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하신 주님조차, 세상에서 단 한 가지 배울 것이 있었다

입력 : 2018.09.14 17:41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제자도 (14) 그리스도의 순종

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분이시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다시 말해, 그분은 배울 것이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는 전지전능한 분께서 배울 것이 있다니! 그분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 고난 없는 순종 없다.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고난도의 진리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떻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는지 생각해 보자.

그가 때가 차서 이 땅에 왔을 때,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을 때(요 1:10-11),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고(빌 2:7) 그의 말씀이 효과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수행할 때, 구원의 유일한 분이신 그가 세상에서 쓸데없는 자처럼 있을 때,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자처럼 있을 때,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아니 더 강하게 말해 캐묻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악한 선동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는 당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

아, 사악한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향해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그래서 그가 죽음에 이른다 해도, 캐묻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조소 대상이 되었을 때만큼 소름끼치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사악한 반역도 세상의 구주가 캐묻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게으름뱅이들을 자기 주변에 끌어 모으는 일을 해야 할 때만큼 소름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일이 그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일은 오늘날도 반복되고 있다. 이 한국 땅에서 말이다! 차라리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운 그 분을 못 믿겠다고 소리지르라! 도저히 그런 기독교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백하라. 차라리 그런 그 분을 향해 반역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들은 복음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스스로. 하지만 그 분의 가신 순종의 길은 가지 않는다. 캐묻기를 좋아할 뿐이다. 열심히 신학공부도 하고 성경도 본다. 그러나 그 분의 길을 따라가는 삶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만 교회에 우글우글하다는 것, 이것을 생각해 보라! 상태는 그때보다 더 심각해진 것이 아닌가!

어쨌든, 주님은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사시다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때 누군가 그를 조롱하면서 포도 식초를 가져다 준다.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든, 들뜬 나머지 길거리에 뛰쳐나와 고개를 내밀며 이리 저리 살펴보는 캐묻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한다.
“아이고, 안 됐네. 저렇게 죽게 되는구먼. 내가 저분을 반대한 것은 아닌데. 어찌 저렇게 되었을까. 휩쓸리지 말고 가서 우리 일이나 합시다.”

캐묻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이리저리 쑥떡거린다. 아, 그러나 포도 식초가 캐묻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역겨운 동정만큼이나 시지 않다!

맞다, 그는 당하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 복의 주인이셨던 그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과 그를 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저주가 되었을 때, 동시대 사람들의 괴로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이 되었을 때, 그는 당하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

그는 끔찍한 결단을 할 때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육신의 어머니에게는 가슴을 쪼개는 칼이 되어야 했다(눅 2:35).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사랑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 사람들조차 주께서 가신 그 길에 동참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몰래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혼의 가시를 지녀야 했고, 속사람은 분열되어야 했고, 고통의 흔적을 지녀야 했다.

그는 또한 사악한 사람들의 괴로움이 되어야 했다. 곧, 그의 거룩함으로 인해 그는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야 했고, 여태껏 누구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해야 했다. 이 얼마나 무거운 고난인가! 세상의 구주가 되기 위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어야 한다니(벧전 2:8)!

그는 당하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 스스로 멸시받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찾았을 뿐 아니라, 말하자면 멸시받는 그들을 찾아야 할 때, 누구도 감히 그를 안다고 고백하지 않을 때, 캐묻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젓고 교만한 자들은 조롱하며 “이 바보야!”라고 말할 때, 그가 오자마자 겁쟁이들은 몰래 도망쳤따.

반면 교만한 자들이 그를 판단하며 쳐다볼 때,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의심받지 않기 위해 그를 피했을 때, 심지어 그와 관계가 좋았던 사람들조차 너무 많은 것을 잃지 않기 위해 그 관계를 애매모호하게 할 때, 충분히 일찍부터 뒷걸음질쳤던 자는 스스로를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에게 신세를 졌다고 느끼기는커녕 모든 사람들이 그를 거역하여 오직 자기 방어만을 골똘히 생각했을 때, 심지어 사랑받던 제자들조차 그를 부인했을 때, 그는 당하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

빌라도가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 19:5)!”라고 말할 때, 당하신 고난으로, 그는 당하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 이런 식으로 조롱하며 소리지른 사람이 포악한 반역자도 아니고 눈이 먼 성난 군중도 아니었다. 그를 불쌍히 여겨 이런 식으로 말했던 빌라도는 자색 옷을 입고 있었던 구별된 사람이었다.

유다는 은 삼십에 그를 팔았으나 빌라도는 훨씬 더 낮은 가격에 그를 팔기 원했고, 그를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 성난 군중들의 동정을 필요로 하는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야 그분이 살 수 있으니까. 세상의 구주가 그렇게 싼 값에 팔려야 하다니!

따라서 이 세상에서 전체 그분의 삶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있을 수 있는 어떤 고난보다도 가장 무거운 고난이었고, 모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고난보다도 더 무겁고, 모든 인간의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무거웠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이 고난은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순종이 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간단하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살펴보았다. 완전하신 주님조차 이 세상에서 단 한 가지 배울 것이 있었다. 바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 복음에 의하면, 그분이 이렇게 순종을 배운 이유는 그분께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난 없는 순종 없고, 순종 없는 구원 없다. 우리에게 참다운 믿음이 있다면 순종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의 자신을 시험하라!(고후 13:5)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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