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강철비
▲영화 <강철비>.
본지에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를 연재중인 박욱주 박사가 추석연휴를 맞아 TV에서 상영중인 영화 <강철비> 평론이 회자되고 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

※ 1.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돼 있습니다. 2.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전쟁: 대북 선제 타격과 대한민국 핵무장의 기독교적 정당성


최근 남북 관계가 해빙 무드이지만, 한창 전쟁위기설까지 있던 때 개봉한 영화 <강철비>의 서사는 한반도 정세가 극단의 상황으로 달려갈 때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시뮬레이션 시나리오 형식으로 풀어나가고 있어, 영화의 현실감과 흥미를 더한다. 영화의 서사는 전반적으로 크게 치우침 없이 극적 요소들을 적절하게 섞어 가며, 한반도 핵전쟁과 관련된 현실감 있는 예견을 전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본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남북관계에 대한 현실인식의 강조다. 양우석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듯, <강철비>는 남북한 주요 인사 간의 개인적 우정이나 순진한 동포애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편의 이익과 생존에 충실한 각 정치세력들 간의 역학관계를 서사의 중심부에 위치시킨다.

이런 역학관계에 대한 지혜롭고 현실적인 인식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뭇 기독교인들의 현실적 생존을 위해서뿐 아니라,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북한선교에 대한 전망 수립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영화 강철비
▲영화 <강철비> 중 한 장면. 북한 쿠데타 주동자 리태환(김갑수 분). 한국 침략을 확고하게 결심한 인물이다. 한국민은 이런 침략자에 대항해서 무력을 행사할 기독교적 권한을 갖는다.
◈신앙과 매복: 대북 선제 타격의 성서적 정당성


영화 <강철비>에는 한국을 북한의 핵공격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중대한 결단의 장면이 두 차례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기독교적 관점으로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들인 까닭에 인상깊게 다가온다.

첫째는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 이의성(김의성 분)이 차기 대통령 당선자 김경영(이경영 분)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에 대북 선제 타격을 요청한 일이다. 김경영은 선제 타격이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 기회를 완전히 포기하는 결정이라고 질타하나, 이의성은 한반도에서 핵전쟁 위협을 소멸시킬 수 있는 길이라 믿고 선제 타격 요청을 결정한다.

만일 북한의 핵무기가 실제 사용을 자제하려 하는 지도자에게 맡겨져 있는 상황이라면, 선제 타격은 최후의 수단으로 보류되어야 함이 분명하다. 이런 경우에는 영화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에 나온 핵잠수함 부함장 헌터(덴젤 워싱턴 분)의 대사가 그대로 적용된다. "핵무기가 존재하는 현대에 진정한 적이란 전쟁 그 자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1994년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북핵 선제 타격 계획의 실행 보류는 한국민에게 말 그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역사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만일 당시 북핵 선제 타격이 실행되었다면 한국민 사망자가 최소 50만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니, 이런 경우 선제 타격이란 절대적으로 회피해야 할 선택지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강철비>가 보여주는 상황은 북한 군부 수뇌 리태환(김갑수 분)이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 상황이었다. 리태환은 한국에 핵무기를 사용하고 전면전을 일으키려는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낸 인물이다.

이처럼 전면전이 확정된 상황에 이루어진 현직 대통령 이의성의 북핵 타격 요청은, 비록 영화 속에서 북한의 빠른 핵무기 발사로 인해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정치적으로든 신학적으로든 분명한 정당성을 가진 결정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적의 대규모 침입을 막지 못할 상황일 경우에는 적극적인 자세로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퀴나스는 방어자 측의 '매복행위(insidiis)'가 가진 정당성을 주장한다.

"(적의 부당한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선제적) 매복행위를 (부당한 탐욕을 위해 속이는) 속임수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그런 매복행위가 공의에 어긋난다거나 질서있는 행동에 어긋난다고 할 수도 없다(<신학대전> 2-2부, 제40문 3항)."

다음으로 영화 속에서 인상깊었던 결단의 장면은 영화 결론부에 차기 대통령 김경영이, 리태환의 쿠데타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북한 1호(최고 지도자)를 치료하고 북으로 반환하는 조건으로, 북한의 핵무기 가운데 절반을 받기로 한 대목이다.

