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문제 부분에 대한 김구원 교수의 입장 (上)

입력 : 2018.09.06 11:16

사무엘상
▲김구원 교수의 <사무엘상>.
다음은 홍성사에서 전달받은 표절 의심 부분에 대한 필자 답변이다. 홍성사에서 전달받은 Bodner의 「1 Samuel: A Narrative Commentary」의 밑줄 그어진 본분에 근거해 필자의 책에서 해당 부분이라 여겨지는 부분을 비교하여 아래와 같이 답변한다. 그리고 문제 제기된 모든 본문들을 다루었음을 밝힌다. 보드너의 책은 필자가 참조한 책들 가운데 하나이다. 인용의 여부는 필자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였다. 즉 성경 본문에 대한 재진술적 내용, 원문에서 유추 가능한 관찰, 그 관찰로부터 내려질 수 있는 합리적인 추론, 학자들 사이에 이미 알려진 내용 등은 유사한 보드너의 책에 있다 해도 굳이 인용하지 않았다.

[1]
본 단락부터는 장소적 배경이 전쟁터에서 실로로 이동한다. 전령이 실로에 도착한 날을 “당일에”라고 표현하는데(12절), 이것의 문맥적 의미는 “패전 당일”이다. 전쟁터 아벡에서 실로까지 약 35km의 거리로, 전령이 불과 몇 시간만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이다(위의 지도 참조). 그러나 “당일에”라는 말 속에 보다 깊은 의미도 숨어 있다. 전령이 전하는 소식(엘리 아들들의 죽음)이 결국 ‘성취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려하면 “당일에”가 3:12(“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의 “그날에”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의 히브리어는 동일하다(바욤 하후[ביום ההוא]). 3:12에서 하나님이 “그날에” 엘리 가문에 예언한 바를 성취하시겠다고 했는데, 바로 “그날에” 전령이 패전 메시지를 가지고 실로에 도착한 날이다. 본문은 전령을 베냐민 사람으로 소개하는데 랍비들은 한걸음 나아가 그 베냐민 사람이 사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런 추측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사울이 베냐민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사사 엘리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인물로 까메오 출현한다는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특히 엘리가 그 전령을 “내 아들”로 부르는 것도 그가 후에 엘리를 이어 이스라엘을 통치할 사람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한편 베냐민 사람과 실로는 매우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과거에 멸절 위기에 처한 베냐민 남자들이 “실로”에서 열린 여호와의 절기 축제 때, 처녀들을 보쌈하여 종족을 유지한 적이 있었다(삿 21장). 본 장면에서 베냐민 사람이 등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사건 덕분이다. 또한 베냐민의 탄생 이야기(창 35장)와 실로 제사장의 멸망 이야기(삼상 4장)가 동일한 모티브를 공유한다. 사무엘상 4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엘리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다 죽는 것처럼 창세기 35장에서 라헬도 베냐민을 낳다 죽는다.

As Peter Miscall observes, there is a long association of Shiloh and Benjamin: Shiloh ‘was the site for the distribution of the land to separate tribes, including Benjamin, but it was also the site for the ‘preservation’ of Benjamin in Judges 21. Benjamin seized virgins from there during ‘the yearly feast of the Lord’ (Judg. 21.19; 1 Sam. 1.3)’. Indeed, one could say that it is because of the annual festival of Shiloh that Benjamin still even exists as a tribe here in 1 Samuel 4. The birth of Benjamin (Gen. 35) is alluded to at the end of this chapter, and so it is striking that the herald—whose news drives the wife of Phinehas into premature labor—is from the tribe of Benjamin.

사무엘상 4:12-16절의 해설한 필자의 글과 보드너의 글의 일부이다. 유사한 부분은 부분은 보드너의 고유 주장이 아니라 성경의 큰 문맥에 대한 ‘관찰’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보드너 자신의 글 “As Peter Miscall observes”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보드너가 그 관찰에 관해 Miscall을 인용한다고 해서, Miscall이 실로와 베냐민 지파의 관계를 관찰한 최초의 학자라는 뜻도 아니다. 본문 관찰과 관련된 경우 누가 최초의 관찰자인지 추척하는 것은 매우 힘들며(한나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부른 최초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누가 가장 먼저 관찰했을까?), 그 관찰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언급된 경우 굳이 특정 학자를 밝히지 않아도 된다. 베냐민 남자들이 실로에서 여호와의 절기 때 처녀들을 보쌈하여 종족을 유지한 것은 사사기 21장의 내용을 요약 진술한 것이고, 창세기 35장의 베냐민 탄생 이야기와 사무엘상 4장의 이가보드의 탄생 이야기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관찰도Miscall이나 Bodner의 것이 아니다 (Cloudia Bergman, Childbirth as a Metaphor for Crisis, Pp. 66-67 참조할 것).

비슷한 내용을 설명할 때 필자가 사용한 표현도 보드너의 것과 충분히 다르다. 다음을 비교해 보라. “The birth of Benjamin (Gen. 35) is alluded to at the end of this chapter” (보드너) VS “ 또한 베냐민의 탄생 이야기(창 35장)와 실로 제사장의 멸망 이야기(삼상 4장)가 동일한 모티브를 공유한다” (필자). 주어만 같을 뿐 나머지 문장 요소들은 모두 다르다. 또한 일반적 관찰들을 활용한 문맥도 상이하다. 보드너는 메신저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의 지파 이야기로 넘어오지만, 필자는 개역개정역에 나타나는 단어의 순서에 따라 “당일에”의 의미를 먼저 설명한 후, 바로 전령의 지파 “베냐민”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온다. 즉 필자가 학자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본인의 말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필자는 보드너가 “The herald—whose news derives the wife of Phinehas into premature labor—is from the tribe of Benjamin”이라고 간단히 설명한 것을 다음과 같이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전령을 베냐민 사람으로 소개하는데 랍비들은 한걸음 나아가 그 베냐민 사람이 사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런 추측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사울이 베냐민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사사 엘리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인물로 까메오 출현한다는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특히 엘리가 그 전령을 “내 아들”로 부르는 것도 그가 후에 엘리를 이어 이스라엘을 통치할 사람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필자는 이미 주석 저작에 자주 참조한 책들을 앞에 약어로 밝혀 놓았고, 보드너의 사무엘상도 그 중에 하나다. 그리고 필요하다고 판단한 곳에서는 그를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밝히 인유로 이 부분에서는 보드너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2]
“이것을 단적으로 암시하는 말이 15절의 눈이 “어두워졌다”라는 히브리어 표현(카마[קמה])이다. 이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눈이 “(멈추어) 서다”라는 말이다. 장님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에 기인한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서다”(쿰[קום])라는 단어는 1:23에서 엘가나가 한나에게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쿰[קום])를 원하노라”라고 말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은 엘리의 시력 상실이 하나님의 말씀 성취(심판)와 관계있음을 암시한다.”

