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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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평생 성경과 더불어 노자(老子), 장자(莊子)를 애독했습니다. 지금도 그가 살았던 유택(遺宅)의 책꽂이에는 그가 애독했던 그 책들이 꽂혀 있다고 합니다.

그는 노·장자(老·莊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기독교의 산상수훈과 결부지어 사상의 일치를 꾀하려 했고, 노년에는 그의 생각과 삶을 산상수훈처럼 단순화시켜 직접 가난한 삶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톨스토이로 하여금 ‘동·서양의 삶을 산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한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오산학교 3대 교장이었던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역시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노자, 장자를 산상수훈과 연결지어 30년 이상 YMCA에서 강의했고, 사후 그의 제자 함석헌(1901-1989)이 그의 뒤를 이어 그 강의를 계속했습니다.

함석헌 사후에는 김흥호 이화여대 교수가 그 명맥을 이었습니다. “예수쟁이는 싫지만 예수는 좋다”고 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 1948)는 힌두교도였으나 산상수훈의 영향을 받아 평생 ‘무소유’와 ‘무저항 비폭력주의’를 고수했습니다.

기독교에 우호적인 불교인들은 종종 그들의 ‘무소유 사상’과 기독교의 ‘산상수훈’을 연결지어 두 종교의 합치를 꾀하려 했고, 극단적인 불교 우월주의자들은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C. Prophet, Elizabeth)’ 운운하며 예수의 ‘산상수훈’과 불교의 ‘무소유주의’를 동일시하여 후자를 전자의 응용쯤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근자에 불교의 한 승려가 산상수훈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희기(晞覬)한 소식도 들려옵니다. 이러한 예는 모두 산상수훈은 어떤 종교에서나 ‘이현령 비현령’ 하기 쉽다는 증거입니다.

산상수훈은 과연 노·장자(老·莊子)의 무위자연 사상, 불교의 무소유 사상과도 맞아떨어지고 간디(M. Gandhi), 퀘이커 교도들(Quakers)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와도 맞아 떨어지고, 계몽주의자들의 윤리 강령과도 맞아 떨어집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산상수훈이 바울신학의 이신칭의 같은 교리적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순수 예수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다고 호들갑을 떨며, 산상수훈을 기저로 순수 기독교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이런 왜곡들은 모두 산상수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산상수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그의 기독교 사상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고 한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만일 산상수훈을 단순한 그리스도인의 도덕률쯤이나 여타 종교들과 공유될 수 있다고 본다면, 그는 계몽주의자, 종교다원주의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물론 정통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라 해서 모두 산상수훈에 대한 원만한 이해를 가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위의 입장들에서는 비켜났지만, 여전히 2% 부족한 견해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산상수훈을 구약의 ‘행위 율법’보다 더 실행 불가한 고차원의 ‘마음의 율법’으로 보고, 사람으로 하여금 절대 절망에 빠뜨려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는 신약(新約)적 몽학선생(갈 3:24) 정도로 치부합니다. 그들이 산상수훈을 단순 행위규범으로 보지 않은 것은 옳지만, 가르침의 본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모든 성경이 그러하듯, 산상수훈 역시 기독교의 핵심인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도’를 지향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에서, 우선 천국을 ‘물질 가난’이 아닌 ‘심령 가난 ’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물질과 부를 종교 생활의 장애물로 여기는 여타 종교 가르침과 차별화 되는 부분입니다. 결코 부가 천국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는 말씀을 하여 부(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듯하나, 뒤이어 나오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는 말씀을 통해 그 말의 진의를 드러내셨습니다.

사람 보기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무지 어려워 보여도, 하나님에게는 어렵지 않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 눈에는 구원받는데 큰 장애물로 보이는 것도 전능하신 구원자 하나님에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천국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좁은 문’ 교훈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적 행위’로 힘쓰고 애써도 못 들어간 천국을,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능력, 곧 ‘믿음’으로 들어 갈 것을 말씀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애써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사람들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눅 13:24, 29).”

또 ‘심령 가난’은 오늘날 유행하는 ‘내려놓기’ 곧, ‘마음 비움, 탈욕(脫慾, Freed from Desire)’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의(義)의 부재’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영적 결핍감’입니다.

인간의 심령을 채우는 실체가 의(義)이기에 '의의 부재'가 그로 하여금 영적 결핍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타락하여 의가 상실된 채로 태어나도, 의의 부재감 곧 ‘영적 결핍’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의 부재(義 不在)가 갖다 준 이중적 비참입니다. 죽은 자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하며 사람이 ‘영적 결핍’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죽은 자가 자기의 죽은 것을 자각한다는 것처럼 모순되게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심령 가난’, 곧 ‘의 부재감(義不在感)’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후, 과거 자신에게 의가 없었음을 알게 된 사후적 지식입니다. 비유컨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후 자기가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계 1:18)과 같습니다. 실제로 ‘의의 부재’는 ‘영적 죽음’이고, ‘의를 입음’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중생'이기에, 이 비유는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의 부재감’은 단지 과거지향적인 반추적(反芻的) 느낌만이 아닌, 현재적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의를 갈망하게 되며, 그 갈망에서 의의 결핍감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의의 결핍’이라기보다는 ‘의의 더욱 갈망(more longing for righteousness)’입니다. 이는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한 번 먹고 끝나는 사람은 없다’는 작금의 유행어처럼, ‘의롭다 함을 받으면 더욱 의를 갈망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심령 가난’은 의(義)의 ‘채워짐’과 ‘갈망’의 끝없는 순환 사이에서 체득되는, ‘낀(wedged between) 경험’입니다. 예수님이 ‘심령 가난(마 5:3)’을 ‘의에 주리고 목마름(마 5:6)’과 동일선상에 두고 있음은 우연이 아닙니다. 반면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 자,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는 당연히 ‘심령 가난’ 곧 ‘의의 결핍감과 의의 갈망’이 없습니다.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심령이 가난한 자와 천국

‘심령(spirit)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는 탈욕(脫慾)하여 ‘해탈’하면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이른다는 불교의 가르침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의(義)의 ‘채워짐’과 ‘갈망’의 순환 사이에서 심령 가난을 경험하는 자에게 천국이 약속된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거룩한 길이기에 의롭게 된 자만 들어가기 때문입니다(사 35:8). 성경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연결지우고(마 6:33), 하나님 나라를 ‘의가 왕 노릇하는 나라’로 지칭한 것도 천국의 기초가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사 32:1)”.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애창되어 온, “돈으로도 못 가요, 맘 착해도 못 가요, 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어린이 찬송가는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천국 가는 핵심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거듭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의를 갈망하는 자에게는 천국이 현재적으로 경험된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단지 죽어서나 경험하는 미증유의 세계가 아닌, 현재에 ‘의와 성령’으로 경험됩니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나라를 현재적인 경험으로 서술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오늘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가 천국에 대해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갖는 것은, 그들이 천국에 대한 무슨 환상을 보거나 계시를 받아서가 아니라, 의(義) 속에서 성령으로 그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어떻게 경험하고 확신합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