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우리는 신을 믿을 수밖에 없어야 하고, 믿어야 하는 것”

입력 : 2018.11.01 00:09

[기독교 문학을 만나다 28] <파이 이야기>, 표류하는 인간

파이 이야기
파이 이야기

얀 마텔 | 공경희 역 | 작가정신 | 400쪽 | 14,000원

10년 전 다닌 회사에서 나온 책을 어느 신학교에 배송할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 기술이 좋지 않았던지라 인터넷으로 학교의 위치를 확인하고 갔더니 보이지 않아,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서 간신이 찾아갔습니다. 대학교라 하기엔 작았고, 구석진 곳에 있었습니다.

이후 이보다 더 작은 신학교들이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실망했습니다. 아마도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열등감과 함께 위축된 마음이 들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다 생각하기를 ‘학교가 클 필요가 있는가?’ 물었습니다.

‘대학교가 외형이 크다(大)고 대학교인가? 생각의 넓이와 깊이를 크게 하는 곳이 대학교가 아닌가?’ 외형이 큰 학교를 다녔는데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이 편협하고 협소하다면, 그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게 아니라 ‘소(小)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이지만, 외형은 작은 학교를 다녔지만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시각이 크고 따뜻하다면 그는 ‘대(大)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이라 할 겁니다.

지금은 폐간된 월간지 <행복한 동행> 2011년 5월호에서 노은주 가온건축 소장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적당한 집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국토해양부에서 정한 가구당 최소 면적은 1인당 14㎡(4.2평)다. 우연히도 그것은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수변에 지었던 오두막의 넓이다. 그 집에 벽난로와 침대, 간단한 의자만 놓고 그는 2년 2개월 2일 동안 살면서 단순한 삶 속 깊은 성찰을 담은 책을 썼다(56쪽).’ 결국 한 사람이 생활하고 사유하는 데는 작은 공간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말합니다.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이 쓴 <파이 이야기>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열여섯 살의 소년 파이(원래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는 동물원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인도에 살다, 1970년대 후반 인도의 상황이 좋지 않아 동물들을 미국 대형 동물원에 팔아버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합니다.

배에 동물들을 태우고 가다 태평양에서 난파되고, 주인공 파이는 구명보트에 오랑우탄, 얼룩말, 하이에나, 호랑이와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하이에나가 오랑우탄과 얼룩말을 죽이고,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죽여, 구명보트에는 인간인 파이와 동물인 호랑이만 남게 되고, 227일 동안 표류하다 결국 횡단하여 캐나다에 도착하게 됩니다.

주인공 파이는 작은 구명보트에서 삶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14㎡(4.2평)이지 않을까 합니다. 저의 지나친 연결이지만, 그가 호랑이와 함께 227일을 견디면서 삶과 신앙에 대한 의지를 굳히게 하는 건 공간이 주는 역할도 있었을 겁니다.

만약 그가 큰 유람선을 타고 표류했다면 이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나올 수 없었고, 와닿지도 않을 뿐더러, 책으로 기획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작가는 파이를 통해 인생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소설을 구상할 때, 자연스럽게 ‘작은’ 구명보트를 떠올렸을 겁니다. 표류와 (작은) 구명보트는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흥미로운 건 표류하는 곳이 태평양이라는 점입니다. 지구상 가장 넓은 바다인 태평양에서, 자신과 호랑이만이 있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곳에 묶인 것이 우리와 닮았습니다.

표류를 삶으로 적용하자면 ‘방황’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방황은 늘 혼자입니다. 늘 작은 나에게서 이뤄지고 구석진 곳에서 행해집니다. 태평양처럼 넓은 세상의 구명보트처럼 작은 나를 발견하면서 이리저리 부유하는 모습을 방황이라 하고 표류라 합니다.

그런 방황의 과정, 표류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인생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 책은 주인공의 표류를 통해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또한 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파이는 힌두교인입니다. 그러다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나중엔 이슬람교까지 섭렵하게 됩니다. 각 종교의 성직자들에게 파이는 ‘독실한 신자’입니다.

그래서 초반에 이 세 종교의 성직자들이 파이를 두고 언쟁을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파이가 이렇게 세 종교를 섭렵하게 되고 어느 한 종교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그가 신 자체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관없다는 겁니다.

세상 어디에 가나 신을 믿습니다. 선진국이나 미개발국가든 말입니다. 2014년에 KBS에서 <히말라야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세계의 지붕’이라 하는 높은 지역인 히말라야에 사는 유목민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방송을 보면서 아주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이리저리 떠도는 유목민들은 어느 한 곳에 머물 때 천막을 치고 나서 안에 가장 먼저 설치하는 것이 부엌입니다. 그 다음에 설치하는 게 산당, 즉 신을 예배하는 처소입니다. 기독교로 보자면 예배당이죠.

그들은 항상 산당에 가서 자신들의 무사 안녕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장 높은 곳이든 가장 낮은 곳이든, 잘 살든 못 살든, 우리는 본능적으로 신을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절박하면 신을 찾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무신론자는 없다’는 말이 있는 겁니다. 순식간에 생사가 갈리는 곳에서는 누구나 신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 파이도 그렇습니다. 책의 중반에서 그가 배 안에서 하루 일과를 기록한 게 나오는데,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기도를 합니다. 수시로 기도하고 자기 전에는 꼭 기도를 합니다. 어느 신을 향한 기도인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는 늘 신을 의지합니다. 그의 일과 속 기도하는 대목을 보자면, 나보다 더 기도를 많이 하고 절실히 믿고 있다는 반성마저 듭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신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을 추천할 수 있다면 그건 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점입니다.