It is worth observing that the term for ‘standing still’ (קמה) is the same verbal root used in 1 Sam. 1.23, when Elkanah says to Hannah ‘may the LORD establish his word’, that is, may he cause his word to stand’ (יקם). Consequently, Eli’s eyes now physically symbolize the divine word spoken against him gradually beginning to realize fulfillment as he sits on his throne for the last time in the narrative.

위 두 부분은 표현과 설명의 구체성에 있어 너무 달라 왜 문제가 되는지도 알기 어렵다. 사무엘 1:23절의 쿰 “서다”와 엘리의 시력을 설명하는 카마가 동일한 히브리 어원이라는 것은 언어적 사실이고(보드너도 그것이 “관찰”에 해당함을 인정하고 있음), 또한 같은 어원이 다른 문맥에 나타날 때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은 지난 2천년 유대 해석법의 기초일 뿐 아니라, 문예적 접근을 하는 근대 성서학자들도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동일한 어근이 같은 인물에 관해 사용된 4:15과 1:23을 연결시키는 것은 여러 학자들이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주석이다. 이 때문에 일반인을 독자로 하는 성경 해설서에서 굳이 특정 학자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필자는 비슷한 방법으로 3장 12절도 설명하였다. 그곳에서 사용된 히브리어도 엘리의 심판을 말씀 성취(쿰)의 과정으로 그것을 그의 나쁜 시력(카하)과 연결시켰다. (עין קמה와 עין כהה는 동의어임: 창 1:27에 대한 Sforno의 주석을 참조할 것). 이처럼 필자는 원문에서 합리적으로 유추 가능한 내용을 보드너와 다른 표현으로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그 내용을 보드너와 다른 문맥에서 활용함에 주목하라. 보드너는 히브리어 메짜페(“보다”)에 대한 설명에서 엘리의 시력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오는데, 필자는 엘리가 계시로부터 소외된 현상들을 1장에서부터 추적한 후, 엘리의 시력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온다.

[3]
“소식을 전하는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메바세르(מבשׂר)는 보통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에게 사용되는 말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말이 복음 전도자를 의미한다. 일견, 하나님 백성의 패배와 제사장의 죽음, 성물의 탈취에 대해 알리는 사람이 메바세르 즉 “좋은 소식 전하는 사람”으로 불리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왜 저자가 전령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로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최고의 비극이자 신학적 멘붕에 해당하는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외모” 즉 눈에 보이는 차원만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중심” 즉 보다 큰 구속사적 섭리를 보시기 때문이다. 엘리의 입장에서는 홉니와 비스하스의 죽음이 “좋은 소식”일 리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좋은 소식일 수 있다. 왜냐하면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은 타락한 제사장 가문의 멸절을 의미하였고,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엘리 가문의 몰락은 왕정 성립을 향한 첫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당시 백성들이 이해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완성된 정경을 읽는 우리는 메바세르의 의미을 통해 그런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간파하며, 오늘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비슷한 하나님의 섭리를 찾도록 도전받는다.

a bold translation of the Hebrew term המבשר would be ‘the bearer of good news’. It would be difficult to construe this news as ‘good’ from Eli’s viewpoint, notwithstanding the Belial activities of his sons. But this is certainly not the last occasion that such messengers carry ‘good news’ in 1 and 2 Samuel, and as Polzin points out, the verb ‘to bring (good) news’ almost invariably occurs i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when the news is good for David or the Davidic royal house.

이 둘은 동일한 본문 요소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 이외에 유사하지 않다. 메바세르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보드너가 주장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 그 단어가 출현하는 문맥들이 거의 모두 그러하기 때문에 사실이다. <구약 신학적 어휘 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2:314)에 따르면 그 히브리어 동사가 “Proclamation of Yahweh’s saving Work”과 “The Message of Joy”와 주로 관련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왜 비극의 전령을 히브리어 저자가 메바세르로 불렀는지는 본문을 읽은 누구나가 제기 할 수 있는 정당한 질문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답을 “왕정 성립”에서 찾고, 그것을 목회적으로 확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보드너는 메바세르가 “다윗과 다윗의 왕가 가문에” 좋은 소식일 경우에 사용된다는 폴진의 입장을 간단히 인용할 뿐이다.

 필자가 메바세르를 설명하는 주석적 문맥도 보드너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보드너는 4장 17절에 대한 주석 맨 앞에서 메사베르를 설명하는 반면, 필자는 4장 17-18절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치고 그 단락에 대한 목회적 적용 단계에서 메사베르의 사전적 의미를 사용하였다.

[4]
18절 마지막에 “그가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는 언급은 사사기 17-21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혼란이 엘리가 사사로 다스리던 때 발생한 것임을 보여준다.

In light of this detail about the considerable length of Eli’s judgeship, it would now appear as though the chaos of Judges 17–21 takes place under the aegis of Eli’s leadership, or at the very least, seemingly overlapping with his tenure.

