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사람의 아들

이문열 | 민음사 | 386쪽 | 12,000원
1979년 6월 1일 출간

‘내가 이 책의 감상평을 쓸 수 있을까?’ 나온 지 40년이 되어가는 이 책을 20년 전 처음 읽었습니다. 성경과 문학을 잘 몰랐던 터라, ‘어렵다’는 결론을 짓고 책장에 꽂아 두었습니다.

2년 전 이 책의 감상평을 쓰기 위해 다시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벅찼고 놀라웠습니다. 다 읽고 나서 감상평을 쓰려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역작에 명작인데다 뛰어난 문학성으로 성경과 신화를 소설이란 틀 속에 잘 넣어놨기 때문이었습니다.

몇 자 쓰다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제 글 실력으로는 이 책에서 전하는 핵심을 온전히 전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읽었습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볼 때마다,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얼마인지는 모르나 꼭 갚아야 할 채무가 느껴졌고, 기필코 넘어야 할 산이라 봤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읽었지만 여전히 버거웠습니다.

미리부터 말하자면 제가 쓸 이 책의 대한 감상평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책의 진가를 다 담아내지도 못할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미리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모든 기독교인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세계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필히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제 감상평이 미흡하겠지만 그래도 꼭 읽어보기 바랍니다.

줄거리를 간단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대구 근교의 기도원 부근에서 민요섭 전도사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남경호 경사가 이 사건을 추적해가면서 민요섭을 따르는 조동팔이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그를 쫓으면서 민요섭이 소설로 쓴 새로운 신화를 읽게 되고, 연관성을 확인하면서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이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기독교인으로서 아주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전도사라는 성직자의 살해부터가 불편한데, 내용은 점점 비성경적, 반성경적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민요섭과 조동팔은 예수님으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황하는 유대인’이라는 뜻을 지닌 ‘아하스 페르츠’라는 13세기 유럽에서 퍼지기 시작한 전설 속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세계의 신들을 만나면서, 자신만의 신화를 구축해갑니다. 아하스 페르츠의 탄생 자체를 예수님의 탄생과 접목시키고(소설이니까), 나중엔 예수님과 몇 차례 대면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소설 속의 소설이 들어가 있는 구성입니다.

민요섭과 조동팔이 성경을 반박하는 내용은 상당히 불편하지만, 그의 지적은 타당하면서 일견 동의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백태들이라 가슴이 쓰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한탄스러운 건 이 책이 나온 게 40년 전이라는 점입니다. 40년 전 기독교인들의 문제와 지금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40년 전의 이 책이 지금에서도 읽힐 수밖에 없고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문열의 문학성이 뛰어나다기보다, 이 책이 지적한 기독교인들의 문제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성경에 실망한 것에 대한 답을 여전히 명쾌하게 못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논리적이면서 비논리적인 경전입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나요? 그런데 이 비논리적인 성경의 첫 장 첫 절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진도가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사람의 지능으로 이해할 수 있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논리로 성경을 공격해 오면, 성경은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하스 페르츠는 논리적으로 공격합니다. 그의 주장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 믿는 사람도 궁금해했던 부분입니다. 이문열이 우리를 대신하여 아하스 페르츠를 통해 대신 물었고, 예수님의 답은 (논리적으로) 부족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수차례 대면하면서 실망한 아하스 페르츠(아님, 어쩌면 읽는 우리)는 예수님을 버리고 자신만의 신을 만듭니다.

문장력으로는 워낙 빈틈이 없고 논리적이라, 이 책은 신앙심 떨어뜨리기 좋은 책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책이 지적한 내용이 지금까지도 개선되지 않았고 질문에 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 읽자면, 지적에 대해서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죄인이다!’는 말로, 질문에 대해서는 ‘성경을 논리라는 렌즈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말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드는 건, ‘비겁한 변명’같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사실이죠. 사람은 아무리 회개를 하고 회심을 해도, 죄된 속성을 지닌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자체로 기적과 비이성적일 수밖에 없는 신의 이야기입니다.

스포일러이지만, 이 책의 두 주인공 민요섭과 조동팔은 다 죽게 됩니다. 민요섭은 초반에, 조동팔은 끝에. 민요섭의 죽음은 회심으로 인한 살해이고, 조동팔은 자신의 주장을 위한 자살입니다. 민요섭의 죽음은 신앙에 대한 답이었고, 조동팔의 죽음은 신앙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즉 이 책은 답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는 구성입니다.

드라마 사람의 아들
▲드라마로 만들어진 사람의 아들 속 한 장면. ⓒ연합뉴스 캡처
이 책은 신앙적으로 보면 세상과 같습니다. 끝에 가서 질문을 던져 우리를 혼돈시키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겁니다. 작가의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래서 이 책은 어찌 보면 아주 우수한 소설이면서 아주 우수한 신앙서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읽자면, 신앙을 가진 사람은 흔들릴 이유가 없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앙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읽자면, 신앙을 가진 사람은 질문을 묵상하면서 이에 대한 답을 삶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다짐을 하게 될 수 있고, 이 사실을 알고 읽자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성경이 그래서 놀라운 책임을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이 책에는 아하스 페르츠가 신에 대한 탐구로 여러 신들을 보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작가의 방대한 지식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또한 성경과 신화를 한 궤에 꿰는 상상력과 문장력이 탁월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자칫 지루함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루할 때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사건을 풀어가고, 그 이음새 또한 매끄럽습니다. 작가가 언제 얼마큼 보여줘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하스 페르츠는 사람이면서 악마이기도 합니다. 40일 금식한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한 악마를 아하스 페르츠로 설정한 것 또한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있는 악마일 수 있습니다. 언제든 쉽게 의심하고, 쉽게 악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좋은 일이 생길 때는 사람처럼 살지만, 나쁜 일이 생기면 악마로 돌변하여 예수님께 항의하고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합니다.

믿는 자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 이 책은, 그래서 불편하지만 그래서 읽어야 하는 책인 것입니다. 읽는 내내 고민을 하게 되었고, 끝까지 읽게 되었으며, 읽고 나서도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상평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시원하지 않습니다. 서두에 밝혔듯 역작에 명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대한 온전한 가치를 다 담아내기는 처음부터 어려웠다는 걸 알고 썼습니다.

40년 전에 나왔는데 지금까지도 절판되지 않고 판매되고 있습니다. 하루에 몇 십종씩 쏟아지는 출판계에서 말입니다. 그만큼 놀라운 책입니다.

이 책의 지적과 질문은 아마 몇 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통용될 것이고 적용될 겁니다. 그러니 꼭 사서 읽고 책장에 꽂아두어 다음 세대에게도 읽게 해주길 바랍니다.

이성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