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yrdom of Saint Sebastian(1525), by Il Sodoma(1477-1549)
▲Martyrdom of Saint Sebastian(1525), by Il Sodoma(1477-1549) 기둥에 묶인 채 화살에 맞는 이 사람은 세바스티아노라는 인물이다. 3세기 말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갈리아 출신인 그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친위대였으나, 기독교인이 된 후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감옥으로 들어오는 기독교인을 돕곤 했다. 이내 그의 개종 사실이 밝혀지자, 기둥에 묶어 화살을 쏘도록 한 것이다. 한 여성의 극적인 도움으로 살아났으나, 그는 계속해서 도리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인 박해를 꾸짖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태형에 처해진 뒤 하수구에 버려진다. 군인이 안 되겠다고 해서 죽은게 아니라, 신자를 지키다 죽은 군인의 이야기이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단체의 정확한 명칭은 Jehovah’s Witnesses로, 이사야 43장 12절(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서 추출한 명칭이다.

19세기 말 찰스 테이즈 러셀이라는 인물에 의해 처음 조직된 이 단체는 ‘성경 연구 모임’에서 확산된 단체로, 미국에서의 법인명 자체가 <워치타워성서‘도서’협회>로 알려져 있다.

이들과 일반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는 대개 ‘삼위일체, 지옥형벌, 영혼불멸성… 부정’ 등 교의적 문제에서 찾지만, 가장 주요한 신학적 이질성은 ‘예전(Sacrament)’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도서)단체이다. 기독교의 한 종파로 아는 것은 그릇된 이해이다.

흔히 “여호와의 증인 교회에서는 교인들의 울부짖음이 없다. 광신적이지 않다. 그래서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예배’가 아닌 까닭이다. 그냥 ‘회집(모임)’이요, 그리스도의 몸을 체현하는 설교가 아니고 그냥 강연이자 토론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모임을 보호하는가.

현금 십일조가 없는 대신 시간의 십일조/봉사의 십일조라는 게 있어, 의무 시간을 포교하는데 바쳐야 한다. 특별한 직무자는 무려 월 140시간을 채워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조직을 지켜주는 강력한 금제로서, ‘출교’를 들 수 있다. 출교되면 그 자는 멀리해야 한다. 개신교처럼 ‘니네 교회말고도 교회 많어!’ 이게 아니다. 그렇기에 소속하려는 대상을 찾기가 어려워 그렇지, 한 번 소속되고 나면 구속력이 센 것이다.

이들의 신심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슈는 수혈거부와 병역거부일 것이다. 수혈거부는 자기 하나 죽으면 그만이지만, 병역거부는 보다 더 큰 사회 문제로서 이번에 대법원에서 인정받음으로서 그 파급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책’의 근거로는 다음 서너 가지 본문 정도일 것이다. 보면 알겠지만 해당 부분에 대한 ‘문자적 해석’ 일색이면서도, 그렇다고 전체를 또 문자 해석하는 것도 아니다.

1. 이사야 2장 4절 (마 26:52)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주님이 가라사대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눅 22:36)”라는 명령은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모양이다.]

2. 요한복음 13장 34-35절 (요일 3:10-12)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총 들고 지켜주는 건 ‘서로 사랑’이 아닌가?]

3. 요한복음 17장 16절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이 마지막 게 가장 어이없는 대목인데, 자기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애 낳고 사고 팔고 장사도 하고 할 거 다하면서, 그 근거로는 또 이런 구절들을 댄다.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롬 13:1).”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라(마 22:21).”

한 마디로, 양심이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는, 현재 세계적으로 병역 문제로 제재를 받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통계를 들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
▲여호와의 증인 홈페이지 속 2018년 10월 기준 수감자 통계. ⓒ홈페이지 캡처

2018년 10월 현재,

아프리카 에리트레아 53명,
러시아 25명,
싱가포르 9명,
투르크메니스탄 11명,
끝으로 한국은 무려 117명이다(한국 여호와의 증인 집계 수감자 수).

한국의 수치는 인구 5백만의 투르크메니스탄에 비해서는 비슷한 비율이고, 인구 1억 5천만의 러시아에 비해서는 상당히 큰 비율이지만, 북한만큼이나 인권이 없는 불과 인구 3백만의 에리트레아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은 수치이다. 즉, 신앙도 그리 좋다 할 수 없는 수치인 것이다.

게다가 투르크메니스탄과 에리트레아는 독립전쟁과 박해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고, 우리나라는 휴전에다 최고의 인권국임을 감안할 때, 그리고 본래 쟁점은 ‘전쟁 참여 거부’인데 우리나라 여호와의 증인에게서만은 유독 ‘병역거부’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참조할 때, 이는 양심의 증거라기보다는 비양심의 증거라 할 수 있다.

(대체 항소심과 상고심 등 상급 재판을 왜 청한건지 알 수가 없다. 박해당하지 않고.)

우리말로 양심은 ‘어진 마음(良心)’이라 쓰는 바람에 ‘선한 마음’ 따위로 그릇된 전제를 불러일으키지만, 양심은 맹자의 술어일 뿐이며, 한자 문화권에선 ‘의식(意识)’을 일컫는 말이다. 서구의 한자 격인 그리스어에서도 ‘함께(σύν)+본다(εἴδω)’는 뜻에서 비롯된 ‘양심/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와도 뜻이 통하는 셈이다.

한 마디로 양심은 착한 마음이 아니라, ‘아는 것’인 셈이다. 라틴어에서도 양심(conscio)은 ‘함께(con) 알다(scio)’이다. 즉 우리나라 여호와의 증인만 그냥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 따름이다.

끝으로 이들의 가장 큰 비양심은 자신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선사한 이사야 선지자는 정작 히스기야 왕 때 전쟁에서 항복하지 말고 버티라고 독려하였으며, “여호와”라는 신명 자체가 세상에 알려지기를 ‘전쟁의 신(יְהוָה גִּבֹּור מִלְחָמָֽה)’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한다는데 있다. 양심이 없는 것이다.

이 종교는 우리나라에 1912년에 처음 들어온 것으로 주장은 하는데, 불확실하다.

YOUNG JIN LEE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