필자의 설명은 사사기 4장 18절 “그가 사사기 된지 사십년이었더라”라는 구절에 대한 해설이다. 보드너의 해설과 유사한 점은 ‘이스라엘의 혼란이 엘리가 사사로 다스리던 때 발생했다’는 내용인데, 이것은 엘리가 다스리던 때가 사사 시대 말과 겹친다는 일반적 사실과 사사기 17-21장이 사사시대 말의 혼란을 묘사한 본문이라는 관찰로부터 합리적으로 유추 가능한 내용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서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내용은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http://liveagreaterstory.com/overlapping-narratives-judges-samuel/). 필자의 문장도 보드너의 것과 동일하지 않다.

[5]
엘리의 며느리(비느하스의 아내)가 이가봇을 낳으며 죽어 갈 때, 블레셋인들은 하나님의 궤를 취하여 아스돗으로 옮겨갔다. 1절에 사용된 원문의 동사들은 대과거로 번역가능하기 때문에, 이 장면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엘리의 며느리가 “영광이 떠났다(갈라 카보드 גָּלָה כָבוֹד)” 외치며 죽어가는 장면과 블레셋이들이 여호와를 궤를 옮겨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설치하는 장면이 오버랩으로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As Eli’s widowed daughter-in-law is delivering her child of no hope, the prizewinning Philistines deliver the ark to the temple of Dagon in Ashdod. As it turns out, the Hebrew syntax of 5.1 suggests an issue of simultaneity, that is, there is a general sense of chronological correspondence between the events of the latter part of chap. 4 and the beginning of chap. 5. Roughly, the birth of Ichabod happens around the same time as the deposit of the ark in the temple of Dagon at Ashdod.

이 두 상이한 글에서 공유된 내용은 삼상 5:1의 첫부분에 사용된 we X qatal (ופלשתימ לקחו)구문에 관한 언어적 관찰이다. 그 관찰에 근거한 필자의 설명 방식은 보드너의 것과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보드너는 “히브리어 구문”이라고만 표현한 것을 필자는 그것이 “대과거 구문”임을 구체화해 표현해 주었다. 이것은 원문에 대한 독립적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해설이다. 표현에 있어서도 상이한데, 필자는 구문의 의미를 영화 촬영을 비유로 설명한 반면, 보드너는 그렇지 않다.

[6]
본 단락부터는 이야기의 무대가 다곤 신전에서 블레셋 영토 전체로 확장된다. 언약궤로 인한 재앙도 블레셋 신(다곤 신상)으로부터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확장된다. 이런 변화의 핵심에 “손”(야드 יַד)이 있다. 신전 문지방에 무력하게 잘려 있는 다곤의 손과 대조적으로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무겁게 임한다.

The next section of 1 Samuel 5 moves outside the confines of the Dagon temple into broader Philistine territory. Concomitantly, the reader moves from the physical damage of Dagon to the physical damage of the Philistines themselves. Just as the verb ‘to be heavy/to honor’ (כבד) is significant in chap. 4, so it continues here in chap. 5, as the hand of the LORD is heavy (כבד) against the Philistines of Ashdod.

필자의 글은 삼상 5:6절에 대한 설명의 도입부분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확장된다는 것은 동일한 본문에 대한 관찰에 해당한다. 보드너가 그것을 최초로 관찰한 사람이 아니다. 표현도 단순한 번역이라고 보기에는 둘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더구나 김구원 교수의 강조점은 여호와의 손이 “무겁게 임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 있다. 보드너는 “무겁게 임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כבד)를 인용했지만, 김구원 교수는 “여호와의 손”(יד)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인용하고 있다. 이 차이는 후속 설명의 차이로 이어진다. 보드너는 이후, 독종이 “심하다”(nasty)라는 설명을 이어가지만, 김구원 교수는 여호와의 손의 임재와 독종의 발생이 동시적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7]
9절에 따르면 가드 사람들의 자신감이 그들을 큰 곤경에 빠뜨렸다. 언약궤가 가드에 입성했을 때,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무겁게 임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독종으로 죽기 시작했다. 이 독종의 정확한 성격은 현재 학자들 사이의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다. 어떤 학자들은 “독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대변의 곤란”을 의미하는 아람어와 동족어라는 사실에 착안해 본문의 “독종”이 치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킹제임스 번역 “emerods in their secret parts”을 참고). 그러나 이 주장의 문제는 치질이 사망에 이르는 병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따라서 다른 학자들은 “독종”이 쥐에 의해 전염되는 임파선종일 가능성을 제안한다. 임파선종은 치료하지 않으면 감염자의 70%가 4일 안에 사망하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황금 쥐 다섯을 황금 독종 다섯과 함께 선물로 만든 것을 고려하면 독종이 쥐에 의해 전염되는 임파선종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하튼 이 무서운 독종을 경험한 가드 사람들은 언약궤를 임의로 에그론으로 보내 버린다. 그들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방백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에그론의 동의를 구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아스돗에 발생한 독종이 (여호와의 징벌이 아닌) 우연의 결과라고 떠들던 가드 사람들의 자신감에 찬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언약궤를 통해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합리성을 중시하던 가드 사람들이 두 손 들고 항복한 셈이다.

However, in this case the confidence—if it be such— that they can handle the ark is misplaced, since there is a great panic in the city, and again, tumors appear in unpleasant places. Incidentally, the precise nature of these ‘tumors’ has long discomfited the scholarly community. Some scholars understand the bubonic plague at work here, while others believe that hemorrhoids (the Hebrew term is ‘related to an Aramaic word meaning “strain at the stool”’) are causing the Philistine unease (Klein 1983: 50). The latter is the way the KJV translators understand the pain: ‘the hand of the LORD was against the city with a very great destruction: and he smote the men of the city, both small and great, and they had emerods in their secret parts’

밑줄 친 부분은 독종의 의미를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논리 구조와 설명의 구체성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아울러 “독종”을 어떻게 볼 것인 지에 대한 설명은 보드너 고유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독종”에 관한 견해가 크게 두 가지라는 사실은 일반적 지식에 해당하며, 그리고 독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치질”을 의미하는 아람어와 동족어라는 사실은 언어적 사실이다.

