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
▲스마트폰과 진실게임이 절묘하게 결합된 서사를 선보이는 영화 <완벽한 타인>.
진실게임의 위협: 위장된 인격, 페르소나들의 만남

박욱주 교수님의 이번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영화 평론에서는 4백만명을 불러모으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재규 감독의 영화 <완벽한 타인>에 대해 파헤쳐 봅니다. 이 영화에는 유해진(태수)과 염정아(수현), 조진웅(석호)과 김지수(예진), 이서진(준모)과 송하윤(세경) 등 3쌍의 부부와 윤경호(영배)와 지우(소영) 등이 출연해 각자의 휴대전화(스마트폰)을 모두 공유하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사건과 반전이 담겨 있습니다. 본 칼럼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들어가 있습니다 -편집자 주

◈페르소나와 인격: 가면을 벗겨내는 사회적 실험, <완벽한 타인>

“예상을 깨고 선전했다.” 영화 <완벽한 타인>의 흥행성적에 대한 평가다. 2016년 개봉한 동명의 이탈리아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원작의 탁월한 소재를 한국적 정황 속에서 새롭게 재해석했다.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이탈리아 원작 제목(Perfetti sconosciuti,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충실하게 반영했다. 반면 영문 제목은 ‘The Intimate Strangers(친밀한 타인들)’로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

친밀한데 타인이라는 제목, 언어논리적으로 볼 때 모순이다. 이런 언어기법을 수사법적으로 ‘옥시모론(oxymoron)’, 즉 형용 모순이라 한다. 이 용어는 두 개의 의미를 담은 용어, ‘옥시(oxy)’와 ‘모론(moron)’의 합성어인데, ‘옥시’는 ‘날카로운, 예리한’을 뜻하는 그리스어 ‘옥수스(ὀξύς, oxus)’로부터, ‘모론’은 ‘둔한, 어리석은’을 뜻하는 그리스어 ‘모로스(μωρός, moros)’로부터 유래된 말이다. 직역하면 ‘예리한 바보’라는 뜻 정도가 되겠다.

왜 ‘예리한 바보’일까. 사전적 의미로는 명백한 모순이다. 그래서 바보스럽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 특히 모순적이고 자가당착적인 상황들에 대비해볼 때 지극히 날카로운 통찰이다. 그래서 예리하다. 이처럼 말은 안 되지만 엄밀한 현실인 상황을 비판적으로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기법이 형용 모순이다.

영화의 소재로나 내용으로 보나 이보다 완벽한 제목이 존재할까. 어감이나 첫 인상은 <완벽한 타인>이 확실히 나아 보인다. ‘완벽’이라는 의미는 어쨌든 보는 이로 하여금 긍정적 기분을 선사한다. 반면 ‘친밀한 타인’은 제목으로서 느낌이 약하고, 의미 자체가 모순적이라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그러나 영화의 본 내용을 살펴보면 ‘친밀한 타인’이라는 말은 소위 ‘초월번역(원문이 전달하려는 의미를 원문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한 번역)’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친밀한 타인,’ 이 말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 간의 피상적 관계와 본질적 관계를 구별해 지목하고 있다. ‘친밀한’은 피상적 관계, ‘타인’은 본질적 관계를 지목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겉으로 서로 친밀할 수밖에 없는, 아니 친밀해야 하는 정황 속에 처해 있다. 40년 지기 죽마고우 네 명과 아내들(세 명, 한 사람은 미혼), 평시 소원한 것도 아니고 자주 연락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 이들 가운데 한 친구의 집들이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상황. 겉으로 화기애애해야 할 의무감을 자아내는 정황이다.

완벽한 타인
▲화목하기만 해야 할 40년지기 죽마고우 부부들의 집들이 현장은, 스마트폰 통화와 메시지를 공개하자는 진실게임 제안으로 긴장과 불안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뒤바뀐다.
반면 이들의 본질적 관계는 어떠한가. 등장인물 각각의 마음에는 부부관계와 친구관계에 치명적일 수 있는 비밀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 이런 와중에 집들이에 친구들 내외를 초대한 석호(조진웅 분)의 아내 예진(김지수 분)은 일종의 진실게임을 제안한다. 저녁 식사시간 내내 스마트폰으로 전송되는 모든 통신내용(통화, 메신저)을 공개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예진은 스마트폰에 담긴 각자의 비밀과 이를 감추려는 친구들의 심리에 흥미가 동했던 듯하다. 물론 예진은 자신의 비밀은 들킬 리 없다는 우월감과 자신감을 갖고 이 위험한 놀이를 제시한 것이다.

