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의 본질 논쟁
속죄의 본질 논쟁

그레고리 A. 보이드, 토마스 R. 슈라이너, 브루스 R. 라이헨바흐, 조엘 B. 그린 | 김광남 역 | 새물결플러스 | 328쪽 | 17,000원

서론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고안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처형이었다. 로마는 자신의 체제를 따르지 않고 그들의 법에 불순종하는 국가적인 반역자들에게 이 형을 선고한다. 평범한 죄수에게는 선언하지 않고 국가수범에 해당하는 흉악한 죄인에게 내리는 벌이다. 그래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를 처형함으로 로마의 권력을 보여주고, 황제에게는 절대 순종해야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또한 유대교에서도 신명기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법이 있었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들의 종교를 흔들고 허무는 자와 외세의 힘을 빌려 민족을 위협하는 자는 나무에 죽인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와 헤롯이 전에는 원수였으나 예수님의 사형에서는 하나가 되었듯, 로마의 심판을 지지하며 예수님을 향해 자신들의 종교와 신앙으로 십자가 죽음을 적극 찬성한다.

이렇듯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와 죽음의 상징이다. 고대 앗수르에서 패잔병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공포의 도구가 로마까지 이어져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사형 제도가 되었다. 유대교에서도 율법으로 정해진 저주받은 자가 죽어야 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이런 죽음의 십자가가 오늘날 생명의 상징이 되었다. 고대의 십자가 이미지와 오늘날 십자가 이미지는 하늘과 땅 차이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인데, 이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너무 깊고 풍성하다.

본론: 책 내용

책을 보면 기독교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십자가의 의미를 4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보통 대부분의 성도들은 십자가를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지고 죽으셔서 우리를 깨끗케 하셨다는 것이다. 이 형벌대속론이 모든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진리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인류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이후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고 유화시킬 대속자가 필요한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

이 형벌대속론은 죄의 심각성과 죄의 비참함을 알려주고 죄가 얼마나 강력한지 우리에게 경고한다. 인간의 악한 상태와 영혼의 부패함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찾을 수밖에 없고 주님을 향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 이론이 최근에는 신학계와 페미니스트와 소수주의자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이 우주적인 아동학대자이고, 하나님의 근본적인 성품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신학을 반영한 것이지, 성경적으로 설득력은 약하다. 이미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유기의 경험을 하셨고, 삼위의 하나님은 같은 고통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비폭력으로 폭력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신학계에서는 이제 더 이상 효력이 떨어진 형벌대속론이지만, 다시 한 번 교회 안에 강하게 역사해야 될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자기부정과 자아의 죽음이 사라지는 교회 안에 이 신학이 더 생생하게 역사하여 하나님의 되심과 인간됨이 나타나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승리자 그리스도론이 있다. 이 관점은 인간의 죄용서와 구원으로 협소하게 나타나고, 때로는 자기 구원에만 함몰될 수 있는 십자가를 우주의 중심에 세우는 역할을 한다.

그 동안 전통적인 교회는 십자가로 죄용서를 받고 천국을 가게 됐다는 얇은 십자가와 복음을 가르쳐 왔다. 이런 십자가 신학이 성도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었어도 온전한 구원은 약하게 하였고 성도의 신학과 삶을 이기적으로 만든 역할도 했다.

그리하여 이 죄 용서의 십자가는 성도의 목적을 반만 제시했다. 그러나 이 승리자 모델은 십자가를 개인의 중심이 아닌 우주의 중심에 세운다. 인류의 타락 후 이 세상의 신과 임금인 사탄이 점령하게 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그들의 권세를 물리친 것이다.

자기 구원을 넘어 우주의 회복을 위해 십자가를 높이 든다.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로 마귀를 멸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성취해 가신다.

이 승리자 모델이 우리에게 은혜와 도전이 된다.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선교적인 삶을 살도록 제시한다. 형벌대속론은 십자가로 예수님의 사역을 제한하는 약점이 있지만, 승리자 모델은 예수님의 사역과 공생애를 연결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이 땅에는 상대적인 어둠의 세력이 잔존하는데 너무 쉽게 그 세력이 제거됐다 가볍게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이 하나님과 사탄의 나라가 충돌하는 것으로 비성경적인 해석이 아쉽다.

그리고 치유론이 소개된다. 이 이론은 죄로 인해 인간과 피조세계가 전부 병들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 인간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나고 불신하게 되었다.

