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김용주 | 익투스 | 317쪽 | 12,000원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 첫 해를 보내고 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문에 붙은 이후, 그 개혁의 정신과 가치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루터는 교황을 제거하고 그때의 교회를 뒤집으려는 목적으로 게시한 것이 아니었다.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로서 언제든지 토론을 제안할 의무가 있었기에, 당시의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모습과 부덕한 사제의 모습을 보며 토론을 제시할 목적으로 써붙인 반박문이 큰 불씨가 된 것이다.

그 질문과 저항이 담긴 글은 이내 독일 전역으로 퍼졌고, 오늘날 우리 교회까지 이어지는 도화선이 됐다. 당시 작센 지역 부흥사들이 교회를 다니며 선포하는 면죄부에 대한 설교는, 양의 탈 쓴 이리와 다를 바 없었다. 헌금함에 넣는 동전 소리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춤을 추고 기뻐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교회는 성도들을 무지하게 만들었고, 사제의 수준 또한 루터가 대교리문답에서 너희는 개집이나 지키라고 말할 정도로 형편 없었다. 교황의 권력은 하나님보다 높았으며, 교회는 구원을 책임지는 변질된 집단이 되었다.

이 책은 루터에 대하여 한국인이 쓴 평전이다. 저자는 루터 연구가로서, 루터의 원전을 바탕으로 그의 글을 인용하며 그의 삶을 조명한다.

그의 출생에서부터 어둠의 시간, 구원의 시간, 개혁의 시간, 시련의 시간, 교육의 시간으로 나누어 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하여 정확한 정보와 평가를 제공한다. 또한 지금까지 논란이 되는 에라스무스와의 갈등이나 농민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필자는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는 루터의 책을 보며 네 가지 정도로 그 특징을 서술하고자 한다. 첫째는 십자가 신학이다. 개인적으로 제일 은혜와 감동이 됐는데, 루터는 감추어지고 가려졌던 십자가를 밝히, 붉게 드러낸다. 중세 때는 모양만 있는 물건이고 벽에 붙어만 있는 가치였는데, 그 모양이 교회에서 구체화되고 삶에서 실제화 되는 가치가 됐다. 십자가는 그의 신학의 심장이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이다.

중세 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스콜라 철학이 학문의 방법이었고 교회는 영광의 신학만 가르쳤는데,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고 거기서부터 교회와 성도가 출발해야 된다고 한다.

영광의 신학으로 뒤덮여 거품과 허위와 가식으로 살아가는 중세교회는 거짓된 교회였다. 거짓 신학이 거짓 교회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신학 실종은 윤리 실종을 낳았고 교회와 성도를 썩게 하였다.

그런 면에서 루터는 십자가에서 자기 죽음과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강조한다. 죄인이라는 철저한 자기 인식과 고백이 있어야 한다.

자기 영혼의 부패함을 모르고는 그리스도를 찾을 수 없다. 자기의 죄인됨과 본성의 악함을 발견하지 않고는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지 못한다. 십자가에서 철저히 회개한 자가 행복한 교환을 받을 수 있고, 삶에서도 시련과 고난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십자가를 질 수 있다.

두 번째는 칭의다. 루터는 이것을 교회의 서고 넘어지는 교리라고 했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렸고, 죄와 구원에 관심이 많았다.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오긴 했지만, 매일 반복되는 고해성사는 그에게 어떠한 만족과 자유를 주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의 모순점만 발견되고 의문만 더 커져갔다. 그러던 중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심은 더 깊어져갔다.

그러다 시편과 로마서를 통해 의에 대한 혁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의라는 것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두 책에서 발견되는 의는 건지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의였던 것이다.

이전에 율법적으로 적용되었던 의가 복음적인 옷을 입고 칭의라는 놀라운 은혜가 낯선 의로 외부로부터 공급되었던 것이다. 능동적인 의로 살아야 했던 그에게, 이 그리스도의 수동적인 의는 놀라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었다.

이후 루터의 의는 히브리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창세기 강해를 통해 더 깊어지고 발전한다. 칭의를 통해 신앙은 영혼과 인격의 전체적으로 변화한다. 삶의 주인이 확실하게 바뀌는 것이고, 이전과 다른 거룩을 향한 역동적인 삶이다.