독종을 치질의 의미로 설명할 때 킹제임스 번역을 인용했다고 해서, 보드너의 것을 훔쳤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킹제임스 번역 emerods in their secret parts이 “독종”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제공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룰 때 킹제임스역이 자주 인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5장의 “독종”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한 다음의 인터넷 기사를 참조하라(킹제임스 역을 인용함): https://www.gotquestions.org/emerods.html.

표현도 단순한 번역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가드 사람들이 자신감이 그들을 곤경에 빠뜨렸다”와 “the confidence-if it be such—that they can hand the ark is misplaced”는 전혀 다른 의미의 문장이다. 또한 보드너의 문장 “The Hebrew term is related to an Aramaic word”도 필자의 문장 “히브리어가…아람어와 동족어이다”와 전혀 다른 말이다. 왜냐하면 두 단어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동족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주제에 대한 독립적 소양에 근거해, 그 두 단어가 동족어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보드너의 설명보다 더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어서 필자는 독종에 대한 전통적 견해 즉 그것이 “치질”는 견해보다, 그것이 “임파선종”일 가능성이 높음을 보드너보다 훨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미 필자는 주석 저작에 보드너의 책을 다른 책들과 함께 참조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크레딧을 주어야 하는 곳에서는 그렇게 하였다. 하지만 이처럼 일반적인 내용인 경우는 굳이 보드너의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8]
흥미로운 것은 블레셋의 제사장과 점술가들이 비록 율법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께 영광(카보드 כבוד 개역 개정은 “영화”로 번역함)을” 돌리라고 주문한다(5절). 율법을 잘 알았던 엘리 가문의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카보드 כבוד “무게”)을 가로채 매우 무거운 자들(카베드 כבד)이 되었던 것을 생각할 때, 이방 종교 지도자들이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죄악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것 같다.

The use of the exact same root ‘honor/glory/ heavy’ (כבד) that is so prominent in earlier portions of 1 Samuel must operate in the present context as a further indictment of the house of Eli, since God’s ‘honor’ (כבוד) is not a priority for Israel’s senior priestly leadership. Foreign priests and diviners are directing their citizens to give honor to God, which is exactly what their clerical counterparts in Israel are not doing.

두 글은 동일한 본문 요소 ‘카보드’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에서만 유사하다. 사무엘상 1-7장까지의 본문에서 어근 kbd가 키워드로 사용된다는 것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밝혀 놓았다 (예: Polzin, Samuel and Deuteronomist, 46). 즉 인용 없이 사용해도 문제없을 만큼 일반적인 이야기다. 더구나 6:5절의 경우, “무겁다”라는 히브리어kbd말고도 “가볍다, 경히 여기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qll도 등장하기 때문에 그 구절이 엘리 가문에 대한 비판임이 더욱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두 키워드 kbd와 qll은 엘리 가문에 대한 무명의 선지자의 심판 선고에 그대로 사용된다 (삼상 2:30 참조). 따라서 삼상 6:3-6에 기록된 블레셋인들의 반응과 엘리 가문을 비교하는 것은 본문으로부터 합리적으로 유추 가능한 것이다.

나아가 필자의 설명은 보드너의 것에 대한 단순한 번역으로 보기에는 표현과 내용에 있어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보드너의 “the house of Eli” 혹은 “priesly leadership”라는 표현은 필자의 “율법을 잘 알았을 엘리 가문의 제사장”과는 다른 표현이다. 또한 그 표현이 사용된 문장의 구성도 다를 뿐 아니라, 필자는 삼상 6:3-6을 보드너처럼 단순히 엘리의 가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 해석한다.

[9]
블레셋 사람들(“그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조언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젖나는 엄마 소를 송아지(원문, “아들”)과 격리시킨 채 수레에 연결하고, 수레에 여호와의 궤와 속건 제물들을 실었다. 수레를 끌어본 적이 없는 젖소들이 인도하는 사람없이 물건을 목적지까지 운반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더구나 수레를 끄는 소들이 방금 출산한 엄마 소이며 뒤에서는 새끼들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 그러나 본문은 그 암소가 벧세메스를 향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똑바로 갔다고 기록한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온전한 순종에 대한 신명기 저자의 독특한 어법이다(신 28:14). 마치 자신의 감정과 욕구와 의지를 꺽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라도 하듯이 암소는 걸어간다. 본문에서 그 암소가 “울고” 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암소의 행보가 본능과는 매우 다른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짐승까지라도 순종케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다. 이런 암소의 행보에 블레셋 사람들은 크게 놀랐을 것이다. 동시에 독종의 재앙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을 것이다. 당시 블레셋의 정치 지도자들이 수레를 따라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갔다는 것은 이 일에 대한 블레셋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그 때 방송 기술이 발달했다면, 전국의 중요한 방송사와 언론의 카메라들이 이 상황을 블레셋 전국에 생중계했을 것이다.

The ‘men’ dutifully execute the instructions of the clerics by hitching the two nursing cows to the wagon, while the ‘sons’ are penned up ‘in the house’. The ark is loaded on the cart along with the grim cargo of the golden hemorrhoids and golden mice, and the test commences. The expected peregrination of the nursing cows would not be straight up the road, especially equipped with unfamiliar yoke, penned up sons, and udders full of milk. Yet in the event, this is precisely what happens. The unswerving march of the cows is highlighted through a verb (‘and they were straight on the road’), and they do not swerve ‘to the right nor to the left’. One is reminded of Deut. 28.14, where Moses exhorts the children of Israel not to ‘turn aside from any of the words which I command you this day, to the right hand or to the left’. The cows retain the straight path of ‘obedience’ even though there is no visible driver of the cart. The detail that the cows are ‘lowing’ might even suggest that they are being driven against their will

