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우리는 지금까지 ‘고난을 통해 배우는 순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는 결국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완전하신 주님도 고난당하심으로 순종함을 배웠을 때, 완전하게 되셨다(히 5:8).

고난 없는 순종은 없다. 오늘은 고난을 통해 배우는 순종, 마지막 시간으로 ‘기쁨’에 대해 말한다.

도대체 이 고난의 학교에 입학이 무엇이 기쁜가? 고난만 가득할 때, 기뻐할 수 있는가? 키에르케고어의 <고난의 복음>은 총 7개의 강화가 있는데, 모든 강화는 결론으로 기쁨을 다루고 있다. 고난의 학교에서 순종을 배움으로 누리는 기쁨은 이렇다.

먼저, 고난의 학교에서의 교육 기간을 생각해 보자. 고난의 학교에서의 졸업은 언제 하는가? 사실 학생은 언제 공부가 끝나는지 이것이 궁금하다.

“이 학교에서 졸업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계속 수업을 들어야 할걸.” 아마 어떤 학생이 이렇게 대답한다면, 이 말 속에는 최대의 고난이 담겨 있다. 적어도 고난이 언제 끝나는지만 알고 있어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고난이 언제 끝나는지 도대체 얼마나 견뎌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 그것은 최대의 절망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교육을 위해 준비된 고난의 학교는 졸업이 불가능하다. 졸업이 가능하다면, 죽음과 함께 졸업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것은 최대의 절망인가?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알고 인생을 견디면서 고난 중에 무거운 짐을 지며 고통당해야 하는가?

전문가들은 성장 기간의 길이는 피조물의 특성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고 추정한다. 동물의 생애에서 가장 낮은 형태에 있는 것들은, 순간에 태어나서 거의 같은 순간에 죽는다. 예를 들어 하루살이다.

낮은 단계의 동물들은 빨리 성장한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은 가장 느리게 성장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통해 인간이 창조에 있어 가장 고차원적인 피조물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학교에 대해 말한다. 낮은 단계의 직업에 종사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학교에 간다. 그러나 더 고차원적인 직업에 종사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은 긴 시간 동안 학교에 가야 한다.

따라서 학교 기간의 길이는 그 사람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와 직접적 관련이 있다. 그때 고난의 학교가 평생 지속된다면, 이것은 이 학교가 가장 고차원적인 것을 위해 교육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진실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육하는 것은 이 학교뿐이다! 어떤 학교 교육도 이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세상의 지혜는 평생 동안 교육이 지속되어야 한다면, 도대체 유익이 무엇인지 성급하게 묻는다.

“이건 참, 이해가 안 되는 군. 그럼 이 학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뭐지? 졸업도 못하는데 언제 유익을 얻는단 말인가?”

영적으로 이해하자면,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분이 먼저 그 길을 가셨고 평생 고초를 당하시다 돌아가셨다. 이 학교의 졸업 날짜와 교육 내용은 그분이 정하신 것이다. 오직 그분만이 이 부분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교육받는 기간이 길어 학생들이 불평하면, 선생님은 “얘들아,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 너의 앞에 긴 인생이 놓여 있다”고 말하듯이, 주님은 더 정직하게, 더 온화하게 고난당하는 자에게 말한다.

“얘야,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 시간은 충분하다. 결국 영원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선생이 말할 때에는 거짓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입술에는 어떤 거짓이 없다(벧전 2:22). 선생이 학생 앞에 놓여 있는 긴 시간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영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만약 영원이 존재한다면, 물론 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이미 말했다시피, 기간이 가장 긴 학교는 최고의 것을 위해 교육한다. 시간만큼이나 길게 지속되는 학교는 영원을 위해서만 교육할 수 있다. 인생을 위한 학교생활의 결과물은 시간 안에 나타나지만 평생 지속되는 고난의 학교는 영원을 위해 교육한다. 이 학교는 영원을 위해 적합하다.

이 학교는 또한 이것에 의해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학교에 가면서 늙어갈지라도, 그것은 당연히 그렇더라도, 영원의 학교에서 사람은 더 젊어지게 된다. 그것은 당연히 그렇다. 이런 점에서 영원한 삶은 ‘회춘’이다. 그가 죽을 때는 가장 젊어지고, 저 하늘에서는 가장 젊게 산다.

그렇다면, 학생이 배움을 통해 모든 유익과 기쁨을 얻을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계속 늙는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계속 젊어지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그렇게도 조급한가? 너무 오래 지속되는 학교 기간에 조급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사람은 학교 생활 기간이 너무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람이 매년마다 더 젊어진다면! 이보다 더 고통을 완화시킬 만한 생각이 있겠는가? 이것은 가장 긴 학교생활 기간을 가장 짧게 만들 만큼 강력하다!

가장 짧은 학교생활 기간이 단 1년 정도 계속되었을 때, 배우는 자는 1년 더 나이 든다. 그러나 가장 긴 학교생활 기간이 70년 지속되었고 배우는 자는 매년마다 더 젊어질 때, 그때 이런 학교 교육은 명백히 가장 짧은 기간보다 훨씬 더 짧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덧붙이자. 우리가 이런 회춘에 대한 생각에 부풀어 너무 고공비행을 하지 않도록 한 가지만 더 말해 보자.

고난당하는 중에 정직하게 회개하는 사람들, 반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더 젊어질 것이다!”

학생이 더 젊어지기는커녕, 늙는 것보다 더 악화되어 속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난을 당하면 늙는다고 말한다. 아이를 키우다가도 아이에 의해 고통당하면,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젊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 앞에 정직한 자기 고백이 필요하다. 오직 그 때만이 더 젊어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러나 기쁨은 여전히 남는다. 기쁨이 여기 이 글의 맨 끝에 남은 것처럼, 기쁨은 맨 끝에 남는다. 다른 어떤 학교도 고난의 학교만큼이나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다른 어떤 학교도 영원을 위해 교육하지 않는다는 것, 영원의 학교에서 배우는 자는 회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

고난을 제외한 어떤 숙련도 어떤 지식도 다른 아무 것도, 진리였고 진리이셨던 분만큼, 모든 것을 아셨지만 여전히 한 가지를 배웠던 분, 그러나 다름 아닌 그가 당한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던 분만큼 진실하게 영원을 위해 교육하지 못한다.

성서가 말하듯이, 순종은 그분의 굴욕에 속한다. 그분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8). 인간이 된다는 것은 진실로 그분의 굴욕이다.

따라서 순종은 오직 고난으로만 배운다. 주님께도 이 말이 맞다면, 하물며 죄가 있는 인간에게는 얼마나 맞는 말인가! 오직 고난만이 영원을 위해 교육한다. 왜냐하면 영원은 믿음 안에 있으며 믿음은 순종 안에 있고 순종은 고난 속에 있기 때문이다.

순종은 고난과 분리될 수 없다. 고난 중에 있는 순종이 순종이고, 순종 중에 있는 믿음이 믿음이고, 믿는 중에 있는 영원이 영원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