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끼우 요한의 연대기
▲아랍어로 된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

오일 머니와 수쿠크 이후, 이슬람은 ‘난민’ 문제로 또 다시 한국 사회에서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교회가 난민을 품어야 한다’는 주장과 ‘테러와 범죄 우려가 있다’며 경계하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아랍어와 아랍 문화 및 종교를 연구하고 있는 이나빌 선생이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와 이슬람의 이집트 침략>이라는 책을 펴냈다. 저자는 초대교회부터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꽃피웠던 이집트가 어떻게 이슬람화됐는지, 그 감춰졌던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1,400여년 전 쓰였던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의 발견을 통해서다.

바쁜 선교지의 사역 가운데 저자는 왜 1,400여년 전 고대 문서를 연구해야 했을까. 다음은 전편에 이어 8월 중순 만난 이 선생과의 인터뷰.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집트’와 ‘콥트교’ 하면 IS의 ‘콥트교도 살해 영상’이 떠오릅니다. 이집트 내 기독교인의 핍박이 어떠한 수준인가요.

“며칠 전에도 폭탄을 두른 테러리스트가 이집트 교회를 침입해서 폭파를 시도했습니다. 교회 앞에 경찰이 주둔하고 있어, 도망가다 자폭하고 말았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콥트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직·간접적 핍박이 있습니다.

직접적인 살해 시도뿐 아니라, 간접적으로도 기독교인들은 원하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등의 핍박이 존재합니다. 대통령부터 시장, 군 지휘관 등 중요 직책들도 무슬림들만 오를 수 있습니다. 회사 가운데는 기독교인들의 입사를 금지하는 회사도 있습니다. 관례상 내려오는 따돌림도 엄청나게 심합니다.

얼마 전 월드컵에서 선수들의 ‘라마단’ 준수 문제가 언급됐는데, 기독교인들은 축구를 아무리 잘 해도 이집트 국가대표팀에서 뛸 수 없습니다. 무슬림들만 뽑기 때문입니다. 유명 축구 클럽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학 교수 자리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탈락하는 사례가 자주 있습니다. 이처럼 이집트 기독교인 젊은이들 중 비전과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에 기록한 대로 1,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고난과 핍박은 계속돼 왔습니다. 때로는 더 심해지거나 다소 약해지거나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와 이슬람의 이집트 침략
▲책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와 이슬람의 이집트 침략(이나빌, CLC, 208쪽, 10,000원).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는 이슬람 침략 실상을 당대 사람이 기록한 거의 유일한 책입니다. 파피루스 기록 정도는 더 있지만, ‘연대기’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책은 유일합니다.

여러 이집트 역사가들도 당시의 이슬람 침략을 기록했지만, 이는 침략 당시로부터 1.5세기에서 2세기 이후의 기록들입니다. 요한의 연대기는 당대 사람으로서 목격한 것들을 그대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특히 오늘날 이슬람은 자신들의 과거 행동을 미화하고 사실을 감추면서 근사한 모습만 소개하려 하는데, 그러한 미화와 왜곡에 대해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1,400년 전의 진실이 오늘날 의미가 있을지, 도움이 될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당연히 도움이 되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정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이자 첫 단추입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오늘날 21세기에 이슬람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종교입니다. 가장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고, 직접적으로 우리와 연관이 있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어떤 종교에 대해 평가하려면, 과연 그들의 역사가 진실했는지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슬람 초기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슬람의 침략 사실은 세계사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나요.

“아니요! 이상하게도, 갈수록 그런 내용들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내용들이 책에 잘 설명됐는데, 지금은 더 줄어들고 밝힐 기회도 사라집니다. 오늘날은 그와 정반대 이야기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지금까지 이슬람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지금도 엄연히 무슬림들의 테러가 존재하는데, 어떻게 무슬림의 호전성을 모를 수 있을까요.