필자의 글과 보드너의 글은 모두 삼상 6:10-12을 설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문으로 그 구절을 읽는 사람들에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h’nš이라는 히브리어이다. 직역하면 “그 사람들”이지만, 지금까지 블레셋인들이 plštym으로 불렸다는 점에서 주목을 끄는 말이다. 필자는 그 원문을 “블레셋 사람들”로 해설해 주었으나, 보드너는 그냥 원문을 인용하는 것(“the men”)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필자가 앞에서 밝힌 대로 보드너의 책을 비롯한 여러 책을 참고했지만, 실제로는 원문을 보고 한글 개역 개정을 해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블레셋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들의 조언을 이행했다는 것은 6장 10-12절에 대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참조. Fokkelman, Vow and Desire, 279; “implementation of the proposal of the priests”). 송아지를 가두고 암소에 멍에를 씌웠다는 것은 10절의 내용을 그대로 재서술한 것이다. 그 이후의 내용도 본문에서 자연스럽게 유추 가능한 거이나, 일반화된 설명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암소가)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라는 구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신명기 28:14절을 연상하는 것은 교회의 강단을 통해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이 부분에서도 보드너는 단순히 “신명기 28;14절을 기억나게 한다”(be reminded of Detu 28:14)라고 말했지만, 필자는 그 표현이 “신명기 저자의 독특한 어법이다”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단순한 ‘의역’이 아니다. 학자들 사이에 통용되는 신명기 저자의 독특한 어법들이 있고, 그 어법들로 역사서의 ‘신명기적 영향’을 추적하는 학문적 시도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필자 나름의 해설이다. 즉 필자는 보드너가 주지 않는 추가적인 정보를 주는 것이다. “울고 간다”에 대한 보드너의 설명도 일반적으로 다른 주석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다음을 보라.

“Mind you, the cows “lowing as they went” suggest they were being driven against their natural inclinations by a power beyond them, as, of course they were” (Woddhouse, 1 Samuel, 117)

여기서 Woodhouse도 암소의 “울음”과 반의지적, 반본능적 행위를 연결시킨다. 어떤 학자도 인용하지 않고서 말이다. 비슷한 내용을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보드너의 책보다 우드하우스의 것이 먼저 출판되었지만, 보드너는 암소의 “울음”에 대한 설명에서 Woodhouse를 인용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본문으로부터 합리적으로 유추가능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필자는 암소에 대한 일반적인 관찰에서 보드너가 말하지 않은 메시지를 추출하여 제시한다. 즉 그 일반적인 관찰이 새로운 문맥에 사용되는 것이다. 암소의 ‘순종’에 대한 초점에서 황소를 순종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주권’을 설명한다. 하지만, 보드너의 촛점은 ‘obedience’에 첨가된 작은 따옴표가 말해 주듯이, 암소의 ‘순종’에 있다. 이상의 논의는 왜 필자가 삼상 6:10-12절의 설명에서 보드너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설명한다.

[10]
그러나 막상 블레셋이 공격해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한다(7절).”

when the people of Israel hear of the Philistine advance, they are ‘afraid’

위 설명은 삼상 7장 7절에 대한 재진술에 불과하다: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삼상 7:7: 개역개정).

 이것이 표절이라면, 보드너가 성경을 표절한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성경 본문 요약과 보드너의 요약은 표현에 상이함에도 유의하라.

[11]
그러나 이들은 20여년 전, 아벡-에벤에셀의 전투에 임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달랐다. 20여년 전 전투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실로에서 언약궤를 가져옴)으로 두려움을 해결하려 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미스바에 모여 회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인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한다:

There is no call for bringing forth the ark from Shiloh that ‘it may save’, but rather there is a reliance on the prophet’s mediation.

이 두 글은 삼상 7:8절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 이외에 표현에 있어 유사하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말했다: 당신은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이 블레셋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우리의 간구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야합니다” (삼상 7:8).

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달라고 간구한다. 삼상 7장의 미스바 전투와 4장의 에벤에셀 전투 사이의 비교는 매우 일반적이다. 두 본문 모두에 “에벤에셀”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전자에서는 돌의 이름으로 후자에서는 지명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이 구절에 대한 Woodhouse(131)의 다음 해설을 보라.

The similarity to and difference from the earlier response to the Philistine threat is striking. Twenty years earlier they had said, “Let us bring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here from Shiloh, that he may come among us and save us fro the hand of our enemies” (1 Samuel 4:3). The hoped-for outcome was the same—that God would save them from the Philistines. The obvious difference between the two occasions lay in the means by which the people hoped for. Twenty years earlier they proposed bringing the ark from Shiloh…Now they begged Samuel to cry out to the Lord “our God” for them.

이 해설은 삼상 7장의 전투와 4장의 전투를 연결시킨다는 점, 백성들이 전처럼 궤를 가져오는 대신, 사무엘에게 기도 부탁을 했다는 점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보드너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보드너는 Woodhouse를 인용하지 않고 있다.

[11-1]
앞선 3절에서 우상을 제거하고 온 맘으로 여호와만을 섬기라는 사무엘의 목소리에 이스라엘이 순종했던 것처럼, 쉬지 말고 기도해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소리에 이번에는 사무엘이 순종한다.

At this moment, it is Samuel who listens to the people. Previously in this chapter, it is the people who listen to the prophet and repent; now, there is an inversion, as the prophet listens to the people and prays.

이 부분이 유사한 이유는 동일 본문 8-9절에 대한 관찰에서 합리적으로 유추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삼상 7:8-9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개역한글)

이 본문은 백성들의 기도 요청을 따라 사무엘이 기도했다는 것이다. 보드너는 이것을 이전에 사무엘의 회개 요청에 백성이 ‘순종’한 것과 연결시킬 뿐이다. 이런 연결은 보드너의 독특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Woodhouse의 다음의 해설을 보라.

Now, however, at Mizpah the people have returned to the Lord. They have obeyed Samuel’s gospel and now asked him to cry out to the Lord “our God” for them. God’s people—when they are God’s people—can expect him [Samuel] to hear their cries. (Woodhouse, 1 Samuel, 131).

