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
루터의 종교개혁

김균진 | 새물결플러스 | 816쪽 | 43,000원

“그의 수많은 문헌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운 그 시대의 예언자였다. 루터는 개인의 죄와 구원의 문제에 집중하는 ‘칭의론의 신학자’, ‘믿음과 사랑의 신학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회복코자 한 예언자였다.”

‘95개조 논제’를 발표하며 촉발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1주년을 앞둔 가운데, 김균진 명예교수(연세대)의 저작 전집 9권 <루터의 종교개혁>이 발간됐다.

주로 현대신학을 연구해 온 원로 학자가 지난 4년간 종교개혁자 루터에 대한 연구를 거듭해 800쪽 넘는 분량의 저술을 해낸 것이다.

저자는 “1976년 7월 튀빙겐 대학교 박사학위 교회사 분야 구두시험에서, 필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시험을 치렀다. 시험 준비를 위해 루터의 책들을 읽어야 했다. 당시 헤겔과 그에 대한 칼 마르크스와 바르트의 비판에 심취해 있던 필자에게, 죄 문제에 대한 루터의 사색은 매우 새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약 4년 전, 혜암신학연구소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논문집에 발표할 논문을 준비하면서 루터의 책들을 다시 읽게 됐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읽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루터의 책들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취지를 밝히고 있다.

이후 저자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매우 다른 루터의 모습을 발견했다. 인간의 죄 문제를 깊이 다루는 ‘칭의의 신학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해 400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싸운 구약의 엘리야 같은 인물로 부각됐다고 한다. 루터의 칭의론은 죄 용서에 관한 구원론인 동시에, 교황이 지배하던 중세 기독교 세계(Christendom)’ 속에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세우기 위한 무기였다는 사실을 보게 됐고, 저자는 ‘내가 발견한’ 루터의 종교개혁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다른 집필 동기는, 루터에 관한 많은 책이 종교개혁의 구체적 상황에서 추상화된 루터의 신학을 기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배제하고 루터의 신학을 다룰 때, 그의 신학은 상황성을 결여한 추상적 이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종교개혁의 역사적 과정을 기술하면서 그의 신학을 기술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쓰게 됐다.”

서울신대 튀빙겐대 국제학술대회
▲스승인 몰트만 교수(오른쪽) 방한 당시 통역을 맡은 김균진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구체적 논의에 앞서 저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후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준 세계사적 사건이었으므로, ‘종교개혁’이라는 명칭 자체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문헌들은 <기독교 강요>를 쓴 칼빈처럼 새로운 신학체계를 세우기보다 개혁을 위한 투쟁을 목적으로 집필됐으므로, 변론과 논쟁의 성격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또 루터의 종교개혁은 칭의론 문제 자체가 아니라 ‘면죄부 장사’라는 실천적 문제로부터 시작됐는데, 이 작은 문제 속에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실천의 뇌관을 건드리는 내용들이 숨어 있었고, 이로 인해 ‘이단자’로 파문을 당하면서 다뤄진 다양한 신학적 문제들은 종교개혁의 이론적 기초가 됐다. 그와 동료들의 활동은 신학의 개혁과 가톨릭 체제의 대 개혁운동으로 확대됐지만, 가톨릭교회의 개혁 거부로 말미암아 새로운 교회(개신교회, 루터교회)의 등장으로 마무리됐다.

저자는 루터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면서도, 다음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간다. 하나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직업적 사회 운동가나 정치 운동가로서 사회나 정치 개혁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의 죄와 그 죄에서의 구원에 대한 깊은 고뇌와 사색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교회개혁 운동인 동시에, 불의하고 타락한 세계 속에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세우고자 한 예언자적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집필 동기처럼, 본격적인 논의에서는 종교개혁의 역사적 과정을 충실히 설명하면서 루터의 활동을 조명하고 있다. 제1부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제2부 종교개혁 이전까지 루터의 생애, 제3부 95개조에서 교황의 파문을 받기까지, 제4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제5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시작과 내부 분열, 제6부 황제의 정치적 꿈의 좌절과 종교개혁의 종결 순으로 이어진다.

내용 중 한 예를 살펴보면, 루터의 가장 유명한 일화인 교회 정문에 못 박아 붙인 ‘95개조 논제’의 사실 유무에 대해, 저자는 ‘붙였다’는 정설과 1950년대 이후 이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는 ‘반대 의견’를 차례로 소개한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대학 교회로 사용됐고, 대학 내에서 공개변론을 하려는 사람은 이 교회 문에 논제들을 붙이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한다.

연구 결과 나온 확실한 사실들을 차례로 설명한다. 루터는 이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던 대신 그것을 분명히 말한 사람은 멜랑히톤이었고,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손으로 쓴 95개조 논제를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보낸 서신에 동봉했으며, 1517년 11월 5일 이전당대에 멜랑히톤의 그 말을 의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 등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대축일 하루 전(10월 31일) 교회 문에 못을 박아 95개조 논제를 붙인 것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 95개조 논제
▲95개조 논제를 성문에 게시하는 마르틴 루터. 벨기에 작가 페르디난드 파웰(Ferdinand Pauwels)의 그림이다. ⓒ위키피디아
책을 끝내면서 저자는 “작업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인간의 죄성과 구원의 길에 대한 루터의 깊은 통찰,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에 대한 그의 열정, 거짓 앞에서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그의 고집스러운 삶의 길이었다”며 “루터가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할 수 없다는 그의 굳은 신념으로 말미암아 중세 가톨릭교회의 단독체제가 무너지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교황이 세속의 권세를 갖기도 한 당대 상황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쟁취한 종교적 자유는 사회·정치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향해 “이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사람은, 교회를 지도하는 목사님들이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아무리 교회개혁을 외쳐도, 목사님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제발 회개하시고, 병든 이 나라의 교회를 개혁해 달라. 개교회주의, 대형교회, 교회 체인점에 대한 욕심을 끊고, 어둠 속에서 헤매는 양들을 위한 목양에 자신의 삶을 걸어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김균진 박사는 한신대 신학과와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M.A.) 졸업 후 루터와 종교개혁의 고장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위르겐 몰트만 교수의 지도로 신학박사 학위(Dr.theol.)를 취득했으며, 1977년부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과 신학대학 교수로 봉직한 한국교회 대표적 원로 신학자다.

새물결플러스에서 발간중인 그의 저작 전집은 <기독교 신학 1-4(4권)>, <현대 신학사상>, <죽음과 부활의 신학>, <예수와 하나님 나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