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박명수 대담 이성봉
▲대담이 진행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이성봉 목사님의 회개와 은혜 사모와 성결과 재림의 영성을 염원하며’라는 주제로 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 강변교회 원로)와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간의 대담이 15일 오전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담임 이수환 목사)에서 개최됐다.

김명혁 목사와 박명수 교수는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의 질문으로 각자 발표 후 이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다음은 그 내용.

-박명수 교수님이 아까 이명직 목사님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성봉 목사님이 가장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고백한 이명직 목사님은 한국교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박명수 교수: 이명직 목사님은 성결교회가 사부(師父)라고 부르는, 선생님이자 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이명직 목사님은 1916년부터 경성성서학원 교수로 활동하셨기에, 이성봉 목사님이 1925년 입학했을 때 이미 경력이 10년째였습니다.

이명직 목사님도 철저한 회개 경험을 강조했습니다.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와서 목회도 하고 신학을 가르치셨는데, 가장 큰 고민은 ‘입으로는 가르치고 있지만 삶으로 간증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래서 1921년 하나님 앞에 목숨 걸고 기도해서 성결을 체험하고, 학생들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자백했습니다. 그러니 학생들도 죄를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2주 동안 수업을 멈추고 서로 죄를 자복하는 부흥의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김명혁 목사님은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열두 번이나 안수기도를 받으시면서 평생 흠모하고 계신데, 장로교회들이 성결교회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 부흥운동에서 본받을 점은 무엇인가요.

김명혁 목사: 저는 성결교회를 좋아하고, (오늘 참석하신 최복규 목사님의 스승이신) 김치선 목사님이 세운 예장 대신 교단도 좋아합니다. 처음 미국으로 떠나 페이스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등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보수주의가 됐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총신대 교수로 몇 년 있을 때까지는 극단적 보수주의자였습니다. 기장과 강원용·조용기 목사님을 가장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한경직·손양원 목사님, 존 스토트 목사님을 보면서 점점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를 이상하게 보기도 합니다.

‘모두를 품어야 한다’, 한 번 그렇게 되니 구약성경이 달라졌습니다. 니느웨 백성까지, 로마 백성까지, 땅 위의 모든 족속들까지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교파는 없지만, 귀한 것들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3·1 운동도 이승훈 선생님과 길선주 목사님이 기독교인이셨지만, 불교와 천도교를 앞장세우지 않았습니까.

타종교를 받아들일 필요까진 없지만, 나라를 위해 협력할 필요는 있다는 입장을 취하니 이상해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파도 초월하고 인종도 초월해야지요. 저는 무슬림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습니다. 죽을 때 공산주의와 무슬림을 위해 제 몸을 다 드릴 수 없을까 늘 생각합니다.

김명혁 박명수 대담 이성봉
▲박명수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회개를 철저한 회개와 자백, 변상이라고 하셨는데, 한국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시각에 있어 논란이 있습니다.

김명혁 목사: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정말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자복하는 것도 형식적일 수 있겠지만, 정말 순수하게 우리가 십자가 복음으로 바뀌면 배상을 하든 않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것 없이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박명수 교수: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당시 공개적 회개는 교회에서 법적으로 진행된 게 아니라,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입니다. 법적으로 자꾸 따지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열매였고, 회개했다면 그의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달라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것처럼 우리가 죄 짓고 상처를 준 그 사람 앞에 가서도 그래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영화 <밀양>을 보십시오. 가해자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았다’고 할 뿐, 상처 준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초기 한국교회 회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동시에, 자기로 인해 해 입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직접 배상을 했고, 그러니 사회가 교회를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죄 지은 당사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러한 모습을 다시 갖는다면, 한국교회는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초기 부흥사들의 집회를 통해 진정한 회개 운동과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부흥사들 때문에 부흥이 안 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진정한 부흥운동 회복을 위한 과제는 무엇인지요.

김명혁 목사: 사람이 중요합니다. 정말 회개한다면, 다 품고 서로 붙잡고 울어야 합니다. 한경직·손양원 목사님에게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들 별로 안 좋아하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존경한다.

