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욥기 7장 1-21절 강해


요절: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8절)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두 번째 답변입니다. 욥은 여러 달째 피부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 중 순간마다 자신을 사랑하시고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있습니다. 침 삼킬 동안도 놓지 않고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1. 여러 달 밤에도 고통하는 욥

1-6절을 보면, 욥은 자신의 삶을 힘든 노동자나 품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욥은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고용돼 하루의 노동량을 묵묵히 감당해야 하는 품꾼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종은 쉴 수 있는 저녁 그늘을 바라고, 품꾼은 삯을 기다립니다. 노동자는 저녁이 오면 쉬지만, 욥은 저녁이 와도 쉬지 못하고 밤새 일하는 품꾼과 같습니다.

욥은 재난이 자신에게 닥친 이후로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산은 여전히 상실된 채로 있었으며, 자손 또한 다시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육체의 질병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친구들과의 관계마저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욥은 이제 절망의 벽에 부딪혀 지나간 날들이 마치 열매없는 나무와 같이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달째 고통으로 밤이 고달팠습니다. 그는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였습니다. 전신에 퍼진 피부병으로 인해 전전반측하였습니다. 욥은 대부분의 낮 시간 동안 친구들과 변론함으로써 심신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는 추한 몰골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밤은 더 큰 형극의 시간이었습니다. 여느 병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의 질병은 밤에 더욱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의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습니다. 구더기는 흰 색의 길고 미끄러운 형태의 벌레로, 피부가 곪은 데서 기생합니다. 흙조각은 기와 조각으로 종기가 난 피부를 긁어 지저분하게 된 욥의 몸을 비유한 것입니다.

욥의 질병 상태가 상당히 악화돼 있었습니다. 피부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가 다시 터졌습니다. 욥은 자신의 몸에 피부병이 발병한 이래 여러 달이 흐르는 동안 이러한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쳤습니다. 날은 베틀처럼 허무하게 지나가고, 그의 삶은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욥은 아무런 회복 없이 보낸 지난 몇 달이 자신에게는 전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언제 그는 자신의 고통이 끝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욥은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욥

7-12절에 보면 욥은 눈을 하나님께 돌려 기도합니다. 그는 바람과 같이 일시적 존재임을 생각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욥은 바람처럼 자신의 생애가 짧고 허무하고 덧없음을 말합니다. 욥은 자기 병이 치유 불가능하다고 예견했습니다. 그는 죽음만이 고통을 모면하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제 죽음이 임박했음을 고백합니다. 욥이 죽으면 지금까지 욥을 보았던 자들은 다시는 욥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다시 자신을 찾아도, 이 세상에서 자신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현재 욥은 영적·육적 생명의 위급함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구름처럼 저승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시 이승의 집으로, 이승의 자기 처소로 돌아올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고 합니다. 욥은 자신이 바다가 아니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나일강이나 유브라데스 강을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관개 시설이 발전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이들 강들은 우기 때에 삽시간에 흘러 넘쳐 주변 지역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우천시에 특별한 신경을 써서 강 수위를 관찰하고 그에 따른 대비책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이 흉용하고 격랑하는 바다를 지켜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용은 바다와 마찬가지로 그 성질이 난폭하고 거세, 인간이 제어하기 힘든 바다의 큰 생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욥은 어부가 큰 바다 괴물을 잡을 때 그 시선을 집중하며, 때로는 매로 때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무 혹독하고 부당하게 다루고 있다고 항변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다나 괴물로 보지 말고, 진흙으로 보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자신이 진흙처럼 연약한 존재이니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진흙으로 만든 토기와 같고, 잠시 후 걷는 장막과 같은 일시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는 고통할 때 주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3. 생명의 주관자 하나님을 믿는 욥

13, 14절에 보면 욥은 낮에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세인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밤 역시 그가 갈구하던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전신에 퍼진 피부병이 밤중에 발작을 더 심하게 일으켜, 그는 속히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한 순간에도 영육의 평안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안한 잠을 자지 못하고 꿈과 환상에 시달렸습니다.

