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마 5:7)’은 산상수훈의 8복(八福) 중 다섯 번째 복에 해당됩니다. 다른 복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이 기대하는 복과는 사뭇 다릅니다. 하나님의 전유물인 ‘긍휼’을 죄인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도 독특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위치에 서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기면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지만 그 역시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긍휼을 베푸는 하나님의 입장에 세웠다가, 긍휼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죄인의 위치에 세웁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 사함

긍휼을 베풀려면 먼저 긍휼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육신 중심적인 타락한 인간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신의 필요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구해야 할 것조차 알지 못해 성령이 대신 간구해야 할 정도이니(롬 8:26), 타인의 필요를 알기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우리에게 베푼 긍휼을 보게 하므로, 우리가 베풀 긍휼을 보게 하셨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은 죄 사함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아래 있는 죄인에게 필요한 긍휼이 ‘죄 사함’임을 아셨고, 이를 위해 아들을 대속물(代贖物, a ransom)로 보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 사랑’을 딱 찍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고 한정지운 것도(요일 4:9-10) 그의 사랑이 ‘죄 사함’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긍휼 경륜을 몰랐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병이어, 치유, 축사(逐邪) 같은 이적들을 보고 그가 마치 인간의 육체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온 것인 양 오해했습니다.

주지하듯 오병이어는 죄 사함과 영생을 주는 예수님의 살(肉, flesh)을 예표했으며, 남자만 5천명을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은(마 14:21) 예수의 살은 인류 택자가 먹어도 모자람이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병이어로 육신의 주림만 채우려고 했지, 그 실체인 ‘영생의 떡’ 예수는 먹지(요 6:57-58)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고 한 것은 사람들이 표적의 ‘현상(現象, phenomenon)’인 오병이어만 먹어 육신의 배부름만 채웠지, 표적의 ‘실체(實體, true nature)’인 예수를 먹어 영생을 얻지는(요 6:57-58) 않았다는 뜻입니다.

치유, 축사(逐邪)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이 그런 이적들을 통해 말씀하시려고 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어 죄 사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예수에게서 ‘이적의 떡’과 ‘육신의 치유’만을 취하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예는 성경에 부지기수입니다. 오병이어를 먹은 수많은 사람들이 정작 예수가 자기 살을 주어 먹게 하려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 다 그를 떠난 것이나, 예수님으로부터 문둥병을 고침 받은 열 명 중 아홉이 가버린 것은 그 일부 사례입니다.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마 16:4)”고 책망하신 것은 표적의 ‘현상’만 쫓고, 표적의 ‘목적’인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은 믿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예들은 인간이 기대하는 긍휼과 하나님이 베푸시려는 긍휼이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긍휼을 말할 때 언제나 ‘죄 사함’과 연결지웁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2-13)”,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우리가 베풀 긍휼도 죄 사함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들에게 입혀줘야 할 긍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랬듯이 죄 사함입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베풀 긍휼이 어떤 것이어야 함을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처럼 가난뱅이였던 사도 바울(고후 6:10) 역시 사람들에게 베풀 긍휼은 오직 ‘죄 사함’의 구원이었습니다.

우리가 베풀 긍휼이 소유의 유무(有無)와 상관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자기에게는 돈도, 지식도, 권세도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수 없다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을 보면 예수님 당시, 빵만을 기대하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연상됩니다.

오늘 ‘긍휼 사역(mercy ministry)’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진정한 긍휼 사역은 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주는 것입니다.

혹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는 경우에도, 죄 사함의 긍휼을 베풀기 위한 방도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물질의 결핍, 질병의 고통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죄 사함, 의롭다 함을 받을 때만 참으로 부요케 된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빵으로 구제했다고 해도, 그에게 ‘죄 사함’을 주지 못한다면 참으로 그를 부요케 한 것이 못됩니다. 부요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가난해짐을 통해 우리에게 ‘죄 사함’의 부요를 입혀주셨습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가난한 사도 바울 역시 물질이 아닌 죄 사함의 복음으로 사람들을 부요케 했습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고후 6:1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복음’과 ‘성령’을 주어 파송한 것은(요 20:20-22) 사람들에게 ‘죄 사함’의 긍휼을 입혀주기 위해섭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는 말씀은 제자들이 전하는 ‘죄 사함’의 복음을 믿는 자는 사함을 얻고, 그렇지 않은 자는 사함을 입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는 것은 ‘죄 사함’의 긍휼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음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은 남을 긍휼히 여겨야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다는 조건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성도가 긍휼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긍휼을 흘려내는 ‘결과론’적인 것이기에 그것이 긍휼을 입는 ‘조건(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임을 ‘확증’합니다.

조건의 표현을 띠지만 ‘확증적, 선포적’ 의미를 가진 내용들이 성경에 더러 나옵니다.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롬 1:4)”라는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예수가 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그의 부활로 비로소 하나님 아들로 인정됐다 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부활을 통해 하나님 아들 됨을 ‘선언(확증)했다(declared)’는 뜻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5)”라는 말씀 역시, ‘그렇게 하면 비로소 하나님 아들의 자격을 획득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하므로 그가 하나님자녀 됨직해 보인다(may be the children of your Father- KJV)’, 혹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도리이다(현대인의 성경)’는 뜻입니다.

이를 오늘 주제에 적용시키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낼 때,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임을 확증한다’ 는 뜻입니다. ‘죄 사함’의 긍휼을 입은 자는 본능적으로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로 전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이 ‘죄 사함’의 긍휼을 입은 자임을 확증합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죄 사함의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입혀줄 때, 내가 ‘죄 사함’의 긍휼을 더욱 풍성히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그에게 흘려낸 ‘죄 사함’의 긍휼이 그 안에서 역사되는 것을 목도할 때,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죄 사함’의 가치를 더욱 명료하게 깨닫게 됩니다.

학리적(theoretically)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긍휼을 타인에게로 흘려내어 긍휼을 선순환(善循環, virtuous circle)시킬 때, 그것이 확대 재생산되어 내게 더 풍성히 입혀진다는 뜻입니다.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기만 하고 타인에게로 흘려내지 않는다면,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는 사해(死海) 바다처럼 되어, 긍휼의 통기(通氣, ventilation)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 결과 긍휼의 확대 재생산이 못되어 내게서 그것이 더 풍성히 경험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두(冒頭)에 말했듯이, 성도들의 죄 사함의 긍휼 행사는 단지 긍휼 시여를 넘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적 권세를 행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의 정치 권세 좋아하지 말고, ‘죄 사함’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왕적 권세를 행사합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