“‘다와(Dawah)’로 알려진, 이슬람 자체의 포교활동 방향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온건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고, 평화적으로 전파됐으며, 강제 개종은 없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일반적인 가치관과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입니다. 현대의 온건 이슬람은 종교란 평화적이고, 사랑과 용서와 평화를 선포하며, 서로 사랑하고 화해하는 등의 일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1,400년 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관심도 없습니다. 부정적인 모습들은 모두 무시한 채, ‘현대적 이슬람’이라는 환상 속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그것이 자신들의 역사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적 온건 이슬람’과 ‘본질적 이슬람’은 다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현대적 온건 이슬람’이 추구하는 가치를 믿고 있지만, 이는 ‘본질적 이슬람’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현대적 온건 이슬람’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이든 그것의 본질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따라서 이슬람도 ‘본질적 이슬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랍 이집트 니끼우 요한
▲책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 중 아랍 군대에 맞서 7개월간 항전했던 이집트 바빌론 성채 모습(1840년 그림).

-이슬람이 정말 비폭력적이라면, 그들이 앞장서서 과격 테러리스트들을 말렸겠지요.

“IS 테러를 보면서도, ‘현대적 이슬람’에서는 ‘저것은 이슬람이 아니다’고 말합니다. 많은 무슬림들도 ‘저것은 참된 이슬람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슬람의 본질에 대해 한 번이라도 고민했다면, 그렇게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그렇게 쉽게 단정하고 믿어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책에서 이슬람 침략의 실상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지난 1,400년 동안의 일반적인 이슬람의 역사는 ‘피의 목욕탕의 역사’입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와 인도와 남부 유럽 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난 역사에서 이슬람은 칭기즈칸이나 히틀러나 스탈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슬람 종교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그러한 만행들에 대해, 그들은 한 번도 그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그러한 내용들도 구체적으로 연구되고 발표돼야 합니다.

그리고 이슬람 종교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전세계 이슬람 종교의 대표가 역사 앞에 그러한 사실들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지금 아랍 세계에서는 그런 내용들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고, 이슬람 비평가들 가운데서 그러한 담론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두 얼굴, 현대적 온건 이슬람과 본질적 이슬람”

-최근 한국에서는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이슬람(예멘) 난민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난민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이슬람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현대적 온건 이슬람과 본질적 이슬람이 다르듯, 이슬람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무슬림 난민을 대하는 것에도 찬성과 반대가 나뉘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방문하는 교회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슬람은 경계의 대상이고 무슬림은 사랑의 대상이다.’ 즉 ‘경계할 이슬람과 사랑할 무슬림을 구분하자’는 것입니다.

무함마드의 삶과 꾸란의 가르침을 볼 때, 이슬람은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저는 현대적 온건 이슬람이 추구하는 것에는 선한 가치가 있지만, 이슬람 초기의 본질적 이슬람에는 선한 가치 보다 악한 가치가 훨씬 많다고 봅니다. 무함마드의 삶과 꾸란의 가르침을 보면,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폭력과 전쟁과 원한관계와 저주가 주된 메시지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꾸란에 알라신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인을 살해하라고 명령하고 있는데, 그 명령은 오늘날까지 유효합니다. 이렇게 신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오늘날까지 명령하는 종교는 지구상에서 이슬람밖에 없습니다. 꾸란에 200개 구절 이상 ‘칼의 구절’이 있고, 그 가운데는 다른 종교인을 살해하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교로서의 이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주 예멘 난민
▲제주 예멘 난민들 모습. ⓒYTN 캡처 ⓒYTN 방송화면 캡쳐
제가 방문했던 지역에서 유력한 신천지 집단이 그 지역에 들어와 큰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니, 주민들이 현수막을 걸고 반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국민들은 이단이나 사교가 들어온다면 막으려 합니다. 이슬람은 사람들이 종교라고 하지만 그 본질이 지구상의 어떤 이단이나 사교 집단보다 더 악합니다.

이러한 이슬람이 한 번 발을 붙이게 되면, 자신들만의 게토 집단을 이루고 그들이 그 사회를 지배하려 합니다. 이슬람은 그 본질적 목적이 ‘공존’이 아니고 ‘지배’입니다.