사실 놀이라 하지만 상당히 심각한 내용을 담은 일종의 사회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모두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싶었으나, 친구 간, 부부 간 눈치가 보여 이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게 된다.

이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의 서사는 상당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아니나 다를까, 서로 간 시기와 질투, 경멸감, 비교의식, 피해의식, 부부 간 소원한 관계, 이리저리 얽힌 불륜, 차마 친구들에게 드러내놓지 못하는 동성애까지. 스마트폰은 3시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이 일곱 명의 인간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할 내용들을 긴박하게 전달한다.

<완벽한 타인>은 지극히 한정된 공간(저녁식사 자리)에서 대사, 눈빛과 몸짓, 스마트폰을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와 메시지만으로 서사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영화다.

따라서 배우들의 연기력이 극단적으로 중시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이런 요구사항에 걸맞는 능력을 가진 배우들(조진웅, 김지수, 유해진, 염정아, 이서진, 송하윤, 윤경호)이 등장한다. 이들 연기파 배우들의 시너지는 이 위험한 실험에 당연하게 따르는 긴장감과 갈등을 사실처럼 긴박하게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로써 <완벽한 타인>은 관객들에게 진실된 인격을 바탕삼은 관계와 이 인격을 감춘 가면, 즉 페르소나를 바탕삼은 관계의 차이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진실과 거짓, 속마음과 가식의 이런 공시적 대비는 블랙코미디가 선사할 수 있는 헛웃음,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 자신의 현실도 이런 부조리함을 진득하게 담아내고 있음에 느끼게 되는 씁쓸한 감정을 유발한다.

완벽한 타인
▲하나둘씩 폭로되는 진실과 본심에 무너져 가는 인간관계. 우리들의 일상적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가면 아닌 인격: 페르소나의 다른 의미, 하나님의 얼굴과 위격

<완벽한 타인>은 약간은 과장된, 하지만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가식적 인간관계, 가면을 쓴 페르소나의 인간관계를 중심에 담고 있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다음의 진술로 압축할 수 있다. “성실하고 거짓 없는 교제는 이상일 뿐, 현실은 가면을 쓴 거짓된 관계들로 가득하다.”

이런 메시지에는 블랙코미디에 담겨 있는 전형적인 체념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누구나 선과 진실을 갈망한다 말하지만, 인간의 삶의 현실은 지독한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차 있어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것, 이를 체념하며 수긍하는 정서가 영화 전반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인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상주의자들은 실망 끝에 상처만을 입게 된다는 것 역시 이 영화에서 여실하게 표현되고 있다. 스마트폰을 둘러싼 이 위험한 진실게임에 참여한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숨길 것이 없이 떳떳한 인물, 바로 세경(송하윤 분)의 처지가 그렇다.

믿었던 남편 준모(이서진 분)의 스마트폰은 그의 연이은 불륜을 폭로한다. 그러면서도 아내 세경에 대한 적반하장격 의심과 비난을 일삼는 남편의 모습에 큰 상처를 받은 세경은, 결국 결혼 관계를 끝내자는 의미로 반지를 던져놓고 분노하며 떠난다.

영화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 특히 인간관계의 진면목은 분명 아름답기보다 추악할 때가 더 많다. 인간 개개인의 마음에 본원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죄성과 욕망은 부부, 가족, 친구, 동료, 그 외 여러 다양한 인간관계를 좀먹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친밀한 타인’들 간의 겉과 속이 다른 관계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심히 부조리하고 수치스러우면서도 그것이 사람 간 관계의 진실일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정황을 진득하게 수긍하게 만든다.

