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감옥에서 아침마다 변기통 위에 올라서서 훈시하다

입력 : 2018.10.12 16:10

[소설 꽃불 영혼(34)] 감옥, 오산학교가 되다

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한편 검거된 남강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시종 의연했다. 판사의 질문에 거침없이 의견을 밝혔으며, 태도와 음성은 확신으로 가득찼다.

“피고는 한일합방을 반대했는가?”

“그렇다. 오색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망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않으며, 더욱이 남의 나라에 병탄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랴.”

“피고는 독립운동을 하면 실제 조선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일본 정부가 우리 요구를 방해하지 말고 조력하여 독립이 되게 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될 줄로 믿고 있다.”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의 국권회복 운동을 할 것인가?”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인류를 창조하실 때 모든 사람에게 각각 자유를 누릴 권리를 주셨는데, 우리 민족은 너희에게 이런 고귀한 자유를 다 빼앗겨 버렸다. 이런 굴욕은 곧 절망이요 죽음인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너희 일본은 우리 한국의 은의를 크게 입었던 나라이다. 그런데 그런 은의를 이처럼 원수로 갚다니 이보다 더 천벌을 받을 짓이 어디 또 있겠느냐?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너희 칼날에 목이 잘리운다 할지라도 절대로 노예와 짐승이 되어 살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이번 만세운동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니 우리 한국의 독립이야말로 곧 일본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점도 이 기회에 깨닫기 바란다.”

결국 남강은 경성 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남강은 옥살이를 하며 다른 수감자들을 위로해 주곤 했다. 사람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게 너무도 안쓰러웠던 것이다.

어두운 감옥에 심상찮은 풍문이 나돌았다. 만세운동의 주동자는 곧 처형당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사실이라면 어쩌지?”

수형자들은 근심 걱정으로 수심이 가득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유서를 쓰기도 했다. 그런 모양을 지켜보던 남강은 크게 소리치며 그들의 나약함을 나무랐다.

“우리가 언제 죽을 각오 없이 여기 들어왔던가. 그렇게 죽음을 무서워하면서 어떻게 독립전선에 뛰어들었단 말이오.”

감옥은 참혹한 땅의 지옥이었다. 어떤 사람은 정신이상자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병들어 옥사하고 말았다. 남강은 담담한 태도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 날부터 옥중에서 특이한 연설이 시작되었다. 아침 시간이면 감옥의 변기통 위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훈시했다.

“사랑하는 오산학교 학생 여러분, 우리 민족은 현재 헤어나기 어려운 도탄에 빠져 있지만 결코 절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도 풀 한 포기조차도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신음 소리를 듣고 계신 하나님께서 보고만 계실 리가 없습니다. 추운 겨울 뒤에 따뜻한 봄이 오듯 언젠가는 우리나라에도 자유가 올 것입니다.”

다른 수형자들은 처음엔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에서 나오는 진실한 호소라는 것을 알고는 모두가 오산학교 학생들이 되어 그의 연설을 경청해 주었다.

그는 예전 오산학교에서처럼 감옥 내의 청소와 화장실 청소는 자진하여 도맡아 했다.

시간이 흘러 만세운동의 불길도 차츰 사그라져 갔다. 그러나 한민족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불씨로 살아남아 있었다.

남강은 감옥에서 지친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3·1 만세운동은 일본제국의 폭압적인 지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했습니다.

헌병경찰제를 시행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하고 투옥했지요. 그리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촌의 땅과 곡식을 마구 수탈하고, 회사령 등으로 우리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했지요. 이처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가 3·1만세운동으로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만세운동은 처음부터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비무장으로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어요.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투옥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심한 고문이 뒤따랐답니다. 아아, 한 번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가 이토록 어렵고 괴롭단 말입니까?”

남강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의 허연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3·1 만세운동이 시작된 이후 3개월 동안 피해 상황은 처참했다. 집회 횟수는 약 3천여 회, 참가인원 수는 약 5백만 명, 사망자 수십만 명, 부상자 50여만 명, 검거된 사람은 약 10만 명이었다. 그리고 불에 탄 교회가 약 50곳, 학교는 10곳, 민가는 2천 채나 되었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3·1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비록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만천하에 드러낸 바가 되었다.

또한 중국의 5·4 운동이나 인도 지도자인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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