또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난무하고, 사회는 갈등과 모순과 불안이 증폭된다. 개인적으로도 자신을 너무 긍정하는 교만과 비하하는 열등감이 생기고 가정에도 불화가 만연하고 이혼하는 일들이 더 많아진다.

이 이론으로 죄의 심각성과 죄로 인한 인류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망가진 인간과 세상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사역을 깊이 경험할 수 있다.

더구나 요즘처럼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피폐하고 허기진 시대에 주님의 치유의 은혜는 더욱 요구된다. 아울러 성령님은 시대마다 자신의 역할에 예언과 십자가와 기적 등으로 집중하신 면이 있는데, 현대에 십자가를 통한 성령님의 치유와 고침과 회복의 사역은 더 확대돼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만화경론이다. 이 주장은 십자가의 주제는 하나로만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입체적이어서 승리와 치유와 형벌대속과 제자도와 화해 등 다양한 면으로 볼 수 있다.

그 동안 십자가의 의미가 한 가지로만 부각이 되고 십자가의 풍성함이 약해진 면이 있는데, 십자가의 다양한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융통성 있는 주제이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십자가를 찾아 다양한 안경을 가져보는 것도 유익해 보인다.

십자가 기도
▲ⓒPixabay
사탄의 체제를 헐라

필자는 <속죄의 본질 논쟁> 속 각 신학자들의 주장이 정확하고 그 성경적 근거와 이유도 타당해 보였다. 그들의 공격은 정곡을 찔렀고, 그들의 방어는 견고해서 어느 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성경 본문에 따라 그 십자가의 의미를 탄탄하고 풍성하게 전달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두 가지만 전하고자 한다. 우선 십자가 형벌대속론은 오늘날 번영신학과 소비신앙과 복음을 판매하는 교회에 꼭 필요한 주제다. 인간의 본성과 악함과 죄의 비참함과 영혼의 부패함은 인간이 깨달아야하고 그로부터의 구원을 외쳐야만 한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형벌대속론이 신자의 마음과 평안과 위로와 만족을 주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될 것이다. 만약 그 정도의 마취로 끝나는 주제라면 사탄이 주는 달콤함에 미혹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그 정도의 은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의 사역과 삶을 단절하는 약점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해 오셨는데, 그 온전한 통치의 사역은 십자가로 끊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연결돼야 한다.

그리하여 십자가가 대속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유와 통치를 가져오게 하는 기폭제가 돼야 한다. 사탄의 체제를 정복하고 죄로 굽은 것을 바르게 하고 병든 것을 치유하는 혁명적인 사건이 돼야 한다.

내 영혼의 평안만 비는 도구가 아니라, 이웃과 사회의 평안을 이루어 가는 예언자적인 도구가 돼야 한다. 그리하여 이 십자가는 어둠의 나라를 쫓아내고 평화의 나라를 오게 하는 깃발이 되는 것이다.

이 성전을 헐라

그리고 또 하나는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당시 부패한 권력의 집합체였던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은 성전 된 자기를 향해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은 꼬리표가 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까지 주님을 조롱하는 말이 되었다.

당시 성전을 인간이 주인된 장사판으로 만들고 탐욕의 놀음판으로 만든 것은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가들이었다. 그러면 그 성전을 정화시키고 새로운 예배당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성전을 더럽힌 장본인들을 찾아 죄를 묻고 처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패한 성전을 새롭게 하기 위해 죄인을 끌어내라 하지 않고, 성전을 헐라고 하신다. 그리고 요한은 설명하기를 이 성전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한다.

어두워진 세상을 밝히는 방법은 복수와 폭력과 전쟁이 아니었다. 세상 죄를 지고 어린양처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치유와 회복과 거룩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성전을 새롭게 하기 위해 친히 죽으셨고 삼 일만에 부활하시고 승리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자주 희생해야 하고 피해자가 돼야 한다는 말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러한 방법은 가해자가 더 큰 소리 치게 하고 약한 자는 더 피해만 보는 불의한 체제를 더 견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설 때 나를 죽이라고 하신 말씀에 숙연해지고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비폭력의 길이자 죽음의 길임을 떠올리게 된다. 너무 어려운 길이지만 이 십자가만이 지금도 인류의 평화를 사랑을 가져오는 유일한 길임을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인 것 같다.

방영민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