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놈
▲최근 개봉한 안티 히어로 영화 <베놈>
이번 박욱주 박사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톰 하디(베놈), 미셸 윌리엄스(앤 웨잉), 리즈 아메드(칼튼 드레이크), 제니 슬레이트(도라 스카스), 레이드 스콧(댄 루이스) 등이 출연해 현재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영화 <베놈>을 두 차례 분석합니다. -편집자 주

◈입체적 영웅: 안티 히어로의 시대

슈퍼히어로 영화의 영웅들은 결함, 상처, 사명에 대한 의심, 그리고 악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이른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시초격인 슈퍼맨만 하더라도, 원작 <슈퍼맨>(Superman, 1978) 시리즈에서는 고향별인 크립톤 행성의 폭발로 인해 어린 시절 부모를 잃어야 했고 크립토나이트 때문에 자주 힘을 잃어버리며, <배트맨 대 슈퍼맨>(Batman v. Superman, 2016)에서는 연인인 로이스 레인의 죽음에 분노해 악의 편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가장 강력하고 가장 선의지로 가득찬 슈퍼맨이 이럴진대, 그 외 히어로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거의 대부분 마음에 심각한 상처나 깊은 원한을 갖고 있고, 그런 상처나 원한이 초인적 능력을 선하게 사용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는 동시에, 악에 대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평범한 히어로가 아닌 안티 히어로(anti-hero), 이른바 반(反)영웅이라는 말이 슈퍼히어로물 홍보문구에 자주 등장한다.

안티 히어로란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능력자들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스폰(Spawn)이나 데드풀(Deadpool), 그리고 최근 개봉한 <베놈>(2018)의 주인공 베놈(Venom)이다.

이들은 특별한 계기를 통해 대단한 능력을 갖게 되지만, 그 능력을 결코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개인적 원한과 분노를 해소하려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기 바쁘다.

그렇지만 자신의 일과 관련없는 선량한 이들을 해하지는 않고, 오직 자신에게 해를 끼진 이들만을 잔혹하게 처단한다. 그래서 선의지나 정의감과는 전혀 무관하게 행동하는데도, 그 결과는 대개 정의구현이 되는 그런 히어로들, 이들이 바로 안티 히어로다.

절대 안티 히어로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영웅들, 대표적으로 슈퍼맨, 원더우먼, 캡틴 아메리카, 배트맨 등 기본적으로 선과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고전적 형태의 영웅의 이야기는 현재 그리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평단의 평 역시 좋지 못하다. 이른바 ‘평면적’인 캐릭터 때문이다.

반면 이기적인 동기로 움직이고, 잔혹한 복수와 폭력을 서슴없이 행하는 능력자들의 이야기가 훨씬 큰 인기를 얻는다. 선과 악이 뒤섞인 인간의 불완전한 심리를 ‘입체적으로’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악의 현실을 순수한 정의감으로 이겨내는 고전적 영웅들에 대한 기대감은 사라지고, 악의 현실을 악으로 응징하는 안티 히어로에 기대감을 갖는 세태는, 오늘날 인간 이해의 변천을 반영한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사람이 순전한 선과 의로움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일면 기독교적이고 일면 계몽주의적인 믿음은 점차 퇴색하고 있다. 대신 사람은 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악을 저지르고 향유하려는 속성이 있고, 이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실존철학적이고 포스트모던적인 인간 이해가 점점 더 대중문화계를 지배하고 있다. 안티 히어로의 대두는 이처럼 인간 이해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는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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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히어로로 인기를 얻은 데드풀과 베놈.
◈악한 영웅: 선악 판단이 모호한 영웅

베놈은 국내 관객들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초인 캐릭터다. 마블 코믹스 원작에서의 베놈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베놈의 내력은 심비오트(Symbiote)라는 외계종족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심비오트라는 이름은 원래 함께(sym)라는 뜻의 접두어와 생물체(bio)라는 용어가 합쳐져 ‘공생체’라는 뜻을 갖게 된 영단어인데, 마블 세계관에서는 타종족에게 기생해서 숙주를 잡아먹으며 연명하는 외계종족을 지칭한다.

이 심비오트들 가운데 베놈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체가 지구인들에게 기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영화 <베놈>의 서사를 이룬다. 원작 코믹스에서 베놈은 숙주들을 갈아타면서(데드풀-스파이더맨-데드풀) 이들이 가진 성격과 능력을 흡수하고, 그 후 <베놈>의 주인공인 열혈기자 에디 브룩(톰 하디 분)에게 기생한다.

베놈은 숙주의 신체능력을 극도로 높여줄 뿐 아니라, 숙주의 정신을 포악하게 만들어 식인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정의감 넘치는 인간이었던 브룩의 영향 때문인지, 그와 결합한 베놈은 일반인은 건들지 않고 오직 악인만을 잡아먹는 괴생물체로 자리잡게 된다.