일단 그 실현 가능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북한의 것을 나누든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든, 아니면 미국의 것을 다시 도입하든, 한반도의 현 정세에서 핵 억지력을 갖추기 위한 한국의 핵무장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원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일로 판단된다.

기독교는 세상의 영혼들에 대한 차별 없는 박애를 최우선시하는 신앙을 가르친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 신앙은 인류가 원죄로 인해 극한 타락의 상황에 처해 있음을 전적으로 수긍하기도 한다. 즉 기독교는 죄의 현실을 벗어나려 하는 영혼, 믿음을 갖고자 하는 영혼, 복음에 귀를 기울이려 하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개방적이고 박애적인 자세를 유지하지만, 죄악과 탐욕을 기반으로 타인을 억압하고 해하려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공의를 바탕으로 방어와 경계의 자세를 고수한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 신앙은 자기 방어를 위한 무력의 확보 및 행사를 절제된 수준에서,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경우 단호히 결행할 것을 허락한다.

남북 핵문제 해결 노력은 영화 <강철비>가 보여주듯, 결국 냉정한 정치적∙군사적 계산을 바탕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정치적 현실 측면에서나 기독교 신앙의 입장 모두에서 타당한 행사다.

민족의 대동단결, 민족의 화해와 평화, 원래 하나였던 민족의 재결합 등과 같은 민족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낭만적 전망은 적어도 과거 20세기에는 통용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분단된 지 7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현 시점에서는 이전처럼 흡입력을 갖지 못하는 듯하다.

영화 강철비
▲영화 <강철비>의 두 주인공, 한국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 곽철우(곽도원 분, 왼쪽)와 북한 정찰총국 정예요원 엄철우(정우성 분). 각각의 정치적 입장을 바탕으로 남북한 전쟁 발발을 막기 위해 협력한다.
◈신앙과 민족: 민족 화해와 통일이라는 낭만가(歌)의 허실

북한의 민중은 20세기 내내 한국민의 동포이자 가족으로 인지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분단과 정치적∙군사적 대치에도, 북한에 가족과 친지를 둔 채 한국으로 피난한 이들에게 북한 민중은 여전히 가깝고 그리운 가족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이들이 거의 노년기에 이른 현재 상황에서, 한국민 다수에게 북한 민중이란 동포나 가족보다는 한때 한 국가 국민이었으나 현재는 이질적인 외국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인식되는 중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유사한 문화양식을 향유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정치적 차원에서는 점차 그들이 한국민과 다른 집단으로 인식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재중동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결국 민족 이데올로기란 정치적 상황에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지극히 가변적이고 잠정적인 가치를 갖는 사고체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오늘날 남북의 정치현실을 통해 확인된다. 반면 성서가 가르치는 복음은, 시대·인종·민족을 초월해 전 인류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자들 모두에게 유효한 보편적 가치로 제시된다.

영화 <강철비>는 역동적이고 가변적인 정치현실에 귀속되어 있는, 그래서 절대적이거나 영원하지 않은 민족 이데올로기의 허실을 대담한 방식으로 폭로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다. 영화는 남북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화해와 통일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에 경도된 나머지, 엄밀한 군사적 대립의 현실을 망각하는 이상주의적 태도의 경계를 권한다.

그렇다 해서 <강철비>의 메시지가 단순히 북한을 적대시하고 남북의 화해 시도 자체를 거부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분단과 핵공격 위협을 바탕으로 긴장관계를 조성해 다수의 민중을 억압하고 희생제물로 삼는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의 행각을 경계하고 방지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강철비>는 현실에서 점차 희석돼 가는 한반도의 민족 이데올로기를 냉엄한 자세로 바라본다. 영화 속에서는 이 민족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는 인물로 차기 대통령 당선자 김경영(이경영 분)이 등장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김경영의 민족 이데올로기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면모를 다분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역시 현실적 계산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 저하되고 있는 경제성장률과 출생률, 즉 망해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타개할 획기적 기회로, 남북한 화해와 통일을 인식하고 있다. 결국 민족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정치적 계산에 의해 지지되는 것이지, 무조건적 당위성을 가진 진리가 아님이 김경영의 대사를 통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