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윤
▲허정윤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과 현대적 해석(2)- '라키아'(궁창)의 실체적 이해

모든 문헌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저자가 서술할 당시에 가졌던 경험적 인식을 분석하면서 진행된다. 저자의 서술은 경험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모순적 서술 역시 저자의 경험적 인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저자의 경험적 인식이 비록 표면적 서술에는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서술의 행간에 또는 서술의 배경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현대적 해석은 이런 것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창세기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거부한다면, 창세기는 과학주의 시대의 현대인들로부터 고대 히브리인들의 신화로 취급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가 창세기의 모순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고전적 문자주의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창세기의 모순으로 인하여 점점 배척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현대인들은 기독교가 믿는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창세기의 저자 모세의 모순적 서술과 관련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제대로 따르지 아니했다는 증거는 모세 자신이 토라에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민수기 20: 8절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민족이 신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마실 물을 찾지 못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회중 앞에서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고 심판하셨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도 손에 쥔 지팡이를 잘못 사용했을 정도라면, 하나님의 창조명령과 그가 보여주신 창조사건들의 환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기억했을 것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모세는 환상 중에 듣고 본 하나님의 창조명령과 환상을 그의 경험적 인식 수준에서 이해했을 뿐이라고 본다. 그리고 모세의 기억도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창세기는 모세가 환상 중에 보고 듣고 이해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된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모세가 서술한 창세기는 그대로 고대 히브리인들의 창조론이 되었고, 문자주의 해석에 빠져 있는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아직도 그것을 오류가 없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우주와 지구에 대한 지식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또는 거짓말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토라를 하나님이 주신 경전으로 믿고 있었던 유대교 랍비들이 이제는 오히려 토라의 현대적 해석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유대교와 토라를 공유하고 있는 기독교가 현대와 미래 시대에도 존속되기를 바란다면, 기독교인들은 창세기에서 모순되는 서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해서는 아니 된다. 창세기 첫 구절에서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선포는 모세가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증언하는 서술이다. 이 말은 모세가 창세기를 한 마디로 요약한 말이지,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창세기의 '처음에'서부터 둘째 날의 서술까지를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다시 설명해보기로 한다.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하여 가던 중 어느 날 밤에 모세는 잠자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사건을 히브리 민족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모세를 꿈속에서 들어 올리셨다. 모세는 캄캄한 흑암 속에 하나님의 영(루아흐 엘로힘)과 같이 있었다. 모세는 아무 것도 없고 텅 빈 흑암 속에 있었다. 모세에게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들렸다. 그러자 흑암 속에 있던 모세에게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모세가 처음 본 것은 깊은 물밖에 없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과 같이 그 물을 내려다보았다. 모세는 그가 살고 있는 땅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 땅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빛을 낮으로, 흑암을 밤이라고 부르셨다. 낮이 가고 흑암과 같은 밤이 왔다. 환상을 보고 있던 모세는 그대로 잠들었다. 환상 속의 잠에서 깨어난 모세에게 보이는 것은 아직도 물밖에 없었다. 모세에게 '라키아가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하나님이 둘째 날의 창조를 시작하셨다. 모세가 알고 있는 '라키아'는 얇게 두드려 만든 얇은 판이다. 모세는 물속에서 '라키아'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 그 말씀을 듣고 모세가 눈을 들어보니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은 밑에 있는 물과 같은 빛깔이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알고 있는 모세는 그 색깔을 보면서 하나님이 물속에서 '라키아'를 만들어 펴시고 그 위에 있는 물을 그대로 하늘 위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했다.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곰곰 생각하는 중에 밤이 왔다. 모세는 환상 속에서 다시 잠들었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 자기의 경험적 인식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던 모세는 '라키아'를 하나님이 물을 담아 하늘 위에 투명하게 펼쳐놓은 유리 지붕처럼 생각했다. 하나님은 '라키아'를 '샤마임'(하늘)으로 규정하셨지만, 그 효력은 셋째 날까지만 유효했다. 넷째 날에는 '라키아 하샤마임'(하늘의 궁창)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라키아 하샤마임'에는 광명체인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곳이고, 낮과 밤, 그리고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나타나는 곳으로 시공간적 의미로 확장된다. 그리고 다섯째 날에는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이 된다. 모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라키아'를 잘못 이해하고 서술함으로써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빗나가게 되었다. 어쨌든 모세가 창세기에 서술한 '라키아'는 고대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 것이다.

