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담임목사와 전도사의 사례(월급)가 같은 이유”

입력 : 2018.09.07 07:57

[유한승의 러브레터] 마지막 결단과 다짐

유한승
▲유한승 목사.
지금까지 정리해 온 목회 철학과 자기다짐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20대 후반부터 43세가 된 지금까지 돌아보니, 세월은 참으로 순식간입니다. 그런데 아마 앞으로 더욱 더 빨리 지나가겠지요. 그렇다면 오늘 내가 내린 결정 하나 하나는 순식간에 쌓이고 쌓여서, 후세대들을 위한 또 하나의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으신 몇 분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가 이러한 내용을 모두 지킨다니, 너무 대단하신 것 같다고 말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0대부터 교회의 모순을 통해 깨달은 바와 결심, 제 자신이 느끼는 목회상을 작성해 오고, 목사가 되서도 여전히 가다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매년 두 차례씩 꺼내보면서 ‘지키지 못한 것’과 ‘지켜야할 것’들을 가다듬으면서 느끼는 것은, 새롭게 추가해야 할 내용, 혹은 다듬어야 할 것들보다는 제가 말한 바를 지키지 못한 것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목회 철학과 자기점검을 돌아보는 시간 없이는 언제든 제멋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목회자가 되기 쉽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목회 철학과 자기 다짐의 마지막 부분은 최종 자기 다짐과 결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꼭 지켜야 하는 부분을 결심으로 축약해놓은 것입니다.

◈마지막 결단과 다짐

1. 가르치려 하지 말고 살아라. 가르쳐 살게 하는 시대가 아니라. 삶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라.

: 말로 가르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문제는 가르치는 자들이 살아가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들의 말을 통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먼저 가르치는 자들의 삶의 회복입니다.

2.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충분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말씀 앞에 벌거벗겨진 영적 독대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 수많은 영성 훈련이 있고, 신학생 교육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야곱이 깨달음을 얻은 순간은 물질도 사람도 없는 광야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독대했을 때입니다. 모세가 큰 은혜를 받을 때는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과 만날 때였습니다. 아무도 없이, 어떤 도구도 없이 그저 말씀 앞에 설 때, 하나님은 그를 성장시킵니다.

훌륭한 목사님들도 많고 강사들이 즐비합니다. 좋은 교재들도 너무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독이 된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목회자는 또 다른 프로그램, 좋은 강사에게 교육받으려고 시간을 쏟고, 성도들도 유명한 목사, 큰 교회, 좋은 프로그램, 좋은 교육부가 있는 곳에 눈을 돌립니다. 자기 자신의 영적 각성의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성 훈련은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3. 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자족함을 모르면 금새 삯꾼이 되고 만다.

: 어르신들의 순결한 신앙의 모습 가운데,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얼마나 황망하게 고개를 숙이시는지 모릅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대접받는 목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지침서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9절입니다. “종이 밭에서 돌아오면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로 하여금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종의 마음가짐은 기본적으로 사례받지 않는 것입니다. 맡겨주신 일은 하나님 명령이라 순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감사하게도 사례비를 주십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교회를 섬기는 일을 본업으로 삼은 목회자들이 현실적 문제로 맡겨주신 사역에 소홀해지지 않도록, 맡겨주신 곳에서 사례비를 주십니다.

그러니 얼마가 됐건 주신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종은 기본적으로 내게 맡겨진 곳에서 주시는 사례만으로 충분한 자가 되어야합니다. 그 자세를 잃으면 자본주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런 자는 ‘삯꾼 목사’, 돈과 명예, 조직과 내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 교회는 담임목사와 전도사의 봉급 차이가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먼저 하나님 아래 평등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곳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섬기는 종들은 그 금액이 얼마이든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감사의 마음으로 섬기되, 시스템은 자본주의와 다른 사례비의 구조를 갖추고 있을 때, 사역자들이 돈 때문에 섬기는 삯꾼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습니다.

