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의에 배부르지 못한 자는, 의에 주리지도 못합니다

입력 : 2018.10.12 16:14

의(義)의 역설, 의에 배부른 자만 의에 주림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의에 주리고 목마름(마 5:6)’ 하면, 불문가지(不問可知)하고 ‘의의 채움을 향한 갈망’ 같은 ‘결핍’ 개념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중생으로 인한 의(義)에 배부름이 갖다 준 ‘만족 갈망(longing of satisfaction, 만족한 상태에서의 갈망)’입니다.

죄로 죽은 결핍자는 주림과 목마름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주림과 목마름을 못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는 하나님을 향해 죽은 죄인의 절망적인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이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으로만 채워져야 하는 한 공간이 있는데, 그 곳이 채워지기 전까지는 인간에게 만족이 없다’고 한 말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전부가 아닌 한 부분만 채우시는 분이고, 죄가 인간의 일부분만 죽게 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나아가 죄로 일부분만 죽은 인간도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다는 왜곡된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물론 어거스틴(Augustine)은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믿었습니다.

인간이 무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일부분이 아닌 ‘전부’였고, 그가 타락했을 때 그의 일부분이 아닌 ‘전 존재’가 죽었습니다. 이렇게 죄로 완전히 죽은 자는 하나님을 갈망할 수 없습니다. 오직 거듭나 하나님에 대해 눈이 열릴 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을 향한 ‘산 소망’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거듭남(벧전 1:3)”의 결과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거듭나 의(義)의 배부름을 얻음에서 온 결과입니다.

또한 이는 흔히 상상하듯 ‘만족(the satisfaction)’에서 ‘더 큰 만족(the more satisfaction)’으로 전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채움과 갈망의 선순환(善循環, virtuous circle)’적 현상을 말한 것입니다. ‘채워졌는가 했는데’ 갈망하고 있고, ‘갈망하는가 했는데’ 어느 듯 채워집니다.

육신은 배가 부르면 주림이 없어지고 먹는 것이 오히려 고역이지만, 거듭난 영은 배가 부를수록 더욱 주림을 느낍니다. 이것이 ‘의(義)의 배부름’ 속성, 혹은 ‘유한된 인간이 영원한 하나님의 의(義)를 수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의의 ‘배부름’에서 오는 ‘의의 갈망’은 결핍감이 아닌, 만족과 기쁨의 경험입니다.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시 105:3-4)”는 성도가 하나님을 갈망할 때 갖는 즐거움을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2)”라며 ‘만족’과 ‘갈망’의 선순환(善循環, virtuous circle)적 경험을 고백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거나 하나님이 그에게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고 그에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찾는 족속,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시 24:6)”로 일컬어진 것도 그들이 여호와와 그의 얼굴을 찾지 못했거나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얼굴을 찾은 결과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갈망’이 ‘하나님 만족’의 또 다른 표현이었고, ‘하나님 만족’ 역시 ‘하나님 갈망’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충만’만이 ‘만족’이 아니고, ‘갈망’도 ‘만족’입니다. ‘충만’만이 넘침이 아니고, ‘갈망’도 넘침입니다. ‘충만’은 ‘존재(being)’의 넘침이고 ‘갈망’은 ‘채워짐(be fulfill)’의 넘침입니다.

‘충만’과 ‘갈망’은 개별로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고 서로를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구하는 이들을 향해 이미 성령이 와 계신데 왜 안 오신 것처럼 성령을 구하느냐고 타박합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성령이 이미 와 계시기에 성령을 구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는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않으며 나오시지도 않으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고 했습니다(요 15:26).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시는 성령이시기에, 우리가 ‘계속’ 성령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be filled with the Spirit, 엡 5:18)’는 헬라어 ‘플레루스데(πληρουσθε)’는 ‘현재 수동태 명령형’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하나님(계 1:4; 4:8)”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은 이미 오셨고, 지금도 와계시고, 또 다시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현현을 ‘현재, 과거, 미래’ 시제별로 토막내어 말한 것은, 제한된 시간 개념만을 아는 유한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시제는 영원히 현재이십니다(사실 현재 라는 용어도 하나님께는 적절치 않음). 따라서 우리는 항상 지금 그의 현현(顯現, manifestation)을 구해야 합니다.

◈미중생자의 주림과 목마름

인간의 모든 갈망은 그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하나님’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는 말씀은, ‘신(信)·불신을 막론하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다만 차이라면, 중생하여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자는 평생 하나님을 사모하고 살지만, 자신의 갈망 대상이 하나님인 것을 모르는 미중생자는 엉뚱한 것을 갈망하다가 일생을 마감합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엉뚱한 갈망이 때론 놀라운 결과물을 산출해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사람들이 나름대로 업적과 성공을 거두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다가 낸 결과물이라고 지적한 것은 옳습니다. 예컨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다 석가모니, 플라톤 같은 성인(聖人)과 대철학자가 되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쫓다가 삭개오 같은 부자,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는 사마리아 여자처럼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은 그들의 갈망은 무저갱처럼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습니다. 음부를 바닥없는 무저갱(無低坑, Abyss)이라 하는데,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못한 음부 같은 인간 영혼의 공허함을 예표합니다. “거머리, 아이 배지 못하는 태, 물로 채울 수 없는 땅,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잠 30:15-16)” 같은 성경의 예들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아 족함을 모르는 영혼의 공허를 빗댄 것입니다.

지극히 종교적이었던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갈망했지만, ‘지식을 쫓지 않았기에(롬 10:2)’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찾았다고 하는 하나님은 다른 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다(요 8:21)”고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다가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멸망당한다면 덜 억울하겠는데, 그들처럼 그렇게 열렬히 하나님을 찾다가 멸망당하게 된다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처럼 미중생자의 하나님 갈망은 장님 코끼리 만지듯, 허공 속을 헤매고 헤매다가 엉뚱한 신을 만날 뿐입니다.

◈영적 주림의 내용, 그리스도의 의

성도가 주리고 목말라 하는 ‘의(義)’는 죄인에게 구원을 주는 생명입니다. 인간이 살았다 죽었다는 기준은 의가(義)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의’를 ‘생명수(계 7:14-17)’에 비유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의가 없어 멸망하는 죄인들에게 의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의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를 깨뜨려 흘려내셨습니다(고전 10:4). 구약에서 율법의 상징인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낸 것은(민 20:10-11) 그리스도의 육체가 율법의 침을 받아 깨뜨려짐으로 의를 흘려내실 것을 예표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입으려면 의(義) 이신 그리스도께로(고전 1:30)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하고서는 의를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토록 ‘의’를 원했으면서도,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고 저축치 못하는 ‘자기 의(義)’라는 터진 웅덩이(렘 2:13)를 팠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의를 구한 것은 우물을 메우며 물을 구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을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의)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의)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마지막으로 의(義)의 이중적 역할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먼저 죄로 죽은 자를 살리는 의의 단회적 속성입니다. 죄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단번에 생명에 이릅니다.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7, 18)”,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6:14)”.

의(義)의 또 하나의 역할은 이미 앞에서 장황하게 말했듯이, 의로 살림을 받은 자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의를 경험케 하는 것입니다. 곧 ‘의의 주림과 채움’의 선순환 속에서, 그에게 의가 매일의 ‘일용 양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마 5:6)”.

의(義)의 단회적이며 지속적인 두 역할을 잘 표현한 것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된 의(義)는 죄인을 살리는 ‘생명’인 동시에, 매일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