Woodhouse도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기도 요청한 것을 이전에 그들이 사무엘의 회개 요청에 순종한 것고 연결시키고, 그것에 기대어 사무엘의 ‘순종’을 기대한다고 적고 있다. 보드너가 Woodhouse를 인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본문으로부터 합리적으로 유추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필자는 이 일반적 관찰을 보드너와는 다른 메시지를 위해 활용한다. 이 관찰 후 필자는 ‘젖먹이’ 어린양을 바친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사무엘의 순종을 한나의 순종(한나도 ‘젖먹이’ 사무엘을 마침)과 연결시킨다. 하지만 보드너는 그 관찰에서,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하심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간다. ‘사무엘이 순종’ 했다는 것—이것도 8-9절에 대한 독해에서 누구나 인지 가능함—이외에는 전혀 다른 설명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내용을 문맥과 상관없이 뚝 떼어서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문제 삼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12]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를 매우 불쾌하게 느꼈다. 백성들의 요구를 뒤집어 생각하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실질적 통치자인 사무엘을 거부하는 것이다. 6절에서 백성들이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라고 말했을 때, 의도적으로 사무엘의 사사 통치를 연상시키는 동사 샤파트(שפט “다스리다”)를 사용한다. 이것은 백성들이 요구하는 왕이 사무엘의 사사적 통치를 대체할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무엘은 백성들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정성과 사랑을 보였는가? 사무엘은 해마다 중앙 핵심 지역을 순회하며 사람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그들을 위로하고, 중보해 주었다. 단지 직업이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목회했던 사무엘이다. 백성들이 그를 거부하면서 왕을 요구했을 때 사무엘이 느꼈을 배신감과 모멸감, 그리고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보통 사람같으면 백성들을 꾸짖으며 저주를 퍼부었겠지만, 사무엘은 무너진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6절).” 어머니의 기도로 태어나고 양육되고, 기도의 사명을 수행한 사무엘답게,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 앞에 무릅 꿇어 기도한다. 본문은 사무엘의 기도가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다만 7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응답으로 보아 사무엘이 하나님께 “백성들이 나를 버렸다”고 한탄하며 기도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라고 기도로 물었을 것이다.

Consequently, one guesses that the matter is evil in the eyes of Samuel for personal reasons in the first instance. As Peter Miscall (1986: 47) notes, ‘Samuel deeply resents the people’s demand that he exercise his authority to demote or even remove himself by appointing another leader, a king, especially one who will govern or judge (shapat) the people as he has been doing’. Virtually every reader of this narrative should be able to sympathize with Samuel’s plight. To be declared vocationally redundant is surely not an easy thing to manage. It is to the prophet’s credit, therefore, that his first response is to ‘pray’. Such an intercessory reflex runs in the family, since on numerous occasions Samuel’s mother is the subject of same verb. Previ.ously, Hannah prays for a son who is destined for leadership; now that son prays about the new leadership paradigm rapidly emerging

이 두 글은 삼상 8:6절에 대한 해설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표현과 내용의 구체성에서 있어 완전 다른 글이다. 여기서 필자는 왕을 달라는 요구가 사사(‘샤파트’ 하는 자) 사무엘에 대한 거부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백성들이 왕의 직무를 정의하기 위해 ‘샤파트’라는 동사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원문에서 추론되는 합리적인 설명이다. 백성이 새로운 통치자의 사명을 ‘샤파트’로 표현했다는 것은 사무엘상 8장 본문에 대한 일반적인 관찰로 보드너가 인용한 Miscall의 독특한 주장이 아니다. Birch, 1 and 2 Samuel, 1027; Green, How Are the Mighty Fallen? 181; Stoebe, Das erste Buch Samuelis, 183 등을 참조하라. 사무엘의 역할이 ‘샤파트’였다는 것은 삼상 7:15-17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며, 이것도 학자들이 널리 언급하는 바이다. Fokkelman, 1 Samuel 1-12, 331; Wenin, Samuel et l’instauration de la monarchie, 108, 134 등을 참조하라. 또한 사무엘이 기도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매우 일반적인 내용이며, 사무엘의 기도에 대한 필자의 해설도 보드너의 해설보다 훨씬 자세하다. 필자는 이상의 내용을 설명하는데 보드너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다.

[13]
7절은 사무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록한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이 본문에 인용된 것은 이번이 두번째이다. 3:11-14에 인용된 첫번째 말씀은 엘리 제사장에 대한 심판 메시지였으나, 이번에는 빈정 상한 사무엘에 대한 목회적 상담을 그 내용으로 한다. 먼저 하나님은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장로들이 왕을 요구한 사건은 사무엘 개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사건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한 도전이 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적인 감정은 일단 접고 더 큰 그림인 구속사를 살펴보자”라고 하시면서 8절에서 사무엘에게 “구속사 신학 입문”을 강의하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이끌어 낸 후 줄곧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해 왔다. 예를 들어 7:3에서 사무엘이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기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그만큼 많은 백성들이 각자의 집에 이방 신과 아스다롯 우상을 모셔놓고 살았음을 반증한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버렸었다. 하나님은 빈정 상한 사무엘에게 “이제 너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거절 당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내가 지난 수백 년 동안 느꼈던 가슴 아픔이 어떤 것인 줄 알겠지?”라고 하며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In an optimistic contrast to 3.11-14, the word to Samuel here begins in an almost pastoral tone. If the reader has been wondering whether Samuel’s reaction to the elders’ demand for a king is ‘evil in his eyes’ for personal or theological reasons, then God himself provides the answer in 8.7: ‘Listen to the people’s voice, to everything they’ve said to you. Indeed, its not you they have rejected; rather, it is me they have rejected from being king over them.’ After assuring Samuel that he the prophet is not the central issue here, God proceeds to give Samuel a lecture in Historical Theology 101: ‘this rejection of me’, to paraphrase the divine speech, ‘is really nothing new, it is a continuation of the pattern ever since I brought them out of Pharaoh’s clutches in Egypt. Now you, Samuel, with your personal rejection here, have an idea of what I have experienced for centuries.