본질적 이슬람을 따르는 무슬림이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의 수가 되면, 그들은 샤리아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고 사회에 갈등 요소를 만들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나타나는 무슬림 난민들로 인한 문제들을 보면 그러한 특징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생태계 파괴종’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슬람의 한국 진출과 확장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슬람을 믿는 사람인 무슬림을 대하는 자세는 달라야 합니다. 이슬람이 악한 종교이기에, 모든 무슬림도 악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슬림은 사람입니다. 무슬림 가운데 극단적인 테러리스트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현대적 온건 이슬람을 믿고 따르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습니다. 그 가운데는 마음씨가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기독교적으로는 그들은 구원의 대상이며, 섬김과 선교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무슬림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품고 사랑해야 할 존재이고, 따라서 친구가 되어야 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에 이미 들어와 있는 난민에 대해서는 우리 성도들이 다가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난민을 차갑게 대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 문을 열고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일거리도 주면서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경계할 이슬람과 사랑할 무슬림’을 놓고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극단적으로 의견이 갈립니다.

“둘 다 맞다고 봅니다. 양쪽의 강조점이 다를 뿐입니다. 저는 이슬람의 본질과 무슬림 사랑, 둘 다 충분히 강조돼야 한다고 봅니다. 극단적으로 갈려 있는 양쪽이 하나로 모아져서, 손을 서로 마주 잡고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계 안에서 그것 때문에 너무 싸우기보다,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무슬림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이슬람의 본질을 깊이 이해해야 하고, ‘이슬람의 본질을 알자’는 사람들은 무슬림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고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양쪽 간의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무슬림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고 국내의 무슬림 난민을 돌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무슬림 난민 신청자들을 받아들이자는 말씀인가요.

“무슬림 난민에 대한 법적 부분과, 실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무슬림 난민을 돕는 부분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일반 난민이 아니라 무슬림 난민입니다.

무슬림 난민에 대한 법적 부분은 법률 개정 등을 통하여 무슬림 난민이 늘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무슬림 난민이 늘어나는 것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무슬림 난민들이 늘어나면 우리나라의 무슬림 수가 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슬람의 본질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내에 이미 들어와 있는 무슬림 난민에 대해서는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상, 그들은 우리 사회에 동화돼야 합니다. 이슬람은 진출하는 사회의 문화를 존경하고 그 문화의 일원이 되기보다, 자신들의 이슬람 문화를 전파하려 합니다. 그러면 사회적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들을 우리 그리스도인이 돕지 않는다면 그들이 우리 사회에 동화되기가 힘듭니다.”

난민법 폐지를 위한 대국민 정책 토론회 ‘국민이 먼저다! 대국민 정책 토론회’
▲난민법 폐지를 위한 대국민 정책 토론회 ‘국민이 먼저다! 대국민 정책 토론회’ 현장. ⓒ크리스천투데이 DB

-1-2년 전 한국에서는 ‘알라와 하나님이 같다’는 주장이 이슈가 됐는데요.

“그런 주장은 자유주의 신학이거나 기독교 신앙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 신앙을 떠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알라와 하나님은 같을 수 없습니다. 이는 신앙고백의 문제입니다.

미로슬라브 볼프나 한스 큉 등이 그런 주장으로 헷갈리게 하는데, 그 분들이 가진 고정적 선(先)개념을 갖고 이슬람에 접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꾸란이나 이슬람 역사의 상황 속에서 이슬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는 아름답고 선한 가치가 있다. 이슬람에도 기독교에도 선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만나서 화해하고 공존한다면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할 것’이라는 자신의 기존 개념 속에서 시작한 것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꾸란과 하디스의 내용, 이슬람의 초기 역사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슬람에서는 그런 말을 박수 치면서 좋아합니다. 전통적으로 포교를 위해 그렇게 이야기해 왔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다와’ 전략에 이용당하는 꼴입니다.

선교사로서는 그런 주장이 어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라와 같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현지 기독교인들도 그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중·고교 교과서에서 이슬람을 미화하고 있다는 내용의 세미나가 개최됐습니다.

“친이슬람 학자들의 활동 때문인지, 자꾸만 ‘본질적 이슬람’은 가려지고, 곡해된 내용들만 소개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여기에 교과서마저 편향적 내용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구체적 대응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했던 내용만으로는 안 되고, 구체적 증거를 가져가야 합니다. 저는 세미나 당일 소식을 접하고 참석했습니다. 중동의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본질을 발견하고 환멸을 느끼며 떠나는데,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미화된 이슬람에 대한 내용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봐서라도 이슬람의 침략이 기록된 역사적 자료들이 많이 소개돼야 합니다. 그런 자료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저도 아랍어를 연구했기 때문에 <니끼우 요한의 연대기>와 같은 존재를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