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개혁주의 입장으로 본 철학과 신학의 역사

입력 : 2018.11.04 17:33

[크리스찬북뉴스 서평] 이제야 번역된 역작

서양 철학과 신학의 역사
서양 철학과 신학의 역사

존 프레임 | 조계광 역 | 생명의말씀사 | 1,107쪽 | 67,000원

역사적 개혁주의의 전통을 잇는 한 권의 걸작이 탄생했다. 존 프레임의 <서양 철학과 신학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큰 획을 그은 철학과 신학을 역사적 개혁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들려준다. 역사적 개혁주의는 동일한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개혁의 정신만을 중요시하는 열린 개혁주의와는 차별된다.

역사적 개혁주의는 칼빈과 베자, 투레탄, 핫지와 벌코프를 이어 반틸로 이어지는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과 보수적 관점을 지향한다. 존 프레임은 변증 학자인 코넬리우스 반 틸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으며, 철저히 칼빈의 성경해석관을 따른다. 우리는 이 책을 읽어 나갈 때, 반드시 반 틸의 전제주의를 염두에 두고 읽어 나가야 한다.

존 프레임의 출간서적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P&R(개혁주의신학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신학 시리즈 4권이 번역 출판된 바 있다. 존 프레임은 이곳에서 기독교 윤리학, 신론, 성경론을 집필했다. 그의 조직 신학관을 엿볼 수 있는 <존 프레임의 조직신학>이 2017년 부흥과개혁사를 통해 번역되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총신대출판부, 2000)는 ‘Worship in Spirit and Truth’를 번역한 것으로, 성경적 예배관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 이전에 은성출판사에서 <기독교적 신지식과 변증학1(1989년)>이 번역 출판한 적이 있지만 오래 전 절판돼 구할 수 없다.

번역된 대부분의 책이 교리와 기독교 윤리에 관련된 것이지만, 저자 자신은 철학이 결코 낯설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저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웨스트민스터에서 반 틸에게 철학적 변증학을 배웠다. 또 예일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적 신학을 연구했다(36쪽).

이러한 저자의 이력은 철학적 신학 또는 신학의 관점에서 철학을 바라보는데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증거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1987년 출간된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에서 제시한 기독교 인식론의 확장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 13장으로 구분했다. 1장은 ‘철학과 성경’이란 제목으로 서론에 해당된다. 저자는 이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소상히 설명한다. 1장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2장부터 12장까지는 철학의 역사와 신학을 역사적 개혁주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런데 3장에서 ‘초기 기독교 철학’을 다룬다. 속사도와 변증가들인 유스티누스,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게누스와 아타나시우스를 다룬다. 마지막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이렇게 보면 3장과 13장은 기독교 철학을 소개하는 동시에 세속적인 철학과 비교한다.

2장 헬라 철학을 마무리하면서 프레임은 “기독교의 관점과 헬라 사상의 관점을 결합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151쪽)”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과 계시의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어거스틴보다는 테르툴리아누스에 가깝다. 역사적 개혁주의가 갖는 가톨릭에서의 개혁과 분리, 그럼으로 인해 계시의 독립성과 우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기독교의 관점과 헬라 사상의 관점을 결합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헬라 사상가들이 실패에 부딪쳐 제기한 질문들과 세부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 드러낸 통찰력을 통해 상당한 지식을 깨우칠 수 있지만 그것을 이성적인 자율성의 개념이나 형상과 질료의 체계를 포괄적인 세계관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151쪽)”.

로마 제국 콜로세움 고대
▲ⓒunsplash.com
존 프레임의 주장은 확고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세속적인 철학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추측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계시 없이 명확한 이해는 불가능하며, 세속적인 철학의 관점을 세계관을 위한 전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존 프레임은 초월과 내재에 있어 성경적 관점과 비성경적 관점을 부정하지 않고 구분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초월이 ‘하나님의 통제와 권위’라면, 비성경적 관점에서는 ‘하나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내재의 경우, 성경적 내재는 ‘하나님의 언약적 임재’인 반면, 세속적 내재는 ‘하나님과 세상은 구별할 수 없다’는 범신론적 관점을 취한다.

존 프레임은 한 발짝 더 나아가 하나님은 “온전히 감추어져 있으면서 또 온전히 계시되었다(79쪽)”고 주장하는 열린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칼 바르트와도 구별한다.

저자의 이러한 관점은 3장 ‘초기 기독교 철학’에서 예루살렘과 아덴(아테네)을 구별했던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좋은 점수를 준다는 점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유스티누스의 창조론은 “영지주의의 창조론과 비슷하다(167쪽)”고 말한다.

이레니우스의 경우는 “하나님의 계시를 철학적 인식론의 기준으로 삼았다(172쪽)”고 말하지만,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녔다. 죄와 유한성을 혼동한 점, 구원을 속죄가 아닌 성육신의 관점으로 해석한 점, 인간의 신격화에 대한 염려스러운 암시가 보인다는 점 등, 그는 이레니우스가 “유스티누스처럼 자유의지론적인 자유의 개념을 받아들였다(173쪽)”고 주장한다.