4. 신앙생활에 자랑은 독이다. 말씀과 기도를 자랑의 수단으로 삼는 자는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자가 되는 것이다.

: 기도나 말씀 생활은 내가 하나님께 이끌리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내 자신이 성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성경을 줄줄줄 마치 구구단 암송하듯 외우는 분이 계십니까? 잠시 그 호흡을 멈추고, 암송하는 그대로 얼만큼 살아가는지 돌이켜 보십시오. 말씀과 기도에 이끌리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말씀과 기도를 내 자랑의 수단으로 이끌고 다니는 손수레꾼이 되셨습니까.

5. 가장 낮은 자에게서 배우는 습관을 가져라. 가장 훌륭한 스승은 잘 배우는 자이다.

: 배우는 것이 많아야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정된 사람, 한정된 곳에서만 배우려 합니다. 그러니 사실 똑똑한 게 아니라 바보가 된 것입니다.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사람에게서야 누구든 배울 수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내가 가르치는 그 학생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사입니다. 본인이 일주일을 준비한 설교보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한 명의 어린이가 한 소리를 듣고 깨닫는 목사입니다.

6. 교회의 구멍은 곧 내가 채우는 퍼즐 조각임을 잊지 말라.

: 교회가 참 구멍이 많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올해 다른 교회 한 성도가 상담을 했습니다. 누가봐도 큰 교회를 다니는 그 분의 상담 내용 중 하나는 교회를 옮기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배가 뭔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먼저 말씀과 기도를 해본 뒤 교회를 옮기시라 권했습니다. 사람마다 맞는 영적 코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은혜받지 못하는 예배가 1년, 2년 반복되면 먼저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서를 달았습니다. 반드시 얼마 못가 옮긴 곳의 예배도 습관화될 것입니다. 그 때는 또 그 예배가 부족하다 느껴질 것입니다. 그 때 또 옮기시렵니까?

한 번은 작은 교회를 다니는 분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역시나 교회를 옮기는 문제였습니다. 이유는 섬기고 싶은데 교회가 너무 작아서, 내가 원하는 섬기는 부서(선교나 구제)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 위에서 설명한 그대로 다시 물었습니다. “예배는요?” 예배는 너무 은혜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뭐하러 옮기십니까?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면 먼저 형제님이 그 교회에서 자발적으로 일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러려고 성도님을 그곳에 보내셨겠지요.”

그분이 망설이자 두 번째로, “지금 그 이유대로 교회를 옮긴다면 옮긴 교회에서나 다른 곳에서 그 이유를 토대로 진실되게 자신의 삶을 간증하실 수 있겠습니까?” 내 삶을 누군가에게 거짓없이 드러낼 때 간증하기 부끄럽다 판단되는 것은 바른 판단이 아닙니다.

사실 수많은 교회들에서 ‘수평이동’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수평이동의 원인이 바로 ‘내 욕심’ 때문임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삼고 그리스도인들이 지체가 되어 하나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누군가는 입 누군가는 손가락, 누군가는 발, 그래야 하나의 몸이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만약 지금 섬기시는 그 교회가 잘 걷지 못합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발이 되려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교회가 앞을 잘 못 보고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비판만 하려 하는 주님의 머리 흉내를 내고, 눈의 역할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럴 때가 되면 ‘분량’이라는 언급을 하며 일을 회피합니다. ‘달란트’라는 이유를 대며 ‘내가 할 일이 아니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토록 외치던 그 말씀은 왜 그 순간이 되면 사라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모세가 지팡이만 가지고 있다 해서, 지팡이에 맡는 일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지팡이밖에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을 때 200만명의 백성을 구해낸 것입니다.