이 두 글은 삼상 8:7-8에 대한 해설이다. 이 부분에서 필자가 보드너의 글을 참조했음에도 보드너를 인용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그 내용이 본문에서 합리적으로 유추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고, 둘째, “Historical Thelology 101”이라는 표현도 일반적 표현으로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문맥에서 은유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하나님이 7-8절에서 사무엘을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 즉 하나님 말씀의 톤이 ‘목회 상담적’이라는 사실은 본문에 대한 다음의 표준새번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 달라는 장로들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주께 기도를 드렸더니, 7. 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8.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하는 일마다 그렇게 하여,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더니, 너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빈정상한 사무엘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말씀해 주고 계신 것이다, 이를 위해 배신의 구속사를 개괄하신다. 사무엘에게 말하시면서, “너는 나보다 낫다. 내가 당한 것은 더 심하다”라는 뜻을 전달한다는 사실은 위에 인용한 본문으로부터 합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사실이다. 즉 학문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어서, 학문적인 주석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목회적인 주석이나 목사님들의 강해 설교에 등장한다. 전자의 예로 John Wesley의 Explanatory Notes에서 삼상 8:8에 대한 해설을 보자.

Verse 8
[8] According to all the works which they have done since the day that I brought them up out of Egypt even unto this day, wherewith they have forsaken me, and served other gods, so do they also unto thee.
So do they — Thou farest no worse than myself. This he speaks for Samuel's comfort and vindication.

밑줄 친 부분은 성경 본문 “너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삼상 8:8)에 대한 웨슬리의 해설이다. 밑줄 친 부분은 “너는 나보다 휠씬 낫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겠느냐?”의 뜻이며, 그것은 사무엘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웨슬리는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전달하는 필자의 표현도 다르다. 구속사를 개괄했다는 내용을 “<구속사 신학 입문>을 강의하신다”으로 표현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X 101”이라는 표현은 대학의 수강신청 코드 시스템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떤 주제에 대한 ‘개론’ 수업을 지칭한다. 일상 생활에서 사용될 때에는 실제 대학 수업이 아닌 어떤 주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설명을 의미한다. 필자의 표현 “구속사 신학 입문”이라는 말은 보드너의 “Historical Theology 101”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맞으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한국 독자에게 한국 말로 성경을 설명하는 주석에서 굳이 보드너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먼저, 그 표현은8절의 내용에 대한 수사적 설명이지, 어떤 누군가의 고유한 지식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필자의 “구속사 신학 입문”이라는 표현은 “Historical Theology 101”에 대한 번역어도 아니다. 보드너의 표현은 “역사 신학 개론” 혹은 “역사 신학 101” 으로 번역될 수 있고, 필자의 표현은 “Redemptive History 101” 혹은 “Introduction to redemptive History”로 번역될 수 있다. 표현이 다르다.

이처럼 내용이 일반적이고 비유가 일반적인 경우, 사실 전달의 참고서에서 그 내용뿐 아니라, 그 내용을 설명하는 비유가 겹치더라도 인용없이 사용될 수 있음은 다음의 예로 확인된다. 다음은 예루살렘을 다윗이 수도로 정한 것에 대한 쿠걸(How to Read the Bible; 하버드대 은퇴 교수)과 베이든(Historical David: 예일대 교수)의 설명이다.

쿠걸의 설명:
But the biggest advantage Jerusalem offered David was its location. Not far from his hometown of Bethlehem, (1) it was nonetheless perched on the border between Judah and the northern tribes. Making it his capital was thus a clear statement: (2) this town, and my whole administration, belong neither to the north or the south, but to both. Three millennia later, faced with a similar situation (and perhaps inspired by the biblical model), the founders of the American republic carved out a piece of territory between north and south and called it the District of Columbia, in which they built the capital city of Washington. In both cases the result was the creation of a new center of power, one that could inspire the loyalties (James Kugel, How to Read the Bible, 486)

베이든의 설명:
Jerusalem was also well located for David’s purposes. As David was the first king to rule both Judah and Israel, (2) it was important that he choose a capital that would not appear to show favoritism toward either. (1) Jerusalem is situated almost directly on the border between the two. The obvious modern analogy (3) is the choice of Washington, D.C., as the new capital of the United States, positioned as it is on the line between the northern and southern states (Joel Baden, The Historical David, 160).

쿠걸과 베이든은 모두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이야기 하면서, 다윗의 예루살렘 천도를 미국이 워싱톤DC에 수도를 정한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 짦은 패러그래프 안에 적어도 세 가지가 요소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첫째, (1) 예루살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중간에 위치한다. 둘째, (2) 그것은 다윗 정부가 남과 북,어느 한쪽을 편애한다는 인상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세째, (3) 다윗의 그런 결정은 미국이 워싱톤DC에 수도를 정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처럼 내요과 그 내용을 설명하는 비유가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쿠걸과 베이든은 누구도 인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일 본문에 대한 주석의 경우 그 본문에서 합리적으로 유추 가능한 내용이고, 그 비유가 일반적일 때는 누구의 권위에 의존할 필요없이 사용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밝힌 대로, 보드너의 책을 참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 보드너를 인용하지 않기로 판단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더우기 필자의 설명은 그 구체성과 표현에 있어 보드너의 것과 매우 다르다. 따라서 단지 내용이 유사하고 비슷한 예가 등장한다고 표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14]
또한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을 때 “기름 뿔”을 사용하지 않고 “기름 병”을 사용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왕에게 기름부을 때 보통 뿔에 담긴 기름을 사용한다. 한나의 노래에서 한나는 앞으로 세워질 왕을 찬양할 때 뿔을 언급한다(2:1, 10). 다윗(삼상 16:13)과 솔로몬(왕상 1:39)도 뿔에 담긴 기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다. 그런데 사울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무엘이 기름 뿔을 사용하지 않고 기름 병을 사용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30명의 손님과 넙적 다리를 준비한 그 용의주도함이라면 기름 뿔을 충분히 준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북이스라엘의 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 기름 병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왕하 9:1)은 사울이 정통성을 가진 남왕조가 아닌 정통성을 상실한 북이스라엘의 왕들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 같다.

