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최재건 박사(하버드대학교 Ph. D. 연세대학교 교수 역임)의 논문 '삼일(3.1)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을 매주 한 차례 연재합니다.

3.1운동 이방인
ⓒ한민족평화나눔재단
2) 3.1운동의 전개와 교회의 역할

(1) 3.1운동 발발의 배경과 준비

1918년 미국 윌슨(T. W. Wilson, 1856-1924)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발표한 평화원칙 14개조를 통해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하였다. 샤록스(Alfredd M. Sharrocks, 謝樂秀) 선교사에 의해 이 소식을 접한 안창호, 이승만, 정한경 등은 국권 회복의 소망을 가지고 대한인국민회 총회(1912)와 흥사단(1913)을 통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독립 건의서를 보냈다. 중국에서도 김규식, 선우혁, 여운형, 서병호 등은 민족자결주의에 공감하고 활동을 펼쳐나갔다. 또 다른 외적인 요인은 1917년에 러시아 공산혁명의 여파가 인근 국가들로 팽창해 간 것이었다. 사회주의 혁명노선에 민족독립의 희망을 걸고 이런 동기에서 전향한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도 있었다. 북한 학계는 3.1운동이 실제로 이런 것에서 연유되었다고 주장한다. 3.1운동을 발발시킨 직접적인 도화선의 하나는 고종황제의 승하였다. 황제가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전갈을 파리강화회의에 전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이 죽였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또 하나의 도화선은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 1919년 2월 8일, 재일 한국 YMCA 총무 백관수를 비롯하여 송계백, 서춘, 김도연 등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600여명의 한국유학생들이 모여 윤창석목사 주재 아래 도쿄YMCA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대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운동을 확대해 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3.1운동이 발발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 민중의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조선인들에게 일제는 임야조사사업, 토지조사사업을 벌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많은 땅을 수탈하였고, 회사령을 통해 경제생활을 통제하였다. 사법 처우와 행정기관의 차별대우도 심하였고, 언론, 집회, 결사 자유도 박탈하였으며, 해외여행도 제한하였다. 종교행사는 가질 수 있었지만, 목사의 설교는 요시찰의 대상으로 삼았다. 마약의 유포와 공창제도를 도입하고 유곽을 설립하여 청년의 도덕적 퇴폐를 유도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천황제도의 확산을 위한 신사(神社)의 설립, 일본의 조합교회가 늘어가도록 방조하였다.      

최재건
▲최재건 박사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은 비슷한 시기에 은밀히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기독교 진영 안에서 서북지역의 시위는 장로교 측을 중심으로 준비되었고, 서울지역의 시위는 주로 감리교를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학교 학생대표들도 독립운동에 동조하였다. 이들은 서북지역의 이승훈계와 연대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기독교 인사들과 3차에 걸쳐 회의를 하고 천도교 측과 연합하기로 하였다. 일각에서 기독교 단독으로 하자는 안도 제기되었고, 폭력 비폭력의 문제, 교리적인 문제로 연합활동에 반대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거족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르기로 하였다. 마지막 단계에서 불교 측의 한용운도 참석하여 복수의 종교가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기독교 측의 대표는 길선주를 비롯해서 33인 중 16인이나 되었다. 비서명자 민족대표 48인 중에서도 과반인 2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거사일은 고종황제 인산일인 3월 3일을 피하고 주일인 2일도 피하기 위해 3월 1일 토요일로 정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