청년 시절 다니던 교회가 분쟁이 생겼을 때의 일입니다. 연약한 권사님들이 폭행을 당해 억울한 소송을 당했지만, 아무도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나이 27세였습니다. 법학과는 전혀 무관한 영문학을 전공했던, 그저 문과대학을 나온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제가 해야할 일이 그것임을 깨닫고 법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억울한 소송을 당하신 분들을 위해 직접 변호사를 만나고 법원에 나가기도 하며 서류를 써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스스로 청년부에서 나와, 혼자 그 일을 도와드려야 했습니다.

지금 와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은 바로 그 때, 그 분들을 돕게 하기 위해 저를 두셨던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모자라고 모난 제가 그 일을 통해 다듬어지고 성장하기를 바라며 교회가 오전해지는 도구가 되도록 저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유한승 생명샘교회
▲부활주일 찬양축제. 가운데 정장 입은 사람이 유한승 목사다. ⓒ교회 제공
7. 사도 바울이 믿음이 연약한 자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은 것처럼,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라도 복음을 위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 목사 안수 받을 때, 선배 목사님들이 질문했습니다. “비전이 뭡니까?” 많은 분들이 전도, 그리고 땅 끝까지 선교, 순교, 등등을 대답할 때, 제게도 질문하셨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생각했었던 비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린도전서 8:13)”.

제가 대답했던 본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저는 능력이 부족해서 다른 비전보다는 저로 인해 한 명이라도 실족하는 사람이 안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제가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목사 안수 받았던 그 해, 교회에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갈등이 연달아 생기면서, 제가 섬겼던 청년 몇몇이 다른 교회로 옮기는 등 문제가 생겼고, 그 상황에서 교회를 맡아 설교해야 하는 상항이 되었습니다. 교회 중직자들과 장로님까지 우루루 한 번에 빠져 나가시니, 교회는 대혼란이었고, 남은 자들에게는 커다란 상처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떠난 자들은 홀가분해집니다. 하지만 남은 자들은 평생 그 멍의 흔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 멍이 난 교회를 섬겨야 하는 제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교회에서 목사의 직분과 그로 인한 모든 대우를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목사의 직분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이 약속 때문입니다. 목사로 인해, 사람으로 인해, 직분으로 인해, 욕심으로 인해, 이기적 선택으로 인해 상처받은 성도들과 다시 주님의 은혜로 하나되기 위해, 제가 죽는 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목사 안수 받으며 했던 그 약속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 마음의 중심을 들여다 보고 계심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전적으로 그분께 맡기십시오.

8. 아무리 옳다 생각되는 것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 복음의 삶은 본이 되어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데 있다. 그러나 바른 것을 권하라. 강요가 아닌 권함을 통해 주님께 나아가도록 기도하는 것,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다.

: 목회하면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강요하지 않되 권하는 삶인 것 같습니다. 이 철학에 의해 살아가는 삶은, 오해의 여지도 많습니다. 목회자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깨달을 수 있도록, 그러므로 성도가 바른 삶의 길을 찾았다면 오히려 목회자가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일. 그래서 외롭기도 한 길이지만 지켜야 하는 철학입니다.

9. 삶이란 더불어 사는 것이다. 교회 안에 갇혀서,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야할 사람과 교회들을 외면하는 목사가 되면 안 된다.