모세의 서술에 영향을 받은 에스겔 선지자는 '라키아'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에스겔은 '그 살아 있는 창조물의 머리들 위에 있는 라키아(궁창)의 모습은 무서운 수정 색깔 같았으며 그들의 머리들 위로 펼쳐져 있더라'(겔 1:22)고 말했고, 또 '그룹들 머리 위 궁창(라키아)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의 형상 같더라'(겔 10:)고도 서술했다. 에스겔은 에스겔서 곳곳에서 '라키아'(궁창)가 하나님의 보좌 밑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시편과 다니엘서에는 '라키아'를 하나님의 '권능의 궁창'(시 150:1)과 '궁창의 광채'(단12:3)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에 따라 점차 '샤마임'과 '라키아'의 사용이 구분되어졌고, 의미도 달라졌다. 모세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은 밑의 물을 먹으며 살고 있는 피조물들의 하늘 위에 '라키아'가 있고, 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들과 하나님은 그 위의 물을 먹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영향은 그리스어성경을 번역한 현대 히브리어 신약성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라키아'를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한글 번역문에서는 대개 공중(空中)이라는 말로 되어 있으나(계 8:13, 14:6, 19:17), 공기(空氣)로 번역된 곳도 있다(계 9:2). 고린도후서에서는 셋째 하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12:2).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의 재림을 영접하는 곳으로 쓴 '라키아'를 공중이라는 말로 번역했다(4:17). 오늘날에도 궁창이라는 말은 강의와 설교 등에 자주 인용된다. 그 대표적 구절은 '하늘(하샤마임)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하라키아)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2)이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읽으면 '라키아'에 대한 오해는 더 많이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라키아'가 아닌 다른 말까지 궁창으로 번역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성경에서는 히브리어 שחקים(셰하킴)을 '궁창'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셰하킴'은 '잘게 부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שחק (샤하크)의 복수 명사형이다. 그런 뜻에서 먼지나 구름 등을 의미한다. '셰하킴'이 궁창으로 처음 번역된 구절은 신명기 33:26절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샤마임)을 타시고 궁창(셰하킴)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이다. 여기서 '셰하킴'은 구름으로 번역해야 맞다. 한글로 번역된 욥기, 시편, 잠언,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아의 예언서에는 '셰하킴'을 거의 모두 궁창으로 번역하고 있다. '셰하킴'과 '라키아'를 비교하여 가장 잘 알 수 있는 구절은 תרקיע עמו לשחקים חזקים כראי מוצק׃ [타리키아 이모 라셰하킴 하나킴 키레이 모자크](욥 37:18)이다. 개역성경에서 '네가 그와 함께 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로 번역된 이 구절에는 '라키아'에 접두어 '타'를 붙여 의문형 동사 '타리키아'(펼 수 있느냐)가 있고, '셰하킴'의 목적격 명사 '라셰하킴'도 있다. 어쨌든 '셰하킴'은 구름이나 먼지 등을 뜻하고, '라키아'는 한정적으로 두들겨 펴서 얇게 만든 것을 의미한다. 개역개정판에서는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라고 번역하여 '셰하킴'을 구름장들로 해석한 본문을 보여주고 있다. 이사야 40:22절 앞 구절은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궁창은 חוג הארץ이며 땅의 구(球)라는 뜻이다. 이 구절의 영어 번역을 보면, the circle of the earth로 번역하고 있다. 어떻게 이 말을 궁창이라고 번역하여 혼란을 초래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한글성경의 실상이 이러함에도 문자적 해석을 강변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아무 성경이나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오히려 왜곡된 해석과 이단적 교리를 조장하고 있다.

둘째 날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의 의미는 하나님이 만드신 얇은 판 또는 막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과학에서 '라키아'에 공명하는 개념은 지구의 대기권을 둘러싸고 있는 중력장이다. 중력장은 지구의 중력에 의해 만들어져서 보자기처럼 지구의 대기를 감싸고 있다. 그러므로 중력장은 지구의 바깥으로 뻗어나가서 대기를 싸고 있는 막과 같다. 대기는 중력장이 만드는 대기권 안에서 보존되어야 한다. 대기는 지구에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지구의 대기는 중력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고, 중력이 약해지면 대기권도 바로 파괴된다. 그러므로 둘째 날의 '라키아'는 대기권을 안정적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중력의 힘이 만들어내는 막이다. 지구에 대기권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중력이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지구에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둘째 날에 대기권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대기를 둘러싸고 있는 중력의 막을 '라키아'라고 하셨고, 그 밑에 형성된 대기권을 하늘(샤마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가 자기의 경험적 인식에 의하여 하나님이 '라키아' 위에 물을 올려놓으셨다고 서술한 창세기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 위에 물이 있고 하늘의 창이 열리면 비가 내리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현대인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현대적 창조론은 진리의 기준을 사실성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 창조론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론이 서술된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해석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음 이야기는 셋째 날의 창조에 대해 논의하기로 한다. (계속)

허정윤(Ph. D. 역사신학, 케리그마신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