흥행 속도에 비해 영화의 감상평은 생각보다 저조하다. 특히 평론가들의 평이 좋지 않은데, 대다수 평론가들이 지목하는 이유가 바로 베놈이 원작 코믹스보다 덜 포악하고 잔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악을 따지기보다는 식욕에 따라 사람을 잔혹하게 잡아먹고 적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기괴한 괴물의 묘사를 바랐는데, 생각보다 너무 온순한 안티 히어로로 표현돼 캐릭터의 입체감과 영화의 긴장감이 사라졌다는 데 대해 평단과 관객들 모두 다소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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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놈>은 세간의 예상보다 덜 잔혹하고 기괴해서 실망스러운 평가를 얻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내용 자체보다도 영화에 대한 이런 반응이 더 큰 관심을 끈다. 악독한 외계종족이 정의로운 인간과 결합해서 그나마 선한 방향으로 중화됐다는데, 관객들은 원작의 매력을 살리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있다. 피가 튀고 신체가 절단되는 고어하고 그로테스크한 식인장면을 원했는데, 식인 장면의 묘사가 너무 얌전하게 이루어진 데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인간을 더 악독하고, 자극적이고, 잔혹하게 표현해야만 잘된 영화라는 평을 받는 것일까?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 이해의 패러다임이 변했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19세기까지 이어져온 전통적인 인간 이해의 기본 패러다임은 선한 심성에 대한 신뢰감이다.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악을 멀리할 수 있으며, 기어이 선의 완성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인정되어 왔다.

물론 선에 이르는 방식은 각기 다르게 지목되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철학적 사유와 실천을 통해 선의 완성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기독교인들은 철학이 아닌 신앙을 통해서만, 은혜를 통해서만 진정한 성화(聖化)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칸트, 헤겔을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끝없는 진화와 발전을 통해 인류가 완전하게 도덕적이고 선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서로 방식은 달랐지만, 셋 모두에는 인간이 완전한 선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시 말해, 비록 인간의 현실은 악으로 가득차 있지만 이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경지, 초월적인 세계, 초월적인 역사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기독교회가 가르쳐 온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 즉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와 하늘의 도성에 참예함에 대한 약속은 인간이 지고의 선을 힘입을 수 있다는 소망어린 인간이해를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해왔다.

◈초월적 영웅: ‘틀림’이 아닌 ‘다름’의 이름으로

이런 인간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실존철학으로부터다. 실존철학의 선구자라 인정받는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기독교가 가르치는, 윤리적으로 완성된 삶을 살 수 없음을 알고서 극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래도 그는 각 개인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이 깊은 절망감이 오히려 신앙의 비약(leap of faith)을 이룰 수 있는 관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로써 그는 죄 앞에서 절망하는 죄인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 이해를 펼치려 하였다.

이처럼 기독교적 테두리 안에 있던 키에르케고르의 가르침을 반기독교적으로 전환시킨 인물 가운데 하나가 니체다. 니체는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적 완성이란 하나의 목적론적 허상일 뿐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모든 윤리적-목적론적 이론과 교설들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운 인간, 즉 초인(der Übermensch)의 등장을 예언했다. 초인은 외부로부터 부여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윤리적 의무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운 인간, 즉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완전한 권력을 획득한 인간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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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의 등장을 예견한 철학자 니체, 그리고 한때 니체의 이상이 실현된 인물로 평가받았던 히틀러.

니체의 사상은 훗날 기존 유럽의 국제질서를 타파하고 독단적 파시스트의 길을 갔던 히틀러의 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누구도 윤리적이라 하지 못할 독단적인 정의에 함몰된 히틀러의 삶은, 원래 니체가 말한 초인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독일 사람들에게 초인의 등장이라고 여겨질 만한 것이었다.

이 초인이라는 뜻의 독일어 ‘der Übermensch’를 영어로 번역하면 ‘Superman’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1930년대 미국에서 창안된 슈퍼맨은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초인적 영웅의 모습을 구현한 캐릭터였다.

슈퍼맨의 모습은 사실 니체가 말한 초인과는 완전히 다르게 선의지와 정의구현의 열망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는 미국인들의 정서가 독일과는 다르게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덧입은 영웅의 모습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슈퍼히어로 코믹스 초창기의 선한 히어로들, 슈퍼맨, 원더우먼, 캡틴 아메리카와는 다르게 어둡고 음울하며, 인간의 심성에 대한 비관적이고 체념적인 정서가 반영된 중립적인 히어로들, 배트맨, 아이언맨 등이 등장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에는 성향이 선인지 악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괴하고 비틀린 심성을 가진 초인들이 인기 히어로로 부각되고 있다. 금번 개봉한 영화 <베놈> 역시 이런 조류의 일환으로 탄생한 안티 히어로다.

히어로물의 조류를 보면, 선과 악의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순전히 자기 삶의 기준에 맞춘, 지극히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히어로들이 점차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는 니체가 바라던 초인이 오늘날 일반 관객들이 바라던 모습에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만 좋으면, 혹은 쾌감만 선사하면 악의 성향이 오히려 인기를 얻고 있다. <베놈>에 대한 실망스런 평론 역시 현 대중문화계의 동향과 깊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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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하면 악할수록 인기를 얻는 안티 히어로 캐릭터 베놈.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악인들만 응징하는 선역으로 전환한다.

이제는 ‘악’이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포스트모던적인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고, 그 가운데 히어로들마저 선과 악의 구별이 모호해진 상태다. 그리고 이런 모호성은 ‘다름’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고 있다.

이는 기독교적 삶의 가치, 즉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과 악의 명백한 구분 기준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회색주의적 인간 이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서사의 개연성은 제대로 잡혀있지 않지만, 현재 개봉된 <베놈>의 주인공의 모습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선과 악을 구별하려 하고, 결국은 선역으로 돌아선 느낌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