: 교회의 핵심정신은 ‘함께’입니다. 나눔입니다. 나눔의 정신은 더불어 살지 않으면 나눔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연합을 추구해야 합니다. 가깝게는 지역교회와, 멀게는 정말 멀리있는 교회와…. 교회가 교회와 연합하지 못하면서 엉뚱한 아프리카와 연합하는 것처럼 아이러니한 일은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바르게 세우는 일을 하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외면하는 목사나 교회가 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도 없습니다. 바른 교회, 바른 성도, 바른 목회자는 열심히 신문을 보고 말씀을 봐야 합니다. 열심히 다른 교회의 아픔을 들여다 보고, 내 아픔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하 교회의 현실에서 벗어날 생각도 안하고, 매년 물이 뚝뚝 떨어지면서도 10여개 교회들을 돕고 함께하는 이유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한 번은 크게 깨달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자립한 교회이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온갖 벌레와 오염된 환경 속에 예배드림에도 수리조차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어린이 부서 예배실도 없는 형편에, 이를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와는 전혀 관계도 없었던 한 교회에서, 교회를 방문하고 우리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신 일입니다. ‘긍휼 사역팀’이라는 그 팀은 주로 노숙자나 정말 어려운 교회들을 돕는 팀인데도, 저희 교회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시고 곧바로 이 일을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돌아보면서, 우리가 구제하고 나누는 개념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돌아보게 됩니다. 꼭 아프리카여야 하고, 꼭 미자립교회여야 하고, 꼭 우리 마음에 봉사하고 구제했을 때 정말 잘했다 싶을 만큼의 대상을 찾으려 하는 우리 마음 속 욕심의 쓴뿌리가 남아있어서, 때로는 우리 교회와 같은 현실에서 허둥대는 이웃을 외면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는 교회 운동 AMCM을 통해, 꼭 너무 어렵고 힘든 교회만 돕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함께 찾아가 예배하고 섬기려 합니다.

간혹 성도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보다 장소가 더 좋은데요?” 그러면 답합니다. “얼마나 기뻐요?” 함께하기에 기쁜 이유입니다.

10. 목회자들끼리 관계 맺는 시간을 줄이고, 성도를 위해, 교회를 위해 일하라. 목사가 끼리끼리가 되면, 성도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 할 자격이 없다.

: 예전 전도사 시절, 큰 교회의 청년예배에 참여한 일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간 그 교회에서는 약 200명이 넘는 청년들이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너무 눈에 잘 띄는 휠체어를 타고 들어온 청년이 있었음에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친구를 통해 그 날 새로 왔다는 친구들은 아주 진귀한 대접을 받고 축복받았습니다. 돌아가면서 ‘교회가 커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청년부 전도사라는 것을 몰라서인가? 이유가 뭘까?’ 궁금했습니다.

동일한 모습을 노회에 가서 봤습니다. 처음 노회에 들어가 낯설어하고 있는, 아니 잘 적응이 안 되는 상태였습니다. 휠체어를 끌고 갔는데, 먼저 와서 목회나 교회에 대해 물어보는 목사님은 그 많은 분들 중 한 분 계셨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 저는 식판을 직접 가지러 갈 수 없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누구 하나 식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 없었습니다. 결국 혼자 가지러 갔다가 교회 성도 분이 도와주셨습니다. 그 사이 목사님들은 이른바 노회에서 잘 알려진 목사님을 기준으로 주르륵 앉아 식사를 했습니다.

크게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목사가 끼리끼리이니 성도들도 바뀌지 않는구나. 청년들도 바뀌지 않는구나.’ 사실 많은 목사님들이 자신에게 도움 되지 않는 목사나 전도사를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귀찮은 일이 생기고 도움 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 쓸 시간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부터 원칙을 바꾸었습니다. “누구라도 저를 만나겠다고 연락하면 만나고 시간을 비워두는 목사가 되자. 우리 교회 성도뿐 아니라 그 누구든. 언제라도 그 주간에 만날 수 있도록 내 삶의 스케줄을 바꾸자.”

그 뒤부터 성도들에게 ‘끼리끼리 살지 말자’고 말할 때,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우리 청소년 청년들도 깨달을 때가 올 것이라 저는 굳게 믿습니다.

11. 목사는 본래 완전한 목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목자를 좇는 또 다른 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같은 양 무리를 위해 목자가 방울을 달아준 양일 뿐이다. 그 양이 해야할 일은 주인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순종해야 하는 것뿐이다.

: 이사야 52장에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내용을 예언하면서 우리에게 중요한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네. 우리는 선지자나 예언자나 목사나 제사장이나 사실 다 '양' 입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는 양이 아닌 것처럼 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목회자가 꼭 유념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지도자라 칭함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 23:10)”. 제 목회철학의 중심에 있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지도자라고 칭함 받으면 안 됩니다.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지도자라고 강조하면서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목사가 지도자로 착각하여 그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지도자 되심을 잃고 방향을 잃습니다.

