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예수를 마음에 모시는 원리

입력 : 2018.09.07 22:24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샤머니즘(shamanism)이나 이방 종교들이 접신할 때 강신술(降神術)이나 초혼제(招魂祭)를 행합니다. 성경에도 유사한 경우가 나오는데,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의 강신술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을 호출하려고 큰소리로 우상의 이름을 부르고, 뛰어 놀고(leaped), 칼로 자해하는 말 그대로 광신 놀음이었습니다(왕상 18:26-29).

이런 형태는 아니지만, 오늘 교회 안팎의 영성훈련들에서 시행하는 하나님 임재 추구에도 종교다원적인 여러 방법들이 동원되는 듯 합니다. 열광, 엑스타시(ecstasy) 같은 감성적인 것에서부터 명상, 침묵, 관상 같은 정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말씀의 이미지(Image, 形象)화를 통한 임재 추구 같은 심리주의적인 방법들까지 동원됩니다.

반면 소위 계몽주의적이고 지성적인 신자들 중 인격적 임재 개념을 도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를 ‘인격적으로 모셔 들인다’로 해석합니다. 아마 이교적이고 비인격적인 임재 추구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듯합니다.

그러나 ‘가면(mask)’이라는 ‘인격(personality)’ 개념이 시사하듯, ‘인격적(personalitic)’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합니다. 혹자에게는 교육학에서 말하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인격과 인격의 부딪힘’ 같은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혹자에게는 ‘윤리적인(ethical)’ 것과 동일시하여, ‘도덕적 변화를 일으키는 만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의미는 그 이상입니다. 앞으로 말하겠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임을 통해 결과된 2차적인 것으로서, ‘인격적(personalitic)’임과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죄인이 구원받으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한가롭게 ‘인격적 부딪힘’, ‘도덕적 변화’ 같은 것을 담아낼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므로 그를 모심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므로 예수를 마음에 모신다는 뜻입니다. 곧 예수의 피뿌림을 받아 거룩케 된 자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7)”라는 말씀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 죄값으로 받아들이는 ‘대속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모신다는 뜻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는 말씀 또한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는 원리를 가르칩니다.

여기서 ‘내 음성’은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개인에게 들려지는 어떤 신비한 영음(靈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 죄를 위해 죽었다’는 복음을 뜻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가신다는 말입니다.

‘주 예수 대문 밖에(325장)’ 라는 찬송시 역시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주 예수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할 소냐 나 죄를 회개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문 두드리는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또 가시 면류관은 그 이마 둘렸네 이처럼 기다리심 참 사랑이로다 문 굳게 닫아두니 한없는 내 죄라.’

위의 모든 말씀들은 피흘려 죽으신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이므로 구속(죄사함)을 받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모시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 ‘세상’에 오신 것과는 달리, 오순절 강림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를 믿는 120 문도에게 임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영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셔들인 자, 곧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은 거룩한 자들에게만 들어가신다는 것을 예시합니다.

◈동행과 내주(Immanence)

타락 전후를 불문하고, 성령 강림 전까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누릴 수 있었던 친밀함은 기껏 ‘동행’이었습니다. 곧 타락 전 에덴동산에서의 아담, 그리고 구원받은 에녹이 생애 동안 누렸던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walking with God, 창 5:24)’이었습니다.

반면 성령 강림 이후 성도에게 입혀진 은총은 ‘내주(內住, presence)’로서, 동행이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임마누엘(사 7:14, 마 1:23)’인 것도, 그리스도가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의 ‘내주’를 누리도록 해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과 동거하며 친밀함을 누렸지만, 성령 강림 전까지 그것은 기껏 ‘동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제자들을 비롯해 성도들 안에 강림하신 후, 그들은 ‘동행’이 따라 잡을 수 없는 ‘내주(內住, presence)’의 친밀함을 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과 오늘 우리 중 누가 더 예수님과 친밀함을 누리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성령이 내주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그리고 복음 진리를 깨닫는데, 성령 강림 전 예수님에게서 직접 배웠던 제자들과 오늘 우리 중 누가 더 잘 깨달을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이 역시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우리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배운 것으로는 가르침이 완벽하지 못했기에, 참 교사인 성령이 강림할 때까지는 복음을 전하러 나가지 말라(행 11:4)는 당부를 받았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요일 2:27)”. 그리스도는 대속을 완성하신 구속주 였고,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대속을 증거하는 교사이기에, 성령의 가르침을 받기 전까지는 교육이 완전치 못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함,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함

앞서 언급했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을 말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은 자는 그와 연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이 구절을 둘로 구분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그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그리스도의 대속을 힘입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본래 성경에서 “~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주로 “~에게 피하여 숨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안에 있음’을 ‘하나님 안에 감추어짐’과 동일시 했습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하나님 안에 감춰져 절대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는 말씀 역시, ‘그리스도 안에 거함’을 ‘정죄에서 해방된 구원의 안전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는 찬송 가사 역시, 피난처인 그리스도 아래 피신하므로 하나님의 정죄, 마귀의 공격, 세상의 염려 근심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반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는, 이미 언급했듯 우리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 구속(죄사함)을 받으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요일 4:15)” 라는 말씀 역시, 예수를 우리 죄를 대속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면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개념을 합치시키면,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보장’과 ‘그리스도의 내주(內住, presence)’의 은총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끝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는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서로가 서로에게 귀속당하고 귀속시키므로 둘이 불가분리의 완벽한 연합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둘이 연합되되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에 흡수, 소멸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도 함의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흡수되지 않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한다’고 그리스도가 내게 흡수되지 않으므로, 연합을 이루되 개별의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연합성’과 ‘개별성’은 신비주의에서 건져주고, 우리에게 ‘믿음’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합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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