그러나 테르툴리아누스의 경우 “죄를 형이상학적인 기능 장애(존재의 결핍)으로 설명한 것(177쪽)” 외에는 바른 성경적 인식론을 지녔다고 말한다. 개혁적인 성향이 짙었던 아타니시우스는 “루터와 흡사했다(188쪽)”고 말하며, 칼빈과 같은 개혁자로 묘사한다.

‘암흑의 시기’로 알려진 중세는 기이하게도 기독교적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다. 그러나 불행히도 철학과 신학은 계시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을 통한 합리성을 추구했다.

중세를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단지 인과성이나 탁월함이나 제거의 개념을 통해서만 그분의 본질을 알 수 있다(249쪽)”고 말했다. 철저한 합리론자였던 아퀴나스에게서 실존주의의 전조가 읽히는 것은 기우(杞憂)일까? 거두절미하고 존 프레임의 이야기의 평가를 들어보자.

“간단히 말해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신 것처럼 자연 이성의 영역에만 우리 자신을 국한시켜 신적 인과성과 완전성을 추론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성경적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으면, 아퀴나스가 제시한 합리적인 논증은 성립될 수 없다(251쪽)”.

안셀무스와 둔스 스코투스 역시 하나님의 계시를 의존했지만, 이성을 이용한 합리적 추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존 프레임은 아퀴나스보다 스코투스가 신학을 과학보다 우위에 두었으며, 철학과 신학을 좀 더 분명하게 구분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스코투스가 여러 면에서 아퀴나스보다 성경적인 바탕을 사용하고 있지만, 주지주의로 인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254쪽)”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중세 이후, 기독교 세계는 혼란과 혁명적 변화의 시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철학은 중세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경험과 이성이라는 양 극단의 관점에서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존 프레임은 6장에서 8장에서 종교개혁 이후에서 쇠렌 키에르케고르까지 다룬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가 포문을 열기 직전, 기독교 신학은 소위 자유주의 학자들이 등장하여 성경의 권위를 이성으로 짓밟아버린다. 리츨이나 하르낙과 같은 자유주의 학자들은 비평학을 통해 성경이 ‘거짓’일 수 있다고 전제하고 끊임없이 ‘원본’을 탐색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존 프레임
▲존 프레임 박사. ⓒlajulak.org
19세기 중반 이후, 철학과 신학은 요동친다. 니체와 같은 극단적인 종교의 거부, 존 듀이와 같은 실용성 추구, 후설과 같은 현상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 일어난다. 이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탈종교화’이다.

탈종교화 현상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양상을 만들어 낸다.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왕성하게 일어난 반면, 칼 바르트와 같은 정통주의로의 회귀가 그것이다. 루돌프 불트만은 양식 비평과 비신화화, 실존적 분성을 통해 성경을 새롭게 해석해야 할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불트만의 이러한 비신화화는 실존주의 철학에 종속되어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세속적인 측면에만 몰두한 결과이다.

불트만의 게쉬히테의 비역사적 역사해석관은 18세기 비평의 열매이자, 20세기에 일어날 후기 구조주의와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연결하는 가교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철학 사조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소외시킨다. 그들은 아직도 “미래에 대한 확실성은 존재하지 않는다(719쪽)”고 말할 뿐 아니라, “신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계명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믿음의 용사들을 사용하여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신다.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철학과 신학을 성경적으로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또한 저자의 주장처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세상을 해석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소위 자유주의 학자들이나 철학에 대해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테르툴리아누스보다는 어거스틴이 옳다고 믿는다.

저자는 마지막 13장에서 ‘최근의 기독교 철학’을 다루면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자들을 언급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이베르트, 고든 클라크, 코넬리우스 반틸을 살펴보면서, 반 틸의 ‘전제’를 옹호한다. 전제는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에 종속되어야 한다(754쪽)”는 것이다. 저자는 플랜팅가의 외재론적 인식론보다 반틸의 전제주의를 더욱 좋아한다고 밝힌다.

부록까지 합하면 1천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나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놓기 힘든 책이다. 반틸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지나친 보수주의자가 아닐까 했지만, 서술 방식은 흥미롭고 진지했다. 불필요하게 비판적이지 않으면서, 적당한 조언과 비평이 어우러진 책이다.

기독교 역사와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철학을 비평적으로 바라보고, 전통적 계시관으로 세계를 조망하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조언자가 되어줄 것이다. 다양한 철학과 사조가 망라되어 있어서 더 깊은 연구와 공부를 하고 싶은 이들에게 가이드 역할도 충분히 되어 주리라 믿는다.

필자는 10장부터 이어지는 현대신학과 신학자들을 보수적 관점에서 엿볼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이제야 번역돼 나왔다는 것이 아쉽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오래 전에 나왔어야 할 책이다. 부디 이 책을 통해 바른 성경관에 입각한 철학과 성경의 세계를 체험해 보길 바란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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