‘있다 없다’에 대한 논리가 아니라,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절실함과 당위성을 소설이라는 이야기 형태로 전하고 있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무신론자도 자연스럽게 유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출발점으로 좋은 책입니다.

파이 이야기
▲영화 속 <라이프 오브 파이>.
이 책에서 판타지적 요소가 등장하는 것이 맹수인 호랑이와 약한 인간이 공존한다는 겁니다.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고도 남는 게 정상인데, 이 둘은 끝까지 함께 합니다. 구명보트 안에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지만, 그것이 없는 좁은 곳에서 호랑이가 227일 동안 인간을 죽이지 않는다는 건 판타지입니다. 에덴동산이죠.

그러나 이건 작가가 가장 강한 동물과 약한 인간을 공존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다인 태평양과 작은 구명보트를 대비시키는 장치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판타지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 처음엔 의아해하지만, 진행되면서 적응하고 이해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왜 안 잡아먹지?’ 하다 둘이 계속 어울려 있는 모습을 읽으면서 ‘안 잡아먹을 수도 있지.’ 수긍하게 합니다.

영화 이야기를 안할 수 없는 것이 이 책은 이안 감독이 2012년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만들어 평단과 관개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도 160만 관객이 극장에서 봤습니다. 이 책의 감상평을 보면 영화 개봉 이후 봤다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은 2002년 맨부커상 수상작입니다. 맨부커상이 우리에게 낯익은 건, 2016년에 우리나라 작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같은 상을 받아 세간에 화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이렇듯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책입니다. 그래서 호기롭게 책을 집으면 약간 당황하게 되는 것이, 분량이 400쪽이나 되는 장편이고 내용이 그렇게 술술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본적으로 이 책은 재미가 없습니다. 더욱이 이 책으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보고자 한다면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죠. 주인공 파이와 호랑이가 작은 구명보트에서 227일을 표류합니다. 줄거리만 보자면 흥미로울 것 같은데, 막상 소설은 특별한 사건도 제시하지 않고 파이의 일과만 나열합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행성 화성에서의 생존기를 다룬 <마션>이 떠오릅니다. 물론, 이 책이 먼저입니다. <마션>도 비슷한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호랑이라는 위협적인 존재를 둬서 긴장감을 조성하지만 위에서도 밝혔듯, 호랑이가 인간을 잡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니 마음이 느슨해지고 각종 어류의 등장과 생존법 등을 나열하지만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은 떨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책이 그렇지만 특히나 소설로서 이보다 치명적인 단점은 없습니다. 종교적인 시각, 삶의 의미 등을 소설이란 장치에 버무려 놓아 상도 받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그런 포장이 아무리 재미없는 책도 몇십 페이지는 읽게 할 순 있어도 끝까지 읽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역시 상 받은 책은 재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더욱이 맨부커상을 한강의 <채식주의자> 자체도 호불호가 갈리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내용으로 보자면 괴기스럽고 재미로만 보자면 지리멸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항변할 수 있는 건 상 받은 책, 특히나 맨부커상의 수상작들의 특징은 내용이나 재미보다는 상황에 대한 문장의 접근법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 <파이 이야기>는 표류하는 인간의 심리를 어렵지 않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사람 이야기이고 심리 이야기입니다. 즉 소설을 잘 쓰려면 사람을 잘 알아야 하고 심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외롭게 사람의 심리를 문장으로 잘 구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재미를 추구하고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은 상은 둘째치고, 영화로 개봉되지 않았고 흥행되지 않았다면 이만큼의 인기는 없었을 겁니다. 특히나 소설은 영화와의 연계성이 얼마나 중요하고, 매출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선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는 위에서 살짝 언급했듯, ‘같이 할 수 없는 존재들의 같이 함’입니다. 호랑이와 인간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공존하기 위해선 철창 같은 인간을 보호하는 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설에선 담이 없고 이 둘은 같이 어울려 살게 됩니다. 판타지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현실을 꿈꿉니다. 같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신’이라는 일치된 이상향으로 같이 더불어 지내는 현실 말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위화감 없이 웃으며 같이 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배려하며 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신’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걸 이 책에선 말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주인공 파이는 멕시코에 도착하게 되고 일본 화물선 회사에서는 진상조사를 위해 파이를 인터뷰합니다. 파이는 227일간 겪었던 일들을 설명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판타지, 가짜라는 거죠.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파이는 완전히 다른, 현실적인 이야기를 ‘꾸며서’ 설명합니다. 그들은 그 가짜 이야기는 ‘그럴 수 있겠다’ 합니다.

‘있었던 가짜 같은 진짜 이야기보다, 없었던 진짜 같은 가짜 이야기’를 더 믿는 사람들. 그러나 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가짜 같은 일들을 겪으며 삽니다. 우리 삶 자체가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에 운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신을 부인한다고 신이 없는 게 아닙니다. 넓고 큰 신이 70억 명 이상이 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부인한다고, 자신이 할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부인해도 신은 자신의 일을 할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신의 것이고 신이 있어 모든 것이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을 믿을 수밖에 없어야 하고, 믿어야 하는 겁니다. 이 책은 그런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이성구(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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