욥은 밤에 단잠을 자지 못하고 불쾌하고 무서운 꿈을 꾸었습니다. 이것은 욥의 병고로 인한 자연스런 후유증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꿈으로 찾아와 괴롭힌다고 합니다. 그는 밤에도 뼈를 깎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욥은 차라리 숨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욥은 생명을 싫어하였습니다. 자신의 나날이 허무할 따름이라고 합니다.

욥은 질병의 악화, 정신적 고통 심화, 신앙적 회의로 자신의 생명을 혐오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사람이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자신을 이 세상에서 떠나게 놓아 달라고 합니다. 욥은 자신의 현재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따라서 그것을 탈출할 수 있는 죽음의 방도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욥에게 삶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에게 죽음을 허락할 수 있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심을 확신했습니다. 생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한 것입니다.

4. 욥을 존귀한 자로 단련하시는 하나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17-19절)?”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시느냐고 합니다. 어찌하여 사람을 마음에 두시느냐고 합니다. ‘크게 여기다’는 존귀하게 하다(magnify)는 뜻입니다. 인간은 벌레와 같이 작고(시 84), 메뚜기 같이 미천한 존재입니다.(시 90:10) 이런 인간이 이렇듯 존귀함을 받는 것이 인간의 무한한 축복입니다.

‘마음을 두시고’는 히브리 관용법에 따르면 관심을 기울이다(pay heed to), 배려하다의 뜻입니다. 시편과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을 존귀히 보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해 기쁨과 감사를 표현합니다. 실로 보잘 것 없는 인간을 마치 하늘의 천사보다도 더 특별히 여기사 권고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대해 찬양합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관심과 눈길이 도리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불화살과 같았습니다.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으며, 그 분의 눈길이 존속하는 한, 그가 유일한 탈출구로 인식한 죽음마저 불가능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면 축복도 크게 주시지만, 고난도 크게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광을 바란다면, 고난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사실 욥을 대단히 여기셔서, 그가 고난 중에서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욥은 계속되는 불평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고 자신을 마음에 두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욥은 아침에 눈이 뜨면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순간 순간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욥은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아침마다 자신을 권징하시고 단련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욥에게서 눈을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침 삼킬 동안도 욥을 놓지 않으십니다. 침 삼키는 그 순간도 하나님은 욥을 붙잡고 고통으로 단련하십니다.

욥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순간 순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단련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질병은 우리를 귀히 여기고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단련입니다. 하나님이 순간마다 오는 고통을 통해 정금같이 그를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없다면 성숙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련이 없으면 연약합니다. 하나님이 욥의 더욱 강하고 순수한 내면으로 성숙되기를 원하십니다.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오요한
▲오요한 목사.
5. 욥을 과녁 삼으시는 하나님

20, 21절에 보면 욥은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만약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무슨 해가 되느냐고 묻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왜 자신을 활을 쏘는 과녁을 삼으시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과녁 삼으셔서 죄인들에게 쏘는 활을 쏨으로,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비방의 표적이 된 것 같이, 욥은 비방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질병으로 무거운 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허물과 죄악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은 죽을 것이라 고백합니다. 그는 사람을 살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을 과녁 삼으신 것은, 다른 애매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위로를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욥이 고통 중에도 원망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랑스런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고난 속에 있는 자들이 욥을 통하여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신앙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이제 그를 찾으셔도 그는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때가 늦기 전에 자신을 살려달라고 하십니다. 욥은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욥에게 주어진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은 고로 그 구원을 베푸실 수 없습니다. 욥에게 주어진 사단의 시험이 온전히 성취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욥의 신앙은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욥은 계속하여 자신이 고난받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침묵 속에 그를 섭리하고 계시며, 구원을 준비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순간마다 사랑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오요한 목사(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로마서 강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