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후배의 죽음, 그리고 행진(行進)

입력 : 2018.10.12 16:13

하민국 목사.
중추절 연휴와 국경일이 끼어 있는 주말, 긴 휴식의 시간 끝자락에 매달린 태풍으로 방향 없이 비바람이 몰아친다.

하늘을 향하여 무어라 입내소리를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닦았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후배의 사투 곁에서 반복하여 복음을 전하고, 영접기도와 더불어 천국 입성의 티켓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한지 이틀 지난 오늘, 후배는 소천했다.

세상의 고정관념적인 숫자로 볼 때 이른 죽음이어서, 아니면 생전에 나누고 더할 정담을 다하지 못한 안타까움이어서 더욱 슬프고 애닯은 소천이다. 가슴이 휑하다. 장례식장을 향하는 새벽 여명은 거친 비바람과 더불어 유난히 어둡다. 56세, B3호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할 뿐이다. 우리의 죽음은, 시간과 길이로 헤아려지는 함수가 아니다. 우리의 죽음은, 삶과 동행하는 공존의 관계이다. 삶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곧 삶의 일정 부분이 아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명과 더불어 공존하는 생명 자체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곧 무덤을 향한 행진이다.

죽음은 다른 어느 곳에서 찾아오거나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공존하다가 호흡이 멎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생(生)과 사(死)의 구분 없는 생사(生死)가 곧 우리다. 우리의 생명은 마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흐르는 혈액과 같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흐르는 혈액은 상처난 곳을 아물게 할때는 응고되는, 이중적 생명 유지 물질이다.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전을 거듭해도, 우리는 혈액을 만들 수 없다. 우리가 만드는 물질은 결국 응고되거나 결국 정체된 액체일 뿐이다. 스스로 흐르다가 스스로 응고되는 혈액을 만들 수 없다.

아무리 반항하고 반기를 들어보려 해도, 생명을 주시고 거두시는 섭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영역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들은 모두 자신에게 닥칠 죽음조차 예측하거나 예방하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30년 전 좌측 팔의 동맥이 끊어져 죽음 앞에 섰던 그 날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동맥이 끊어지면서 소방 호스처럼 피가 솟구치다가, 빈 거품만 울꺽거릴 지경까지 많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이내 극심한 오한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지옥 앞에 섰다. 강제로 끌고가려는 형상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극렬하게 발버둥쳤다. 거대한 웅덩이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며 겨우 발가락으로 버티면서 발악했다.

이제 소리칠 기력조차 없다.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중얼중얼 찬송가를 불렀다. ‘주는 나를 가르시는 목자요 나는 그의 작은 어린양’. 고개를 떨구었다. 초점 없이 허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들 속에 던져지는가. 하나님을 믿을 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시는 구세주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을 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사탕 얻어 먹으려고 교회를 들락거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진학한 곳이 모두 미션스쿨이다. 성경 과목을 배우고 학과 시험까지 잘 치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천정이 빙글 돌다가 평행을 찾는다.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여지없이 지옥행이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올바로 믿지 않으면 지옥행이다.

올바른 믿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사탄은 그리스도 권세 앞에 무너졌다. 그리스도는 천국 티켓이다.

‘그리스도’는, ‘예수’ 뒤에 붙여도 되고 생략해도 되는 글자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권세이다. 죽음을 이긴 유일무이한 권세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자녀가 되는 신분과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권세를 얻은 성도들이다. 그리스도 권세가 희미해지거나 이를 망각하게 되면, 성도들은 종교인으로 전락하게 되고 천국 소망을 이룰 수 없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천국을 가고 지옥을 가는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제한된 의식으로 추측해 본다. 그리스도 권세를 가진 성도들의 주검은 호흡은 멈춰져 있지만, 수족을 들어보면 마치 잠을 자는 사람처럼 잘 움직인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인도하니 평안한 마음으로 잠이 든 것은 아닐까.

이에 반해 어떤 주검은 나무토막처럼, 철기둥처럼 수족이 뻣뻣하다. 사탄이 부리는 귀신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극도로 경직된 주검은 아닐까. 이 또한 우리들은 알 수 없는 사후(死後)의 하나님 영역이다.

후배는 깊이 잠들어 있다. 장례식장마다 발인하기 전에 시신을 염(殮)하는 곳이 있다. 시신을 깨끗이 하고 수의(壽衣)를 입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시신의 팔을 들어보면 부드럽게 잘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 후배의 팔을 슬그머니 들어보니 부드럽다. 두 팔을 복부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는 마음이 왠지 평안하다.

우리의 열정적인 삶, 소망과 성취, 아름다운 관조, 작은 실천, 소소로운 행복감, 실패와 낙심, 원치않는 환경까지도 모두 무덤을 향한 행진이어서 실의에 빠질 일은 아니다. 그리 길지않은 나그네길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천국갔다’는 마침표가 붙은 인생은, 일생 중에 영생을 얻은 축복의 행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거나, 성도들일지라도 그리스도 권세를 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천국에 갔을까?’ 물음표가 남는다. 물음표가 남는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행진일 수 있다.

그리스도 권세를 가진 행진일 때, 육신의 소멸을 향한 우리의 인생은 비로소 아름다운 행진이다.

웨민총회 인천신학장 하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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