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권혁승 박사(서울신대 구약학 명예교수)의 논문 <'이방인의 때'에 관한 예언과 성취>를 매주 1회 연재합니다.

권혁승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IV. '이방인의 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A. '이방인의 때' 이해 방법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강조하신 말씀은 종말과 관련된 세 때였다. 곧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게 될 '징벌의 날'과 '이방인의 때'와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이었다. 이중에서 '이방인의 때'는 '징벌의 날'과 '재림의 날'을 이어주는 중간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이방인의 때'가 시작되는 시점은 분명하다. 비록 주후 132년 바르 코흐바의 주도 하에 일어났던 또 한 차례의 로마항쟁으로 일시적인 회복이 있었긴 했지만, 이스라엘이 주권을 상실한 채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기 시작한 것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된 때였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세계를 지배했던 일곱 제국(로마; 비잔틴; 이슬람; 십자군; 마물룩; 오스만 터키; 영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때'는 언제 끝나는 것인가? 그에 대하여 누가복음 본문은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이방인의 때'가 '재림의 날'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눅 21:27)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힌다는 것(눅 21:24)이다. 전자가 인류구원의 최종 완성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구원의 수단으로서 이스라엘의 역할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방인의 때'가 끝나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을 위한 전제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또한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가시적 증거와 관련이 있다. '이방인의 때'가 찼음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역사의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때'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예루살렘 회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모든 역사는 최종적인 결과와 함께 그것을 향한 과정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는 말이 생겼다. '이방인의 때'에도 그런 역사공식이 적용된다. '재림의 날'이 '이방인의 때'가 완전히 끝났음을 알리는 최종 증거라면, 예루살렘의 회복은 '이방인의 때'가 끝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과정으로서의 증거들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 비유는 그런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눅 21:29-30). 여기에서의 '여름'은 '재림의 날'을 의미하고, 그것이 가까이 다가옴을 알려주는 '싹'은 예루살렘의 회복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21:30). 봄철에 싹을 내기 시작하는 무화과나무는 여름의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여름'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이츠'는 '마지막'을 의미하는 '케츠'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스라엘에서 여름은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계절이다. 무화과나무의 새싹이 마지막 계절인 여름의 도래를 알리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회복도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바로미터인 셈이다.

'이방인의 때'에서 '때'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로이'는 '카이로스'의 복수형이다. 헬라어에서 시간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로 구별된다. 결정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는 정량적이고 순차적인 시간인 '크로노스'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런 두 종류의 시간은 단지 이해를 위한 분석일 뿐이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의 때'는 '카이로스'로서 하나님의 결정적인 사건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은 '크로노스'라는 물량적 시간 속에 담겨져 있다. '재림의 날'이 카이로스 중의 카이로스라고 한다면, 예루살렘의 회복은 '크로노스' 속에 담겨있는 과정들로서의 '카이로스'로 이해할 수 있다. 복수형 '카이로이'가 사용된 것도 그런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