또한 이것은 법정적인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을 낳는 칭의이다. 거룩한 칭의는 순결한 사랑을 낳는 것이니, 일각에서 말하는 루터 칭의의 편협함은 잘못임을 이 글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칭의에 대한 부분은 저자의 책 <루터에게 칭의를 묻다>를 보면 더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성경의 권위를 세운다는 것이다. 루터의 가장 큰 공은 아마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일일 것이다. 당시 교회는 라틴어로 된 성경을 소유하고, 이것으로 미사를 하였다. 무능한 사제들도 라틴어에 능통하지 못했으며,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들은 이 언어에 더 무지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서 파문당한 후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아이제나흐의 바트부르그 성에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다. 그리고 이 성경은 백성의 손에 쥐어지고 민중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교회에서 성경이 막히고 바르게 설교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죽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날 것이다. 성도의 심령에 말씀이 사라지고 말씀의 능력이 약해진다면, 세상을 따라가는 곳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중세의 교회는 말씀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하늘을 향해서는 커튼을 치고, 세상을 향해서는 거대한 탑을 쌓았다. 성경은 교회에게 사유화되었고, 백성들은 소유하지도 읽지도 못했다.

이런 가운데 루터의 번역은 교회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것이었고 불통의 시대를 소통의 시대로 바꾸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러니 구원과 삶의 유일한 기준으로 성경을 제시하는 루터는, 교황이 볼 때 이단자요 배신자였다. 교황의 권위를 훼손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결국 이단으로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교회에서 파문당하지만, 그는 이것을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붙잡혀 사는 자의 영광으로 받아들인다.

마르틴 루터
▲한국 전통 초상화 기법으로 그린 마르틴 루터. ⓒ조용진 얼굴연구소 제공
넷째,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이다. 루터는 교회 개혁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사상과 가르침은 성경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시대를 깨우는 역사적인 전환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교회만의 소유가 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교회부터 변하는 것이 맞지만, 교회에서부터 흘러가는 것이다. 루터 또한 음악과 미술과 구제와 정부를 통해 삶의 전 영역에서의 개혁을 가르치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알듯, 그는 음악을 통해 복음과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전했고, 미술을 통해서도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권하였다. 아울러 정치 윤리로서 ‘두 정부론’을 주장하며 교회와 정부가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처럼 하나님과 악마의 통치가 대립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교회와 정부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 교회는 의를 만들어내고, 정부는 평화를 보호하고 악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루터는 경제와 복지에 있어서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당시 가난한 이들이 많은 이유로 경제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귀족들에게 구제에 대한 당위성을 요구하는 그의 글은, 오늘날 보수적 교회와 성도들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다.

필자는 개혁에 대한 그의 글과 의지를 보며, 우리가 너무 루터를 교회 안에만 가두어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후 그의 연구에 이 부분은 더 발전될 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루터가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로부터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사람이 하나님이 된 암울했던 시대에, 어떻게 이런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놀이와 종교장사를 하는 교회를 보며, 부끄러움과 수치를 감출 수가 없다. 가톨릭은 교황이 한 명이지만 개혁된 교회에는 수많은 교황이 교회에 자리잡고 있다.

눈 멀고 병든 교회에서 진리를 재발견하여 개혁된 교회가 되었는데, 이제는 개혁의 대상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쩔 때는 필자도 이럴거면 차라리 교회가 없는 게 성도에게 더 유익하겠다는 웃픈 생각이 간혹 들기도 한다.

중세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을 팔고 돈을 거둬들인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사가 우상이 되고 교회는 장사판이 되었다. 중세 때의 어두운 모습이 오늘과 겹쳐지는 것에 당혹스럽다.

필자가 볼 때 루터가 이런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보름스에서 외쳤던 “내 양심이 말씀에 사로잡혀서 성경적으로 믿는 것은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다”고 외쳤던 말처럼, 그는 진리에 의해 인도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탐욕에 눈이 멀어 두 눈 뽑힌 삼손처럼 하나님을 짓밟고 수치와 조롱을 당하는데, 다시 한 번 말씀에 사로잡히는 역사가 있어 지속적으로 개혁된 교회를 이어가길 소원해 본다.

방영민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