠던 1907년의 사건이 미국 교회를 거쳐, 미국 정부의 대한(對韓) 정책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명구 교수는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일명 신미양요로 불리는 전쟁으로 시작됐지만, 시대적 필요에 따라 1882년 5월 한미수호통상항해협정을 체결하고 1883년 5월 미국 주 조선공사관이 개설되면서 공식적인 국가관계를 시작했다”며 “미국 교회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선교사들을 파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의 미국에 대한 기대로, 선교사들은 ‘은둔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었고, 미국 정부의 치외법권 혜택 아래 비교적 수월하게 선교를 진행했다”며 “왕실과 한국 정부의 중심에서 신뢰를 얻었고, 미국 정부도 재한 선교사들의 역할과 활동으로 인해 더 한층 신뢰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한미 관계는 처음부터 선교와 국제정치가 함께 엮여 진행됐던 것”이라고 했다.

김명구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발제 김명구 교수, 논찬 최재건 박사(오른쪽부터). ⓒ연구소 제공
김 교수는 “재한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다. 때로 미국의 입장과 근대 문명관을 공유했지만, 미국의 정책과 큰 괴리를 갖고 있었다”며 “그들은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하기도 했지만, 근원 목표가 달랐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려 했다면,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가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이유에서 한국은 미국을 통해 한국의 독립과 근대화라는 당면 과제를 얻으려 했지만, 미국 외교관들은 미국 정부가 결정한 정책을 철저히 수행했다. 선교사들은 한국 왕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했지만, 선교를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었다”며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빙자로 미국 공사관이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국가 간의 관계는 끝났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 것은 국제역학 문제 때문이었지만, 한국이 미래에도 미국에 이익을 줄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를 더욱 확대했고, 미 공사관이 폐쇄됐음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선교를 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활동은 1907년으로 이어졌고, 1907년의 결실은 미국 교회의 실적과 자랑이 됐다”며 “그 결실은 미국 정부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고, 미일 관계에 금이 가는 단초가 돼 종국에 한국 독립으로 이어지는 동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구체적으로는 “1880년대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들은 외교관과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과 달리, 외교관들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7년 가량 체류하면서 조선을 면밀히 관찰했고, 조미수호조약 체결 얼마 후 조선에 대해 소극적이고 무심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이 미국의 이익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이라며 “미국은 안전한 항로 보장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항을 실현하고 공사관을 개설했지만, 곧 ‘빈약한 의존 관계(a poor reliance)’를 확인했고, 따라서 무관심과 소극적 정책으로 후퇴한 것”이라고 보고했다.

김명구 교수는 “1885년 미 국무장관 배이야드(Thomas. F. Bayard)는 조선이 중국과 일본, 러시아, 영국 등 열강들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곳이므로, 고종이 청일전쟁에 미국의 개입을 요청했지만 중립을 지키면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조선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며 “조선은 미국을 통해 일본과 같은, 강력한 근대국가를 꿈꾸었지만 미국은 조선을 지원해주어서 얻을 수 있는 정치·경제적 이익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19세기 당시 한 국가가 주권을 인정받으려면,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국가들(family of nations)에 의해 문명국(civilized state)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또한 국가의지(state will)의 존재 곧 적대적인 세계에 대해 스스로 자위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며 “당시 한국과 중국은 문명국으로 인정받지 못한 반면, 일본은 그 지위를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비문명국가인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침탈했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점령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00년,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도록 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워놓았다. 루즈벨트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매우 부정적 편견을 갖고 있었다”며 “그가 볼 때, 한국은 독립과 자치능력을 갖추지 못한 비근대 비문명국가였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점유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김명구
▲김명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명구 교수는 “1907년의 영적대각성 운동은 한국교회 비정치운동의 시발이 됐지만, 이 운동은 한국을 버리고 떠난 미국을 다시 돌아오게 해 일본과 대립하게 했다”며 “이 운동은 미국 교회를 자극했고 미국 정부의 대한(對韓) 인식을 교정하게 했다. 일방적으로 기울었던 일본 우선의 정책에 교정을 하게 한 것”이라고 보고했다.