완벽한 타인
▲비밀의 폭로에 무너져내린 등장인물 준모(이서진 분). 가면이 벗겨지자 수치와 당혹감을 주체할 수가 없는 모습이다.
흔히 ‘가면’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는 원래 ‘얼굴, 가면’을 뜻하는 그리스어 ‘프로소폰(πρόσωπον, prosopon)’에서 유래된 용어다. 이 용어는 특별히 고대 희곡에서 자주 발견된다. 배우들이 일인 다역을 맡을 경우 가면 두세 개를 바꿔 쓰며 무대에 올랐는데, 이 때 사용된 가면이 바로 ‘프로소폰’이었다.

이 용어는 신약성서 원문 사본들에서도 연달아 발견된다. 그런데 성서 기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는 기존의 ‘가면’이라는 의미를 배제하고, 순전히 ‘얼굴’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데만 사용하였다.

특히 ‘프로소폰’이라는 용어는 사람의 얼굴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얼굴,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마 18:10,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그리고 성서 기자들이 이 용어를 그리스도의 얼굴,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한 까닭에, ‘프로소폰’의 라틴어 번역어인 ‘페르소나’는 주후 4-5세기경 니케아-칼케돈 공의회로 이어지는 삼위일체 논쟁에서 ‘한 신적 본질을 공유하시는 세 위격(位格, persona)’이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로 채택된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는 겉과 속이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 그분의 얼굴의 신실하심을 공경하고 이를 닮으려는 기독교 신앙의 정신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세 위격은 결코 하나의 신적 본질을 이리저리 속여가며 나타내심이 아니다. 기독교 교리는 항상 이런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극도로 경계해 왔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한 분 하나님의 세 양태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세 실체, 즉 세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hupostasis)’로서, 세 위격 각각이 어느 하나도 거짓되지 않은 충만한 신적 본질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관계적 신성 혹은 존재방식을 지칭한다.

이처럼 기독교의 ‘페르소나’는 겉과 속이 결코 다르지 않고 또 달라서도 안 되는, 진실 그대로의 인격이 담긴 얼굴을 의미한다. 이 얼굴은 죄에 함몰된 인간들이 이리저리 가면을 쓰듯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진실된 인격, 진실된 마음의 상태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완벽한 타인
▲인간 관계는 거짓과 이를 감추는 가면 없이 유지되기 어렵다. 반면 성서는 겉과 속이 절대적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얼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배우도록 명한다.
<완벽한 타인>에 등장한 배우들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그들의 대사, 몸짓, 눈길, 어느 하나 치밀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게 바라본 것은 스마트폰으로 전해지는 통화와 메시지 때문에 내면의 추악함이 하나씩 둘씩 폭로될 때 당혹감에 사로잡힌 얼굴, 그리고 이 당혹감을 순간적으로 감춰내는 능청스러움이 공존하며 만들어진 표정들이다. 이렇게 배우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교차될 때마다 마치 화려한 가면무도회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처럼 영화는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인간관계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그 속에 분노하면서도 체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부당한 현실을 당연시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성서는 이 세상이 오직 그런 가면무도회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친다. 바로 이 ‘가면’을 뜻하는 동일한 용어, ‘페르소나’를 통해.

거짓된 인간관계는 인간과 하나님의 내밀한 ‘인격적’ 교제의 순간, 그리고 교회 성도들 간에 신실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순간에만 극복되고 초월된다는 가르침이 바로 이 위격으로서의 ‘페르소나’라는 기독교적 용어 정의에 함축되어 있다.

<완벽한 타인>의 장면들 하나하나는 웃음을 자아내지만, 동시에 죄성과 그로 말미암은 거짓된 얼굴과 표정에 사로잡힌 우리 삶의 가련함을 진득하게 체감하게 해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이 영화로부터 전달받은 메시지는 단지 체념과 실망으로만 가득찬 현실인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부조리한 현실을 넘어서게 해주는 참된 ‘얼굴’들의 만남, 꾸밈없는 인격들의 만남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타산지석의 교훈이 더 크게 다가온다. <계속>

완벽한 타인
▲가면무도회를 보는 듯한 영화 <완벽한 타인>. 위선과 가식으로 점철된 인간관계의 극복과 초월은 오직 실신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해진다는 교훈을 상기시킨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