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신대 위그노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 정창균)가 16일 오후 본교 생활관 대세미나실에서 '위그노 프로젝트-위그노,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는 정창균 총장이 위그노 프로젝트의 취지를 소개한 뒤 합동신대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조병수 교수가 '위그노,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이어 쇼니 교수(프랑스 잘 깔뱅 신학교 조직신학)가 '프랑스 위그노들의 저항에서 얻는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발표했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 신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1551년 쯤 이 같은 명칭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당시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터나 칼빈의 영향력이 점차 이들에게 미치던 때였다. 동시에 가톨릭의 박해도 그 만큼 심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위그노의 숫자가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했던 건 당시 제네바에서 성경과 신학서적, 시편찬송 등 문서 보급에 앞장섰던 칼빈의 영향 때문이었다. 또한 그러면서 위그노에 대한 박해도 시작됐다. 많은 위그노들이 화형을 당했고, 바씨 학살(1562년), 바돌로매 대학살(1572년) 등을 거치며 수많은 위그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던 중 개신교 신앙을 갖고 있던 앙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프랑스 전역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결국 앙리 4세는 위그노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그럼에도 그는 그로부터 5년 후인 1598년,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낭트칙령'을 내렸다.

낭트칙령의 주요 내용은 위그노 제후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위그노들의 예배와 예배당의 건축, 교육을 비롯해 노회와 총회 등의 회의를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칙령은 그야말로 극심한 박해 중에 있던 위그노들에겐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러나 조 교수는 이런 낭트칙령으로 인해 오히려 가톨릭 지역으로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했다고 했다.

결국 낭트칙령도 절대왕정을 구축한 루이 14세에 의해 철회되고 만다. 그러면서 다시 위그노들을 향한 박해가 시작됐다. 그들 사이의 결혼은 불법이었고, 죽은 위그노들의 장례조차 불가능했다. 많은 교회들은 국가에 복속됐다.

조병수
▲조병수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이런 박해로 인해 위그노들은 가톨릭으로 전향하거나 비밀신자(니고데모파)로 이중생활을 했다. 또 일부는 동굴이나 광야로 피신해 그곳에서 비밀집회를 가졌다. 특히 당시 전 프랑스 인구의 약 1%인 17만명 가량의 위그노들이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망명했는데, 조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프랑스 사회의 고급 인력들이었다. 때문에 이후 프랑스 경제는 쇠퇴했고, 끝내 왕정이 몰락하는 결과까지 낳았다.

해외로 나간 위그노들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들은 영국의 비단과 기계, 스위스의 시계와 초콜릿 산업 등 유럽 사회의 경제와 문화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그들의 신앙이 프랑스를 넘어 해외 곳곳으로 전해졌다.  

조병수 교수는 "위그노들은 여러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고난의 길을 걷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모범"이라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