김 교수는 “영적대각성의 결실을 확인하고 싶어, 적지 않은 인물들이 한국을 찾았다. 세계 거대신문 특파원들이 한국을 찾았고, 세계 명사들의 방문도 넘쳤다”며 “방문객들은 한국에서 사도적(使徒的) 기독교가 되살아났다며 흥분했고, 한국이 아시아의 ‘지배적 세력’이 될 것이라며 탄성을 질렀다. 이들에게 한국은 복음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였고, 이는 국제정치의 이득을 위해 한국을 버린 미국 정부의 생각과 달랐다”고 했다.

그는 “당시 식민지에서의 불합리한 일들이란 흔한 일이었기에, 한국의 문제는 주목을 끌 수 없었고, 일본은 서구 세계로부터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며 “따라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이 당하는 핍박과 가혹한 현실을 보려 하지 않았고, 선교사들이 아무리 일본의 처신에 대해 설명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1912년, 미국 정부의 입장이 변하고 있었다. 뉴욕 월간지 아웃룩(The Outlook)은 1912년 ‘105인 사건’을 보도했고, 1912년 10월 뉴욕 알딘클럽에서는 미국 성서공회와 YMCA 이사단, 전 국무장관과 뉴욕 시장, 전 하버드대 총장, 예일대 총장 등이 모여 한국교회의 핍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4개 항에 걸친 권고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김명구 교수는 “그들은 일본 정부와 직접 교섭해서, 이 문제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공평히 처리하도록 요구했다. 소극적이고 수세적이었던 미국 교회가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한국문제를 대변하기 시작했고, 미국 사회를 강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며 “그 동안 관심이 없었던 한국 문제가 미국 교회를 통해, 미국 사회와 정계의 이슈가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1907년 운동의 결실만큼 뛰어난 선교 결과를 가져온 예가 없었고, 그것은 곧바로 미국 교회의 업적과 자랑이 됐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세계 모든 교회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특별히 택해서, 동양 처음으로 기독교 나라를 만들어 아시아 주에 기독교 문명을 발전시킬 사명을 맡기려는 것이라 한다’고 보고했다”며 “1907년 한국을 방문한 이들은 자신들이 보고 판단한 것을 서구 기독교 세계로 알렸고, 일본으로서는 이것이 두려웠다. 일본의 가혹한 통치와 위선이 적나라하게 서구 기독교 사회로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양대부흥
▲평양대부흥 운동 당시 사진.

김 교수는 “1907년의 선교사들은 비정치를 선언했지만, 한국 기독교의 현실과 정치적 입장을 대변했고, 한국의 실정을 미국 사회에 곧 바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며 “따라서 일본은 가혹한 정치와 자신들의 추악한 단면을 전달하는 선교사들이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이를 파악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이를 잘 활용했다. 선교사들과 미국 교회를 연결시킬 줄 알았고, 이를 정계로 이어지게 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재한 선교사들은 1907년을 시작으로 일본이 한국인들과 한국교회를 학대하는 정황도 비밀리에 미국 교회에 전했다. 미국 교회는 한국의 정황을 미국 정계와 사회로 알렸고, 한국의 입장을 대변했다”며 “상당수 미국 교회 목사들과 지도자들은 정치 지도자들에게 한국 독립을 직접 호소하고 설득했다. 1940년대까지 시간이 지나야 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 정부의 한국 독립 결정으로 연결됐다. 1902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미국은 조선을 포기했고 일방적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끝내려 했지만, 재한 선교사들에 의해 양국 간 관계는 이어졌고, 오히려 한국독립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정리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이 외에도 오일환 교수(한양대)가 ‘3·1 운동, 미국, 그리고 기독교’, 박명수 교수(서울신대)가 ‘태평양전쟁 시기 이승만의 대미 외교활동에 미친 제랄딘 피치의 역할’, 윤정란 교수(서강대)가 ‘1960년대 한미 관계에서 기독교의 역할: 미국 선교사 제임스 레이니의 한국 활동을 중심으로’, 이은선 교수(안양대)가 ‘1970년대 한미 관계와 민족복음화운동’을 각각 발표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한국기독교복음단체총연합회(대표회장 정인찬 박사) 주최,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주관으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