목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요한복음 10장 11-12절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목자는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자는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자기의 것을 챙기면서, 내가 목자라고 말하고 지도자라 말하는 자는 '삯꾼'입니다.

‘내가 양 됨’을 아는 목사, 양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목자와의 관계가 많은 양에게 방울을 달아줄 때, 그 양의 역할은 그저 주인의 목소리를 먼저 알아듣고 먼저 걸어가서 같은 양들이 주인을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방울 달렸다고, 내가 목자처럼 살아가는 양은 그 무리를 이리떼에게 잃게 만들 것입니다.

12. 언젠가 사라질 때, 목사 OOO이 기억나는 사람이 되지 말아라. 예수의 향기만 남도록 사역하라. 사람들의 생각에서 사람 이름 류한승이 기억나면 실패한 목회자요, 비록 사람에게는 잊혀져도 예수의 길이 무엇인지 남기면 성공한 목회자다.

: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을 지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목회자가 지도자인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고, 그 욕망을 목사에게 심어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공동체를 죽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도 죽게 됩니다.

공동체 담임목회자로서 해야 할 가장 큰 역할은, 그 공동체가 주님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방향만 틀어주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 먼저 걸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디렉터’ 시절 ‘디렉터’라는 용어를 ‘다이렉터’로 수정한 이유입니다.

13. 육신의 한계가 오거나 인지적 한계가 오면, 언제 어디서나 물러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물러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언제든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섬기는 일보다 누군가의 짐이 되어버릴 때입니다. 특히 목회자는 섬기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육신 탓에 섬김받는 일이 더 많아지면, 물러설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2015년부터 10년의 목회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노회에서 부여한 위임을 스스로 거절하고 3년 재신임제도를 교회적으로 갖게 되면서, 저는 영적으로 저를 돌아보고 경각심을 갖게 되는 동시에, 육신적으로 제가 짐이 되는 수준에 오지 않았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언제든 제가 물러나도 충격이 없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제 스스로도 언제든 그 자리는 '대신 있었던 자리' 임을 기억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몸을 돌보느라, 건강 관리하느라 본업을 잊으면 안 됩니다. 설령 자기 몸을 관리 못하더라도 맡겨주신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저를 보호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물론 육신은 연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겉사람은 연약해질 수 있지만, 속사람은 강건케 될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저는 다시 본래의 자리, ‘성도’로 함께 예배드리게 될 것입니다. 속히 오면 좋겠습니다. 그 전까지 최선을 다해 섬길 생각입니다.

14. 떠남, 그 순간이야말로 목회의 방점을 찍는 자리다. 뒤돌아보지 않는 것, 수년, 수십년, 그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었음을 고백하라.

마지막 다짐은 30세 즈음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정말 열심히 사역하고 섬깁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보이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기억되는 모습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은 그래서 맡겨주신 교회에 대한 충성과 순종 겸손보다는 여기저기를 떠나면서도 잘못을 모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의 근원은 목사에게 있습니다.

본을 보여야 할 목사가 떠날때 떠나지 않고, 떠남의 순간이 목회의 모든 역량이 집중되는 곳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3년을 사역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도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목회철학을 돌아보니 한 단어로 요약하면 ‘종’인 것 같습니다. 네. 우리는 사실 다 종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오시면 다시 드리면 됩니다. 그것이 주인의식입니다. 최선을 다해 맡겨진 것을 사용하며 살다가, 주인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내게 5달란트가 있었고, 5달란트까지 더해 10달란트를 더 벌어놨는데, ‘주님 이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늘 자각하는 자, 그것이 목회의 자리입니다. 특히 마지막 순간 이 고백을 놓치는 목회자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유한승 목사(생명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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