Several commentators have pointed out, however, that the anointing instrument is abnormal. In chap. 2 Hannah sings, ‘the LORD will give strength to his king, and exalt the horn of his anointed’, and indeed, both David and Solomon will be anointed with ‘the horn of oil’ later in the story. Yet here, Hannah’s son gives Saul the vial treatment. A quick glance at a concordance reveals that there is only one other anointing with a vial of oil in the Bible: Jehu son of Nimshi in 2 Kings 9, who drives like a madman. By the end of his career, as we will see, Saul will have less in common with the kings of Judah and far more in common with various northern kings and their short-lived reigns. If this is a somewhat deficient anointing in chap. 10, it fits with Saul’s ‘aborted type-scene’of chap. 9, and does not augur well for his tenure as Israel’s anointed.

사무엘이 “기름 병”을 사용한 것의 의미는 이미 다른 학자들에 의해 자주 논의된 것이다. 보드너의 독특한 관찰이 아니다. 사울의 기름부음과 북이스라엘 왕의 기름부음을 연결시키는 것도 보드너 자신이 인정하는 것처럼 그다지 어렵지 않는 관찰의 문제이다. “A quick glance at a concordance reveals that there is only on other anointing with a vial of oil in the Bible: Jehu.” 즉 사울과 북이스라엘 왕과의 연과는 “기름 병”에 대한 단어 검색을 통해 누구나 발견 가능한 사실이다. 실제로 한국말 “기름병”으로 성경을 검색해보면 쉽게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보드너가 Miscall을 자주 인용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대한 그의 설명이 Miscall의 설명과 상당히 유사함에 불구하고 보드너는 Miscall을 인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음은 이 부분에 대한 Miscall의 설명이다.

"Samuel took the vial of oil, and he poured it on his head." The statement is an excellent example of a two-edged allusion. Anointing with oil is associated with priests and kings and marks Saul as an important and recognized official. However, "vial" (pak) is a rare word. Elsewhere it occurs in Elisha's command to anoint Jehu king (2 Kings 9:1-3). Jehu fulfills the word of the Lord spoken by Elijah by annihilating the house of Ahab and by eradicating Baal worship from Israel, but he does it by a brutal purge. "Jehu was not careful to walk in the law of the Lord the God of Israel with all his heart; he did not turn from the sins of Jeroboam which he made Israel to sin" (2 Kings 10:31). When Samuel anoints David, it is with a horn (qeren) of oil. The term is in the Song of Hannah: "He will give strength to his king and exalt the power [qeren] of his anointed" (1 Sam. 2:10). Pak in 1 Sam. 10:1 dissociates Saul from David and from the closing statement of the Song of Hannah (Miscall, 1 Samuel, 59)

Miscall은 “기름 병”과 “기름 뿔”을 구분하고, 전자를 북 왕국 왕 예후와 후자를 다윗 왕조와 연결시키다. 나아가 “기름 뿔”과 관련하여, 한나의 노래(2:10)을 언급하며 사울의 기름부음이 다윗과 한나의 영적 계보와 다른 것임을 말한다. 보드너가 말하는 내용과 유사하다.

이것은 본문에서 관찰 가능한 것, 그 관찰에 의해 합리적으로 유추 가능한 설명은 반드시 다른 권위에 의존해 말할 필요가 없다는 학자들 사이의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준다.

[15]
사울이 암몬 왕 나하스를 무찌르자, 사울의 지지자들은 사울의 왕됨을 인정하지도 않고, 선물도 가져오지 않은 “비류”들을 처단하려 한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것은 그들이 비류들에 대한 처단을 사울 왕이 아니라 사무엘에게 부탁한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왕정 자체에 대해 반대한 인물이다. 사람들은 비류들 처단에 관한 결정을 사무엘에게 강요함으로 왕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시험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이 상황을 사울이 나서서 해결한다. 사울은 승리의 공을 여호와께 돌리며, 비류들의 이전 불충(不忠)을 용서한다. 이 단계에서 사울은 자신의 전쟁 능력을 입증했을 뿐 아니라 백성 통합에 필요한 통치자로서의 덕목도 보여준다. 비록 이전에는 블레셋 진영을 공격하라는 사무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지만, 이번에 사울은 암몬과의 전쟁을 통하여 자신의 왕됨을 성공적으로 증명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사울의 통치 기간 전체를 보면, 이 순간이 사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의 전 생애에서 사울이 이때처럼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묘사된 적은 없다. 암몬 왕 나하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사울은 이제 길갈에서 온 백성들과 사무엘 선지자 앞에서 공식적으로 왕으로 취임하는 일만 남겨 두었다.

Their demand seems to refer back to the sons of Belial at the end of the previous chapter, the ones who mutter against Saul and bring him no gift. The quotation is not quite accurate, and indicates the peo.ple’s own hermeneutic at work as they lodge their grievance with Samuel, and demand a moment of retribution. ‘And yet’, comments Graeme Auld (2003: 220), ‘we may note with a wry smile that the people take this com.plaint to the very one who had been most doubtful about kingship at all!’ Samuel has only been referred to by Saul in this chapter, and this is his first formal appearance. It is curious, therefore, that Saul is the one who inter.venes with words of pardon: ‘Saul quickly steps in to correct the possible misinterpretation. He credits the victory to Yahweh, the supreme com.mander, at the same time acting in his capacity as human leader to declare a day of amnesty for wrongdoers’ (Edelman 1991: 65).

이 두 패러그래프는 삼상 11:12-13절에 대한 해설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매우 다른 글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독자들이 판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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