한국교회에 정말 변화된 사람 10명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드럽습니다. 회개가 형식과 제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옆사람을 끌어안고 울면서 해야 합니다. 무슬림들을 사랑으로 품고 할렐루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게는 확신이 있습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정말 부드러워져서 누군가를 끌어안고 운다면, 북한 사람도 같이 울 것입니다. 그런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아시아 최고 의사였던 장기려 박사님도 그저 병자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런 사람 10명만 있으면 한국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꽉 붙잡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1907년 대부흥도, 주기철·손양원 목사님도 다 환난 중에서 꽃핀 신앙이었습니다. 구약 사사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7번이나 몽둥이로 치셨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 70년을 몽둥이로 치셨습니다. 저를 포함해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일곱 달 동안 몽둥이로 맞으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 생각도 했습니다(웃음). 지금은 너무 편하니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명혁 박명수 대담 이성봉
▲김명혁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언젠가부터 강단에서도 재림 신앙이 사라졌습니다.

김명혁 목사: 몽둥이로 맞는 방법이 하나 있지만 그건 정 안 되면 하는 것이고,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예수님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길선주·이기풍 목사님 등 신앙의 선배님들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억지로라도 바라보고 배우려 해야 합니다.

제가 작은 교회들에 설교하러 가서 선배님들 이야기를 하면 너무 감동을 받습니다. 목회하던 시절에는 그 분들 후손을 교회로 데려와 간증을 하게 했습니다. 억지로 그렇게라도 한다면 순수한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자꾸 프로그램만 하고 시끄러운 음악만 하고 있습니다. 선배님들이 이랬다는 걸 좀 가르치면 좋겠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일구신 최자실 권사님이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과 삶을 흠모해서 아버지로 여겼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님도 이성봉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으셨죠.

박명수 교수: 최자실 목사님은 북한에 있었을 때부터 이성봉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최자실 권사님이 월남해서 사업을 하다 실패해서 삼각산에 가서 죽으려 했는데, 우연히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밑에서 이성봉 목사님이 부흥회를 하고 있으니, 죽더라도 참석하고 죽으라’고 했답니다.

참석했더니 이성봉 목사님이 죄에 대한 회개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때 자기 죄가 낱낱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보혈로 용서함 받은 것이 느껴지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고 하지요. 그렇게 신앙의 원점으로 돌아갔는데, 그 계기를 만든 분이 이성봉 목사님이셨습니다.

최자실 권사님이 그때 방언을 받았는데, 성결교회 여전도회장을 맡고 있었고 서울신학대학교로 진학하려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이 ‘방언을 인정하는 곳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순복음 쪽 신학교로 갔고, 거기서 조용기 목사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방언을 강조하진 않았지만, 그의 집회에서는 역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말씀보다 감성 중심으로 흐르고 있는데,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 메시지와 말씀 중심 사역을 계승하고 본받아야겠습니다.

김명혁 목사: 이성봉 목사님에게는 양면성이 있었습니다. ‘가슴은 뜨거워야 하지만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일제강점기 당시 재림 신앙에 대해 설교하셨다가 일본에 의해 검거되셨지요.

박명수 교수: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만 이야기하는데, 당시 더 큰 문제는 재림 신앙이었습니다. 일본은 천황을 ‘국체명징(國體明徵)’이라고 하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새로운 아시아 질서를 만들려는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웠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결교회는 중생·성결·신유·재림의 사중복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다고 하면, 일제가 보기에 논리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누가 진짜 주인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지요.

그래서 성결교회는 순수한 신앙생활만 한다 해도,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세상 정치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는 말기 재림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들을 많이 박해했습니다. 성결교회, 순복음, 안식교 다 문 닫게 했습니다.

일제 말 일본이 한국 기독교를 어떻게 봤는지 알 수 있는 당시 문서를 발굴했는데, 첫째가 재림 신앙이었습니다. 이를 불온 사상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신다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간다’고 하면 오히려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재림 후 천년왕국은 세상 왕국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요. 주기철·손양원 목사님도 재림 신앙을 분명히 믿었기에, 일본과 대립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과 신앙에 대해 정리해 주십시오.

김명혁 목사: 너무 귀중한 선배님이시고, 너무 보고 싶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순교하신 아버지와 어린 시절 주일학교 선생님들 다음으로, 이성봉·김치선 목사님 덕분입니다. 후에는 한경직·박윤선 목사님이 있었지요. 그 분들 덕에 지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세게 이야기하면, 이성봉 목사님은 제 젊은 시절을 만들어 주신 분입니다. 그 분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회개와 성결과 재림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죄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죄송한 마음 뿐이고,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